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혼비백산
절강성 항주.
높이 솟은 성의 최상층. 황금으로 만들어진 집기와 장식품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집기 하나만 가져가도 평범한 백성들은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보물들이지만, 한 사내는 그것을 마치 길가에 널린 돌처럼 취급하며 마구 바닥에 던져 대고 있었다.
“감히!”
쿠웅! 쿵! 쿠우웅!
사내의 손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장인의 손길로 빚어진 보물들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사내는 왜 이렇게 분노한 것일까?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은 왜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을 뿐일까?
답은 간단했다.
그는 나찰마궁의 궁주였기 때문이다.
암천회의 회주가 극마의 경지에 올라 소싯적의 악의를 거의 털어 냈다면, 그는 오히려 더 커다란 악의를 가지게 되었다. 으레 무공의 고수가 점잖으며 참을성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나찰마궁주를 만나게 되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리라.
“커억!”
“큭-!”
나찰마궁주의 폭주는 궁도 몇 명의 머리가 깨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치워라.”
“예, 궁주님!”
다행히 나찰마궁주가 던진 기물에 다치지 않은 궁도들이 재빨리 움직인다. 안쓰럽게도 이미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지만, 감히 나찰마궁주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만이 부처님의 자비라 생각할 뿐.
“대존자.”
“예.”
나찰마궁주의 부름에 대존자가 황급히 그의 앞으로 간다. 갓난아기의 울음도 그치게 만든다는 나찰마궁의 대존자도 궁주가 던진 조각상에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
“내 아들을 죽인 놈이 누구라고?”
“단목세가의 단목장룡에게 당한 듯합니다.”
“극찰이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고작 단목가의 차남에게 당했다? 존자들을 열이나 이끌고 가서? 단목세가가 남궁세가라도 되는가?”
“그건…….”
대존자도 대답하지 못했다.
뢰극찰은 진정한 극마에 오르지 못했다 뿐이지, 사실 육신의 힘은 이미 극마에 도달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실전 경험을 쌓으며 완벽한 조화를 이룰 것을 기대했다. 하나, 뢰극찰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저물고 말았다.
“그리고 단목장룡은 그 피비린내 나는 놈에게 갔다고 하지 않았나?”
피비린내 나는 놈이란, 뢰마유가 혈세귀막주를 부르는 말이었다.
뢰마유는 포악하고 성격이 더러웠지만 멍청하진 않았다.
대존자는 그의 질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나찰마궁의 정보력을 총동원했지만, 아직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은 아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정말 날개라도 달린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대존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뢰마유가 말한다.
“가만히 있으면 강호가 이 뢰마유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단목세가에 선전포고를 해라.”
정파와 사파의 조약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평화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또, 누구의 명령인데 토를 달겠는가?
“예, 궁주시여.”
굳이 나찰마궁이 선전포고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공포에 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포에 떨어라. 내가 곧 찾아가도록 하마.’
* * *
단목세가는 난리가 났다.
사파에서 가장 강력한 문파로 손꼽히는 나찰마궁이 단목세가에 선전포고 했다. 굳이 나찰마궁주라는 극마의 고수가 나서지 않더라도 단목세가에는 그들을 막아 낼 힘이 없었다. 하후세가의 선전포고만 해도 가문이 난리가 났었는데, 나찰마궁이라니? 단목세가의 장로들은 혼비백산하여 가주를 찾아왔다.
“가주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찰마궁이라니!”
“하후세가와 관련된 것이오?”
“무당과 제갈세가에 서신을 보냈소? 만약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태상가주께선 어떻게 하라고 하셨소……!”
장로들의 극성에 가주 단목무광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만!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가주의 호통에 장로들이 멈칫한다.
가주전에 떼로 몰려와서 오두방정을 떠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가주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찰마궁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주 자신도 심장이 철렁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그들에게 당하기만 할 뿐이다.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소? 나찰마궁이 마음만 먹으면 가문의 지부는 물론이고 이 장원의 식솔들까지 몰살될 것이오. 다른 문파가 도와준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서신을 받고 나서는 것과 나찰마궁에 의해 우리 식솔들이 죽는 것 중 무엇이 빠르겠소? 지금 이 순간에도 극마에 오른 나찰마궁주가 의창현으로 달려오고 있을 수도 있소. 가주께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생각이시오?”
장로 중 서열 일 위인 단목자우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장로들은 무조건 가주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들의 사명은 가문을 지키는 것이다. 때로는 가주를 견제하기도 하고, 가주의 말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한다.
지금은 견제까진 아니더라도 비판의 자세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선전포고의 소식을 들은 순간, 호북성의 명문거파에 전서구를 띄웠소.”
“오오, 역시 가주께서 탁월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무당과 제갈세가라면 믿을 만하지!”
“탁월한 선택이오!”
가주의 말에 몇몇 장로들이 손뼉을 친다.
하나, 단목자우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본 장로가 말했듯, 그들의 도움만 믿고 있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소. 최악 중 최악을 대비해야 하오.”
가주로서도 머리가 아팠다.
초고수의 존재라는 것은, 일반적인 세력 다툼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존재다. 갑자기 장원에 나타나서 식솔들을 학살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가주가 나서도 나찰마궁의 고수는 막지 못한다.
그래서 가주는 생각해 두었던 것을 입 밖으로 낸다.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것은 이 방법뿐이다.
“본 가주는 장로들께서 섬서 지부로 잠시 대피할 것은 권유하는 바이오.”
그의 말에 몇몇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목자우는 가주의 말에 반발했다.
“본 장로들이 도망쳐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가주의 단호한 대답에 단목자우가 크게 외친다.
“가주의 의견에 동의하는 장로들은 손을 들어 보시오-!”
장로의 반절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단목자우가 불같이 화를 낸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는지 가주전이 웅웅, 울리는 듯했다.
“갈! 부끄러운 줄 아시오! 가더라도 가문의 중심인 가주가 살아남아야지, 어찌 장로들이 가주의 생명을 희생하여 목숨을 부지하려 하시오!”
단목자우는 사실 가주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다만, 남아야 하는 이들이 장로들이고 대피해야 하는 것이 가주라는 게 달랐지만 말이다. 장로씩이나 되어서 가주가 대피하라는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일가의 장로라는 것들이!
단목자우의 말을 들은 단목무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그도 죽고 싶지 않았다. 하나, 무인이라면 그리고 가주라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아니 된다.
“일 장로, 가주가 어찌 가문을 떠나겠소?”
“가주가 죽으면 모두 끝이오! 가주는 가문의 중심이오! 장로들이 모두 죽는다고 할지라도 가주만 살아 있다면 되오.”
몇몇 장로들은 단목자우의 말에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자신은 대피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천하의 소인배가 되는 것이다.
단목자우와 가주가 열띤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미 단목자우와 가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서로 그런 마음이니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장로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허! 가주! 우리는 살 만큼 살았소! 그러니 가주께서 피신하시오!”
“누가 보면 난 청년인 줄 알겠소?”
“본 장로보다 어리지 않소?”
“고작 다섯 살 차이로 누가 어린 게 어딨소? 솔직히 밖에서 만났으면 그 정도 나이 차이는…….”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않다 보니 상당히 유치한 발언이 오가게 되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다. 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가 가주와 단목자우의 설전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눈치 없는 누군가가 말한다.
목소리는 두 사람보다 훨씬 낮았지만, 왜인지 귀에 쏙쏙 틀어박혔다.
“굳이 떠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두 분 모두 이곳에 계시지요.”
“뭐라?”
“장난도 정도껏 하시오!”
가주와 단목자우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장로들이 자신이 말할 게 아니라며 허겁지겁 손을 젓는다.
그러고 보니 방향을 예측할 수 없었다.
바로 귓가에 속삭인 듯한 목소리. 한 사람만 그렇게 느꼈다면 모를까, 여기 있는 전부가 그렇게 느꼈다. 넓은 가주전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장로들. 그중 한 명이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명이 네 명이 된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가주전의 입구로 향한다. 그곳엔, 이제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가문의 수치라는 평을 들었지만 이젠 가문의 자랑이 되어 버린 사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장룡이?”
몇몇 장로들은 무림맹, 그것도 그 유명한 흑룡단이 단목세가를 위해 지원을 나온 것이라며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장로 단목천승이 조금 전 단목장룡의 말에 의문을 표했기 때문이다.
“근데 굳이 떠날 필요가 있느냐고?”
“…….”
모두의 표정이 굳는다.
장로 중 서열이 일 위인 단목자우와 가주의 열띤 설전. 그것에 장로들이 나서지 못한 것은, 두 사람의 책임과 의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 대안 없이 저런 소리를 내뱉은 것이라면, 아무리 최근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는 단목장룡이라도 어른들의 잔소리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무림맹의 무인들과 함께 온 것이더냐?”
“흑룡단과 함께?”
단목장룡이 고개를 젓는다.
“저 혼자입니다.”
“뭣……?”
장로들이 급격히 실망한다. 단목장룡의 무위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그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 이번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나찰마궁이었다. 사파에서도 가장 악독하며 지독하고 포악한 그 나찰마궁! 장로들은 가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주전에 모인 것이다.
“…….”
하나, 가주인 단목무광은 깊은 눈으로 단목장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문의 돈을 훔쳐 기루에 바치던, 철딱서니 없던 시절의 아들이 아니다. 강호에서 자신만의 뜻을 펼치는 어엿한 한 명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놀랄 것이 있다고 하셨지.’
태상가주는 가주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지하 뇌옥에서 느꼈던 그 감동을, 고작 짧은 글로 전해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장룡, 네겐 무슨 대책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가주의 말에 웅성대던 장로들도 입을 다물었다.
“예.”
가주와의 설전으로 잔뜩 흥분한 장로 서열 일 위의 단목자우가 인상을 찌푸린다.
“대체 그 대책이라는 게 무엇이더냐? 설마 그 유명한 육왕분들이라도 모셔 온 것이더냐? 아니, 네가 혼자 왔다고 했으니 그것도 아니겠지. 실없는 소리는 아니길 바라마!”
단목자우도 단목세가의 장로로서 단목장룡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것과는 별개로 진지하고, 엄중해야 했다. 나찰마궁의 습격에 가주와 장로들의 죽음마저 입에 올리는 상황. 그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그 유명한 육왕은 모셔 오지 않았습니다만…….”
짜증이 난 단목자우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가주가 손을 들어 그것을 가로막았다. 설전을 벌였던 두 사람이지만, 일 장로는 가주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주와 설전을 벌일 때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종질(從姪)을 지켜볼 뿐이다.
단목장룡은 모두의 뜨거운 안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왔으니 괜찮습니다.”
“뭐라?”
저놈이 지금 어른을 놀리나?
가문의 존망이 달린 심각한 상황에서 무슨!
“이노옴! 지금……!”
단목자우가 호통을 치려 할 때.
“……!”
솨아아……!
무공을 갈고닦은 무인들의 감각은 범인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들은 모두 무공을 익히며 고통을 맛보았고, 어떤 이들은 죽을 뻔한 경험도 있었다. 무공의 수련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생을 무공을 갈고닦으며, 단목세가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무인들.
그들 모두가…….
숨마저 토해 내지 못하고, 모두 움직임이 굳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모, 몸을 움직일 수가……!’
단지 눈을 마주하는 것일 뿐인데도,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 사실 상급자와 비무를 하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처럼 소름이 끼치진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단목장룡을 호통쳐야겠다고 생각한 단목자우마저, 그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온몸을 옥죄던 기운이.
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꿈에서 막 깬 것처럼.
“허어어억……!”
“크허업!”
모두가 거친 숨을 토해 낸다.
그것은 가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숨이 막혔던 거지?
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걸까?
무엇 때문에?
그 해답을 알려 줄 사람은 단목장룡뿐이었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장로님들과 가주님에게 확실히 알려 드리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먼저 말을 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실체를 보여 준 후에 말을 하는 것이 더 빠르리라 생각했다.
장로들의 표정을 보니, 이젠 말해도 될 듯했다.
단목장룡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전 화경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
평소였다면, 말도 안 된다며.
너같이 어린 나이에 화경에 오른 사람은 없다며 신뢰하지 못했을 장로들은.
조금 전, 단목장룡이 보여 준 그 압도적인 기세에 전혀 반발하지 못했다.
설령 속으로 의심하고 있더라도.
입 밖으로 그것을 내는 순간…….
그 섬뜩한 기운이 몸을 옭아맬 테니까.
그것이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