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삶이란
지하 뇌옥.
과거 단목장룡은 방구를 구출하려고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뢰극찰을 질질 끌고, 지하로 들어갔다. 건물 자체에 배어 있는 진한 혈향에 기분이 더러워진다.
거침없이 지하로 들어간 단목장룡.
뢰극찰의 말대로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가 그 장소에 있었다.
“태상가주님.”
단목장룡이 보기 드물게 흥분하며 철창으로 달려갔다. 내팽개쳐진 뢰극찰이 도주하려 했지만, 갈유화에게 가로막혔다. 어차피 이미 점혈을 당한 상태라 내공을 끌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갈유화가 그의 등을 밟아 버린다.
“조용히 있어, 뢰극찰.”
“네년… 네년은 내가 꼭…….”
쿠웅!
그에 갈유화가 머리를 밟아 버리고, 어찌나 강하게 밟았는지 충격음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 정도로 뢰극찰이 죽지는 않겠지만, 당분간 헛소리하지 못할 것이다.
갈유화에게 잡혀 이곳까지 함께 온 하후예민은 가만히 뇌옥을 들여다본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그가 철창에서 숨을 쉬고 살아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뢰극찰은 왜 태상가주를 죽였다고 해 놓고, 뇌옥에 가둬 두었을까?
두 사람이 같이 갔다면, 극마에 오른 뢰극찰이라면… 아버지를 지켜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은 어제부터 그 부분이 의심됐다.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할 때, 뢰극찰은 대답 대신 그녀의 몸을 유린할 뿐이었다. 몽환이라는 미약의 힘에 하후예민은 결국 진실을 듣지 못하고 기절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후예민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새어 나오고, 비릿한 맛이 혀를 감싼다.
그녀는 단목장룡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걱.
두터운 철창이 잘렸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 단목장룡의 일 검에 철창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그 틈을 통해 단목장룡이 뇌옥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선 산발한 머리로, 피 범벅이 되어 가부좌를 틀고 있는 태상가주의 모습이 보였다.
“태상가주님.”
단목장룡이 황급히 태상가주의 맥을 짚는다.
다행히도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언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거기다 기맥이 완전히 뒤틀려 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단목장룡이 슬쩍 뒤를 바라본다.
그와 눈을 마주친 갈유화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예민은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해우심법으로 만들어진 정순함의 결정체.
단목장룡의 내력이 태상가주의 몸으로 흘러 들어간다.
뒤틀려 버린 기맥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은 막대한 내력과 정신력이 소모된다. 아무리 화경에 이른 단목장룡이라도 그것은 쉽지 않았다.
‘이번 일은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기필코 살려 내야 한다.
조금만 실수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극한의 집중력. 지금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단목장룡을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갈유화라는 신뢰할 수 있는 여인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단목장룡은 태상가주를 살리는 것에 모든 정신력을 쏟아 냈다.
즈으으으…….
해우심법의 기운이 정순해서였을까? 아니면 화경에 이른 고수의 제어력 덕분이었을까? 전혀 풀어지지 않을 것 같이 꼬여 있던 기맥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으로 완전히 내상을 치료할 순 없겠지만, 당장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태상가주가 누워 있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도 운이 좋았다.
길을 잃어버린 태상가주의 내공. 세맥을 넘어 혈맥까지 침범하고 있던 기운들이 점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태상가주의 정신이 깨어났다.
그는 흐릿한 정신에도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 태상가주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정신이 일부 깨어나자 회복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태상가주가 의식적으로 몸을 회복시켜 주는 단목장룡의 내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난 뒤.
단목장룡이 손을 뗐다.
감겼던 태상가주의 눈이 뜨인다.
“룡이……?”
말라 버린 목소리였지만,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단목장룡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그라도 태상가주의 뒤틀린 기맥을 풀어내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히나, 이렇게 성공했다. 태상가주는 죽지 않았다. 물론 내상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태상가주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룡아……!”
태상가주는 주책맞게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뢰극찰에게 패배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가? 손자의 이름을 운운하는 뢰극찰. 그의 무력은 자신도 당해 내지 못했다. 거기다 그의 출신은 나찰마궁이었다. 자신의 죽음보다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홀로 회복할 수 없이 큰 내상을 입었음에도, 이런 뇌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두 사람의 감격적인 재회를 보며 갈유화는 미소 짓고 있었다.
당연히 하후예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얼른 탈출해야 한다!”
단목장룡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태상가주가 버럭 외쳤다. 어찌나 급했는지 다 죽어 가던 목소리에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단목장룡은 너무도 태평했다.
“룡아, 나찰마궁의 소궁주는 극마에 올랐다. 그놈은……!”
단목장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후, 바깥을 바라본다.
태상가주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익숙한 민머리가 보인다.
패배하는 그 순간에도 본, 그의 소름끼치는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자줏빛 연기를 내뿜으며, 태상가주를 농락했던 괴물. 나찰마궁의 소궁주. 그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한 사람에게 밟혀 있었다.
“소궁주 뢰극찰은 제가 처리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
태상가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극마에 오른 소궁주. 그가 패배했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믿는 수밖에 없었다.
떡하니 쓰러진 민머리 사내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거기다가 사랑스러운 손자의 말이 아닌가?
“허… 허허허…….”
스산한 기운의 뇌옥 속에, 한 노인의 허탈한 웃음이 울려 퍼진다.
* * *
“정말 장하구나. 정말 장해. 어찌 단목세가에서 이런 보물이 나왔을꼬? 이 할아부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시간이 지나자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태상가주.
아직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손자가 화경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도 흥분하지 않는다면 무인이 아니리라.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래 사셔야지요.”
“암! 당연히 오래 살아야지! 친우들을 평생 놀려 먹으려면 백 살이 무어냐? 이백 살까지도 살아야 한다! 단목세가에서 화경의 고수가 나오다니! 어찌 이럴 수가!”
단목장룡이 휘휘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만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태상가주는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손자의 발전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축하한다. 마교에서는 전혀 가족애를 느껴 보지 못했지만, 단목세가에 와서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 이리 오너라.”
갑자기 두 팔을 활짝 벌리는 태상가주.
단목장룡이 고개를 갸웃한다.
“예?”
“냉큼 오너라. 이 할아부지가 손자를 안아 주고 싶구나.”
“…….”
단목장룡이 움직일 생각이 없자 태상가주가 회심의 한 수를 던진다.
“이 할아부지의 마지막 소원이로구나. 다시는 네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으마.”
단목세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단목장룡은 안기고 싶지 않았다. 뭐, 가족끼리의 애정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럴 나이는 지나지 않았는가? 하나 위태롭게 떨리는 태상가주의 두 팔이 너무도 안쓰러워 보인다.
‘어머나.’
그것을 멀리서 갈유화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얼마나 멋진 가족애인가? 거기다 단목장룡이 스스로 조부에게 안기는 모습이 너무도 기대되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낭군님의 모습! 그것을 평생 머릿속에 기억해 두리라! 그리고 언젠간 자신도 저것을 써먹지 않겠는가?
‘이건 당옥정 고 계집도 본 적이 없겠지. 호호호!’
갈유화가 잔뜩 기대하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저희 아버지는…….”
그것을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단목장룡에겐 다행일지도 몰랐다.
갈유화가 서늘한 눈빛으로 하후예민을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죠?”
나이답지 않게 촐싹대던 할아부지.
그가 다시 한 가문의 태상가주로 돌아온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네는 하후가의 여식인가?”
“네, 하후예민입니다.”
작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태상가주가 한숨을 내쉰다.
“후우…….”
모두의 시선이 태상가주에게 집중된다.
하후세가의 가주는 어떻게 되었는가? 왜 태상가주는 살아서 뇌옥에 갇혀 있고, 하후광은 사라졌는가? 왜 뢰극찰은 하후예민에게 하후광이 죽었다고 했는가?
태상가주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온다.
* * *
“…….”
초점을 잃은 하후예민의 동공. 그녀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꾸으윽…….”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갈유화가 기절한 뢰극찰의 머리통을 꾹 누른다.
“역겨운 새끼.”
상황은 이러했다.
태상가주는 결국 뢰극찰에게 패배했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 당연히 뢰극찰은 그 자리에서 태상가주를 죽이려 했지만, 그것을 방해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하후세가의 가주 하후광이다.
과거 단목장룡에게 당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아버지이자 하후세가의 전대 가주인 하후종우가 단목운뢰와 연이 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기서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가 죽는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하후광은 뢰극찰을 막아 세웠다.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일단 여기서 멈추자는 하후광의 말에 뢰극찰은 당연히 분노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하후광에게 제안한다.
단목운뢰를 살리고 싶다면, 대신 죽음을 택하라고. 그렇다면 더 이상 단목운뢰를 건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후광은 당시 어떤 선택을 했는가?
아니,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리라.
이제껏 쌓아 왔던 업보에 회의감을 느꼈을까? 몰락해 가는 하후세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변해 버린 딸아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어찌 보면 ‘대의명분’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이 앞선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본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무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작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뢰극찰은 망설이지 않고, 하후광을 죽였다.
정말로 다행인 점은, 평소의 뢰극찰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단목운뢰를 죽였을 테지만 어차피 가만히 놔두면 더 고통스럽게 죽으리라는 걸 깨닫고 태상가주를 정말 더 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흐으으윽……!”
하후예민이 처절하게 오열한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른다. 그에게 닥치라며 못난 소리를 내뱉었다. 당시엔 아버지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제 아버지라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
어젯밤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누던 사내에게 죽임을 당해서.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패륜을 저질렀다. 하늘도 용서하지 않을, 업보로 돌아오게 될 패륜을.
“흐어어으… 아버지… 흐으아아!”
절규하는 하후예민.
태상가주가 딱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그는 살아나지 못했으리라. 뭐, 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사랑스러운 손자 단목장룡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긴 했지만… 하후광의 선택이 태상가주에게 도움이 됐다는 건 사실이다.
누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일각 동안 오열하던 하후예민은 갑자기 뚝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이제껏 찾아볼 수 없던, 증오심 가득한 얼굴로… 뢰극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기세가 떠오른다. 살기(殺氣). 훈련된 감정의 제어가 아닌, 본능에서 터져 나오는 그 진득한 감정. 그것에 반응하여 뢰극찰의 몸이 움찔한다.
“그를 직접 죽이고 싶나?”
“…….”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후예민.
염치 따위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당장 죽여야 할 존재는 단목장룡이 아닌 뢰극찰이다.
“심장을 찌를 기회를 주지.”
쉬이익!
단목장룡이 검을 던졌다. 그녀의 무릎 옆에 뇌왕검이 꽂힌다. 참으로 놀라운 힘 조절이다. 뭐, 이 자리에서 그것을 보고 놀란 것은 태상가주뿐이었지만.
하후예민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검을 바라본다.
“감사… 합니다… 정말…….”
툭, 뽑힌 뇌왕검.
하후예민 또한 무인이었다. 검을 다루는 법을 모르지 않는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쓰러진 뢰극찰에게 다가간다. 살기를 느낀 뢰극찰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깨어났다.
“미친년이! 감히 서방님을 죽이려 들어! 죽고 싶으냐! 오냐, 네년도 오늘 죽여 주마! 네년의 아버지처럼!”
발악하는 뢰극찰이었지만, 하후예민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뢰극찰의 심장에 뇌왕검을 쑤셔 넣는다. 내공으로 보호되지 않은 인간의 피부는 이렇게 연약했던가? 아니면 뇌왕검이 중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명검이라 그런 것일까?
너무도 쉽게 뇌왕검이 그의 심장을 뚫었다.
뢰극찰이 푸르죽죽한 피를 토해 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적시고 있음에도, 하후예민은 피해 내지 않았다. 그녀는 뇌왕검을 뽑고, 다시금 그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쿠르으윽-!”
푸욱! 푸욱! 푸욱! 푹! 푹! 푹!
심장뿐 아니라 모든 장기를 박살 내겠다는 듯.
하후예민의 손이 움직인다. 광기가 느껴진다.
갈유화는 그런 모습을 보며, 단목장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 낭군님이 불편하시다면, 하후예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할까요?
- 아니.
갈유화는 당연히 그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단목장룡은 갈유화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 그녀에겐 죽음보다 삶이 고통일 듯하군.
저 광기가 사그러질 때.
더 이상 찔러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진정한 고통은 그때 찾아오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