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인연들의 방문
단목세가의 가모 백예령.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손님이 왔는데 후다닥 도망간다면 그 행태가 참으로 우스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단목장룡과는 불편한 관계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과는 반대로 불편함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손님이 누구길래 저리 급하게 달려오는 거지?’
그리고 손님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단목세가도 명문가 중 하나이다 보니 신분이 높은 이들이 많이 방문한다. 어지간한 이들의 방문에는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문지기의 얼굴엔 당황과 놀람이 가득했다.
“손님?”
“예! 공자님! 아, 가모님도 계셨군요!”
문지기가 뒤늦게 백예령에게 인사했다.
집안의 어른에게 먼저 인사해야 도리겠지만, 지금 단목장룡이 장원 내에서의 입지가 상당했기에 백예령조차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원에 방문한 손님이 누군지가 궁금했다.
끼이이익-
장원의 정문이 열린다. 그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헙!”
백예령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입구엔 흑색 무복을 갖춰 입은 무인들이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똑같이 검은색의 의복을 입었지만,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꽉 묶은 머리와 살짝 올라간 눈썹. 눈빛만으로 사내를 압도하는 기세. 덩치는 뒤에 선 무인들보다 작았지만, 그녀가 풍기는 기세는 무인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뒤에 정렬한 무인들이 꼭 그녀를 위한 장식품 같은 분위기랄까?
백예령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탄성을 뱉어 냈다.
‘여인이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그런데 대체 누구지?
여인과 단목장룡이 눈을 마주친다. 무언가 화가 나 보이던 여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녀는 급하지 않게, 위엄이 깃든 걸음걸이로 단목장룡에게 다가온다. 그녀를 흑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뒤따른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단목 공자.”
단목장룡이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군요.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 사이에 영광은요.”
뭘까.
백예령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여인의 얼굴로는 나이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십 대 후반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사십 대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라기보단, 그 분위기가 농밀하달까? 젊은 여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여유가 느껴진다.
‘장룡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서로 마음이 있는 건가?’
백예령의 시선을 느낀 단목장룡.
“이분은 본 가의 가모이십니다.”
“어머, 이렇게 젊은 분이 단목세가에 가모시라고요?”
이렇게 젊은 분?
백예령은 순간 기가 막혔다. 자신도 외모가 어디 가서 빠지진 않고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긴 하지만, 자기보다 어린 여자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나쁜 말을 한 것은 아니니…….
하지만 백예령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전 사천당문의 내당주 당용아라 해요. 당분간 단목세가의 신세를 질 예정이니 자주 뵙도록 해요.”
“사, 사천당문이요?”
사천당문이 어딘가?
오대세가는 정파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는 다섯 가문을 일컫는 말이다. 단목세가 또한 오래도록 그 반열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오대세가의 벽은 대단히 높았다. 거기다가 내당주라고? 백예령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독봉이라는 별호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강호의 소문난 여협으로, 강호가 사내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 준 무인이었다.
그녀가 백예령에게 젊은 분이라고 칭한 이유.
그것은 독봉이 백예령보다 열 살은 많았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혀서 그런가? 어찌 저 나이에도 피부가 이토록 고울 수가?’
그런 당황도 잠시였다.
그녀는 황급히 당용아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독봉을 뵈어 영광이랍니다. 전 단목세가의 가모 백예령입니다.”
“호호, 반가워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려요.”
‘우리 장원에 머문다고?’
순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백예령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머무시는 동안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신경 쓰도록 할게요.”
“어머, 아니에요.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니 가모께서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으세요.”
두 여인의 대화를 지켜보던 단목장룡.
그가 불쑥 묻는다.
“그런데 독봉께서 어떤 연유로 본가에 찾아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백예령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단목장룡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혹시 모르니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당용아의 입에서 그의 예상이 사실로 드러난다.
“단목세가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리고 그 아이가 서신으로 어찌나 성화를 부리던지…….”
그 아이는 당옥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단목장룡이 움찔한다. 당용아는 그런 단목장룡의 얼굴을 보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단목장룡과 당옥정을 이어 주려 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옥정이도 의창으로 오고 있는 겁니까?”
당옥정을 만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단지, 그녀가 일말의 위험에라도 노출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배려라고 하지만, 당옥정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녀가 용봉지회가 끝나고 무림맹으로 오겠다고 했을 때, 막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네, 하지만 혼자 오는 건 아닐 거예요.”
“고, 고, 공자니이이임!”
그때 단목세가의 문지기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또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그것도 엄청… 많이!”
단목장룡은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문 사이로 거의 백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투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일에 제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에서 봤을 때보다 확실히 성장한 것이 보이는 남궁일몽.
그가 여유가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다.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의 옆에는 눈빛에 충심이 가득한 설비연이 있다.
그들의 뒤에는 흑룡단원들이 열을 맞추어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흑룡단만 활약하게 할 순 없지!”
쿠우웅!
거대한 도를 바닥에 찍으며 외치는 거한.
수뇌 회의에서 마주한 경험이 있는 사내.
“팽 단주님?”
청룡단주 팽달까지 단목세가에 지원을 나왔다. 사실 무림맹에서 지원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한 단목장룡이었지만, 청룡단주가 직접 나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크하하하! 나찰마궁인지 뭔지 오기만 하면 모두 머리통을 쪼개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단목 조장!”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모두 단목장룡과 함께 싸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물론, 나찰마궁주가 나타날 확률은 높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나서 주니 단목장룡으로선 고마운 마음이다.
‘청룡단주님이 왔다면…….’
단목장룡이 그의 뒤를 바라본다.
그리고 중간쯤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옥정은 단목장룡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를 보니 그런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그리고 지금 단목세가의 장원에는 내로라하는 정파의 고수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나찰마궁이 정예를 끌고 오더라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옥정은 청룡단원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기에 팽달처럼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직접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걸 지켜보는 당옥정의 심장의 고동은 급격히 커져만 갔다.
사천당문의 내당주 당용아는 그런 단목장룡과 당옥정의 모습에 흐뭇한 시선을 보낼 뿐이다.
단목장룡이 당옥정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대체 이게 무슨……?”
이제야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가주 단목무광.
단목장룡이 개선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기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하하하! 단목 가주, 오랜만에 뵙소이다!”
“어머, 단목 가주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단목무광은 당용아나 팽달과 비슷한 연배였으니 안면이 있긴 했지만, 딱히 친분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오대세가 출신이었고, 단목무광이 강호행을 할 적에 그들은 무림오룡과 무림오화에 속해 있었기에 후기지수 시절 단목무광보다는 확실히 급(級)이 높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청하지 않았음에도, 단목세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호감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로 그에게 인사하고 있다.
‘고작 몇 년 동안 장룡이가 강호에서 쌓은 연이 이 정도란 말인가…….’
단목장룡이 개선한 무공을 익히면서, 아들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그 재능이 하늘과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홀로 무림에서 노력했을 아들에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하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단목무광은 이제 후기지수가 아니다.
한 가문의 가주로서, 식솔들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가주는 정중히 손님을 맞이했다.
“본 가의 위험에 이렇듯 먼 거리를 달려와 주신 선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와야죠. 단목세가의 일이니까요.”
“하하하하! 청룡단과 하북팽가는 위험에 처한 맹우를 두고 보지 않소이다!”
단목무광은 두 사람과 인사한 후, 청룡단과 흑룡단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찰마궁의 선전포고에 벌벌 떨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정파의 맹우들이 이처럼 달려와 주었지 않은가?
그렇게 가주가 감사 인사를 하고 있을 때.
“허어! 이게 무슨 일인가!”
“저 사람은 팽 대협이 아니오? 하북팽가주의 동생이라던?”
“맞소. 청룡단의 단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인은…….”
“사천당문의 독봉 아니오?”
“헛! 그 유명한 독봉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셨단 말이오?”
“같은 호북성의 무당과 제갈세가는 우려의 서신만 보내고 전혀 소식이 없는데…….”
“모두 다 장룡이의 인덕이 아니겠소?”
“역시 소가주의 자리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장로들.
그들이 단목장룡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아아아… 장룡, 너는 대체…….’
그의 진가를 알기 전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흠집 내려 했을 백예령이다. 그가 밉다기보단, 자기 아들이 단목세가의 소가주가 되고 결국엔 가주가 되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목청야.
애지중지 키워 왔던 아들과 단목장룡의 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어쩌면 정말…….
‘장룡이가 가문의 소가주가 되는 게 옳은 길일지도…….’
물론, 단목장룡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 * *
“와아-!”
피식.
당옥정은 어딜 가든 감탄을 쏟아 냈다. 사실 단목세가의 장원은 사천당문의 거대한 장원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녀가 이렇듯 즐거워하는 이유는…….
“장룡, 네가 어릴 때부터 여기서 밥을 먹은 거야?”
“그랬지.”
사실 그의 기억 속에는 없었지만, 이 몸뚱이는 그러했으니 맞다고 대답했다.
당옥정은 꼬맹이 단목장룡이 아장아장 걸어와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식사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녀는 그런 상상만으로 양 볼과 귀를 붉히며 흐뭇해했다.
“여기서 네가 매일 검을 들고 수련했어?”
“맞아.”
“와아…….”
또 무슨 상상을 하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당옥정이다.
“여긴…….”
“내 방이야.”
“흐읍!”
당옥정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콩닥콩닥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단목장룡에게도 들려오는 듯하다.
‘들어가 보고 싶어! 하지만 그건 너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리고 다른 어른들의 시선도 있고… 그래도 보고 싶다……!’
당옥정의 머릿속에서 두 색의 의견이 치열하게 공방을 나누고 있을 때.
단목장룡이 말한다.
“안에도 구경해 볼래?”
“응-!”
당옥정이 반사적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너무 크고 명랑했다는 걸 깨달은 당옥정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응?”
“안녕하세요! 당 언니! 전 오라버니의 동생 산산이에요!”
“장룡이의 동생? 정말 반가워!”
당옥정과 단목산산.
두 사람은 은근히 성격이 비슷했다. 죽이 잘 맞아 어느샌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의외로 당옥정이 단목산산에게 질문하고, 산산이 당옥정에게 대답했다. 대부분 단목장룡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옥정은 단목장룡의 친동생을 처음 보는 것이기에,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아주 많았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응!”
“네, 오라버니.”
재잘재잘 여인들의 일상적인 내용의 수다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 이야기는 내일 해야겠군.’
사실 단목장룡은 당옥정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어차피 그녀도 곧 알게 될 내용이지만, 그녀에겐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 * *
해남도 여모봉.
암천회의 환락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의 이름을 들은 암천회주가 살짝 놀란다.
“누구?”
“사마련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마련주가 여모봉에 직접 찾아왔다?
그 엉덩이가 무거운 양반이?
“입궁을 허가해라.”
사마련주 사마백혼.
그가 무슨 목적으로 해남도까지 발걸음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