169화 그녀의 노력
단목세가 장원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나찰마궁이라는 사파의 최대 문파 중 하나가 선전포고를 했지만, 청룡단과 흑룡단 그리고 사천당문의 정예들이 있었기에 불안감이 대부분 해소되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술판 따위를 벌이거나 하진 않았다. 단목세가는 전쟁에 대비해야 했고, 지원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단목세가의 가주를 비롯한 각 전투 집단의 수장들은 가주전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무인들은 각자 전투를 준비하거나 새롭게 만난 이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은 당옥정과 단목산산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은 성격이 워낙 잘 맞아 오늘 처음 본 것임에도, 친자매처럼 친해져 있었다.
“정말? 장룡이 그렇게나 뚱뚱했어?”
“네,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당시에는 오라버니가 정말 한심해 보였다니깐요.”
“정말? 그런 장룡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질 않는데…….”
사실 당옥정은 단목장룡이 통통했던 시절 처음 만났다. 그렇다고 해도 십 장을 걸으면 지쳐 바닥에 드러누울 정도로 뚱뚱했다니?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당옥정이 눈을 감고 살이 찐 단목장룡을 상상한다.
당연히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어느 정도는 보정이 됐지만, 당옥정의 눈에는 그런 단목장룡의 모습도 멋지고 귀여웠다. 뱃살이 툭 튀어나와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당옥정은 그 물음에 지체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너무 귀여워! 볼살을 꼬집고 싶어!’
당옥정이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단목산산이 배시시 웃는다. 오라버니가 그리 좋을까? 당옥정이라면 충분히 오라버니와 어울릴 만한 여인이다. 사실 단목장룡은 어릴 때부터 여인들에게 놀아나곤 했었다. 그래서 무공은 고강하지만, 무림에서 나쁜 마음을 먹은 여인에게 이용당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당옥정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장룡은 왜 갑자기 살을 뺐던 거야?”
“그건…….”
사실 단목산산도 잘 모른다.
그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문에서 쫓겨날 위기였던 단목장룡은 머리를 다친 뒤로, 수련을 시작했다. 말투와 성격도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 이유가 대체 뭐였을까? 머리를 다친 부작용?
“사실 잘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머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마치 영혼이 뒤바뀐 사람 같달까?”
“영혼?”
“으음…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하잖아요? 오라버니는 정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거죠. 정말 존경스러워요.”
끄덕끄덕.
단목장룡이 존경할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도 공감하고 있었다.
“아무튼, 오라버니의 옆에 당 언니같이 좋은 분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헤헤… 아니야.”
당옥정은 몸을 배배 꼬았다. 장룡의 친동생에게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훨훨 날아갈 듯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으나 그녀는 이곳에 와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사천당문이 데릴사위제를 택하고 있다고 하지만, 단목장룡은 화경의 고수!
아무리 사천당문이라도 화경의 고수를 데릴사위로 들일 수가 없었다.
과거 뇌왕과 독봉 당용아의 관계에서도 지금 사천당문의 태상가주인 당옥정의 조부는, 뇌왕을 데릴사위로 들이려 했던 것을 대단히 후회하고 있었다. 또 그런 길을 걷진 않으리라.
‘내, 내가 무슨 상상을……!’
벌써 혼인이라니!
당옥정의 부끄러움 수치가 점점 차오른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대충 예상이 되는 단목산산. 그녀가 흐뭇하게 웃는다.
“언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의미심장한 단목산산의 목소리.
그녀가 불쑥 묻는다.
“오라버니와는 어디까지 했어요?”
“으응? 뭘…….”
화악!
당옥정의 볼과 귀가 붉게 물든다. 당옥정의 반응이 그러니 단목산산의 얼굴도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지금 단목산산은 연애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다.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물었다.
“두 분 혹시 그것까지…….”
“아, 아니야! 아직 그 정도까진……! 나, 나도 사실 준비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건 혼사를 치르고…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장룡이 정말 원한다면…….”
그러자 단목산산이 두 눈을 크게 두어 번 깜빡인다.
“입맞춤을 혼사를 치르고 해야 하는 거예요?”
“에……?”
당옥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그녀 또한 불과 몇 년 전까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독봉의 사악한(?) 꼬드김으로 그 지식을 강제로 주입받았었다.
지금 눈앞의 단목산산은 당옥정보다 훨씬 어리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인 단목무광과 어머니 백예령에 의해 지식을 주입받은 상태였다. 단목산산은 과거의 당옥정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그건 아닌데…….”
단목산산이 고개를 휘휘 젓는다.
역시 예상대로 자신의 오라버니는 숙맥이 분명하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두고 입을 맞추지도 못했단 말인가! 요즘 아이들은 첫 만남에 손도 잡는다고 하는데!
물론, 단목산산은 전혀 경험이 없었다.
모두 친한 친우들의 대화를 들었을 뿐이었다.
“흐응, 오라버니가 그런 눈치가 좀 없긴 하죠? 그런 것은 사내가 먼저…….”
콩!
그때 누군가가 단목산산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사내가 먼저 뭘 하는데?”
“오, 오라버니?”
“장룡……!”
단목산산과 당옥정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두 여인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들으셨어요……?”
“다는 아니고.”
“헤헤헤…….”
단목산산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단목장룡이 다시 손을 들었다. 움찔하던 단목산산. 하지만 예상한 고통은 전해지지 않았다. 큼지막하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이제 밤이 늦었으니 잠자리에 들도록 해라.”
“저만요?”
“그래, 너만.”
단목산산이 긴장했다.
설마? 오라버니가 자신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려는 건가? 그렇다면 오늘 두 사람이…….
달빛을 머금은 두 남녀가 입을 맞추는 모습.
머릿속에 그 장면이 떠오르자 단목산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다.
“그, 그럼 저는 먼저 자러 가 볼게요!”
“그래, 잘 자라.”
당옥정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산산아, 내일 봐.”
“네, 언니!”
단목산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옥정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사실 이미 입은 맞춰 봤는데…….’
하지만 산산에게 그것까지 말해 줄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어찌 그것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리고 입을 맞췄다는 걸 설명하면, 그 이상의 것도 산산에게 알려 줘야 했다.
산산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떠나가고.
단목장룡이 당옥정의 곁으로 가서 앉는다.
“산산이랑 친해졌나 보네.”
“응, 정말 심성이 고운 아이 같아. 성격도 밝고, 대화도 잘 통해서 친해졌어!”
“다행이네.”
사실 당옥정은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성향의 여인이었다.
그래도 단목산산과 친해졌다니 묘하게 뿌듯한 단목장룡이다.
“회의는 잘 끝났어?”
“응, 아마 내일부터 바빠질 것 같아.”
그의 말에 당옥정이 강렬한 의지를 내비친다.
그녀 또한 이곳에 각오 없이 온 것이 아니다. 단순히 단목장룡을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최대한 단목세가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 최근에 간이 기관(機關)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거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하나하나 보여 줄게!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당옥정은 그에게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칭찬도 받고 싶었다.
“옥정아.”
“응?”
“말해야 할 게 있어.”
진지한 단목장룡의 어투.
그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회의 중에 무언가 일이 생긴 걸까? 단목장룡에게 내일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기대했던 당옥정이었지만, 그것에만 매몰될 정도로 그녀는 어리지 않았다.
“응. 들을게.”
당옥정이 귀를 쫑긋 세우고 단목장룡의 말을 기다린다.
단목장룡이 숨을 토해 낸다.
당옥정의 심장박동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난 내일 장원에서 떠날 거야.”
“떠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다.
하지만 당옥정은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철부지 같은 모습으로는, 그에게 걱정만 안겨 줄 뿐이다.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어디로?”
“일단 나찰마궁의 존자들을 상대하러 갈 거야.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나찰마궁주와 싸울 수도 있어.”
“……!”
아무리 놀라지 않으려 해도, 이 말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찰마궁의 존자들은 일정 수준에 오른 고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단목장룡이 그들과 싸우더라도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찰마궁주는 다르다. 그는 극마의 고수. 거기다가 단목장룡보다 훨씬 전에 극마에 올랐다.
같은 화경이라도 수준의 차이는 날 것이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그녀가 아무리 단목장룡을 믿고 있더라도, 나찰마궁주라니? 거기다 나찰마궁주의 곁에는 고수가 수없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옥정은 참았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 하냐고.
죽을 수도 있다고!
말리고 싶었다.
아니, 따지고 싶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단목장룡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또, 그가 이 일을 생각 없이 계획했을 리가 없었다. 전후 사정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기에 섣부른 걱정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옥정은 과거 죽립 하나를 눌러쓰고 장보도를 혼자 찾아 헤매던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아니, 산공독에 당해 납치당하여 단목장룡에게 방해만 됐던 당시의 소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말해야 할까? 하지만 웃기는 싫다. 그렇다고 울기는 더더욱 싫었다. 당옥정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한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크흡… 다, 다치면 안 돼……? 떠나기 전에… 내가 만든 간이 기관 중에 하나를… 흑… 줄게… 그걸 사용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녀가 겨우 내뱉은 멋없는 말.
그런 당옥정을 보고 있으니 단목장룡의 심장이 바늘로 콕콕 찔린 듯하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고 이곳에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울어?”
“아, 안 울 거든?”
당옥정이 황급히 눈동자의 물기를 닦아 낸다.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내일 아침엔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보여 줄게……!”
당옥정이 단목장룡을 이끈다.
그는 그녀를 따라 당옥정이 배정받은 방으로 갔다.
그녀는 분주하게 커다란 행낭에서 이것저것을 꺼낸다. 처음 보는 모양의 도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청룡단에서 독단을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더 나아가서 전투에 도움이 되는 병기들을 제작하거나 기관을 만드는 것을 공부하고 있었다.
혼자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마음이 담긴 도구.
당옥정이 단목장룡에게 그것을 건넨다.
세 가닥의 검은 끈 중앙에 둥근 모양의 철이 매달려 있다. 둥근 철 안쪽엔 촘촘한 얇은 실이 그물처럼 짜여 있었다. 빛깔을 보아하니 평범한 실은 아닌 듯하다.
“이건……?”
“심보망(心保網). 이름은 내가 지었어. 심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야! 이 실은 당문에서 특별히 키우는 지주(蜘蛛)의 실을 누안시독(淚眼屍毒)에 절여서 웬만한 도검으로는 잘라 낼 수조차 없는 실이야.”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심보망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놀랍게도 이 실은 마치 도검처럼 내력을 잘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는데, 반탄지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내공 소모가 적을뿐더러 더 튼튼하게 변해!”
파라랏!
당옥정이 원형의 철에 내력을 주입하자 실의 색깔이 푸르게 변화했다. 그리고 빳빳하게 변해 한눈에 봐도 쉬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보인다.
‘보물이군.’
신병이기.
혼이 담겼다는 그런 수준의 보구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물건이다. 아마 당옥정 혼자의 지식으로 만든 것은 아니리라.
“검으로 찔러 봐!”
당옥정이 두 손으로 심보망을 들고 당당히 섰다.
단목장룡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넣는다. 예리함이 극에 달한 뇌왕검인데도 실은 전혀 끊기지 않았다.
“검기까지 사용해 봐!”
즈으으으…….
잿빛의 검기가 맺혔지만,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대단한걸?”
“그렇지? 이걸 사용하면 적은 내공으로도 심장을 보호할 수 있어! 검강까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사용하면 분명히 검강도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혈세귀막으로 떠나기 전, 그녀는 단목장룡에게 폭혈단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심보망. 당옥정은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노력하고 있었다. 물건의 가치보다도, 그녀의 노력이 더 감동이었다.
“정말 고마워. 내가 이걸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당연히 받아도 되지! 널 위해서 만들었거든!”
당당히 외친 당옥정.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은 탓인지 얼굴이 확 붉어진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떨쳐 내기 위해 소리친다.
“어, 얼른 입어 봐! 너한테 딱 맞게 만들었는데, 키가 컸으니 조금 개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얼른 옷을 벗고… 헙!”
당옥정이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는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당옥정이 상황을 수습하려 외친다.
“나, 나는 나가 있을 테니까, 다 입으면 말해……! 엇……!”
당옥정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갑자기 단목장룡이 그녀를 안아 왔기 때문이다. 단단한 사내의 육신이 닿자 저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린다.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당옥정이 말과 행동을 멈추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옥정아.”
“으, 응……?”
“내일 아침까지 같이 있자. 해 줄 이야기도 있고…….”
“……!”
당옥정이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본다.
단목장룡과 눈이 마주친다. 너무도 진지한 눈빛.
지금 방 안에는 단목장룡과 당옥정 둘뿐이다.
여기서 같이 있자고……?
당옥정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서, 서, 서,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