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그 눈빛
“꿈…….”
꿈이었으면 한다. 하지만 열린 문틈 사이로 느껴지는 바람은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리 차가운 바람은 아니었지만, 몸이 오들오들 떨려 온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
충격적인 소식.
그녀의 아버지는 어젯밤 죽음을 맞이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 단목세가의 단목운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욕설까지 했다. 그게 마지막 대화일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해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흐윽…….”
다시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는다. 부군이 될 사내는 눈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젯밤 그에게 당한 것이 떠오른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복수.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후예민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단 바깥에서 들린 굉음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혹여나 뢰극찰이 몽환에 취해 과격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말릴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바깥으로 나간다.
“어디로…….”
하후예민이 장원을 둘러본다.
굉음의 진원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자줏빛 연기가 달빛에 반사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무공 수련……?’
그녀는 당연하게 그리 생각했다.
누군가 장원에 쳐들어와 뢰극찰과 싸우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뢰극찰은 하후예민의 입장에선 괴물이었으니까. 그 괴물이 자신의 편이라 다행이라 느낄 만큼. 극마에 오른 괴물을 당해 낼 자는 없었다. 그 유명한 무당파의 장문인과 같은 급이 아닌가?
하후예민은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자줏빛 연기가 흩날리는 곳으로 걸어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연옥의 내부가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다.
‘두 명……?’
그녀가 연옥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뇌쇄적인 목소리.
여인인 자신이 듣기에도, 그 음색이 고막에 찰싹 달라붙어 몸을 흐물흐물 녹이는 듯했다. 그녀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구……?”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여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목소리도 그렇고, 몸에 딱 달라붙는 무복을 입었기에 굴곡이 훤히 보였다. 하후예민도 남창제일미라 불리며 뭇 사내들의 마음을 빼앗았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질투가 일어나는 몸매.
“그냥 지켜보렴.”
하후예민이 연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속을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아주 조금씩.
두 명의 신형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 * *
“힉!”
뢰극찰은 혼을 찢어 버릴 듯한 귀기가 서린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누군가의 눈빛에 질색한 적이 있던가?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나?
‘분노한 아버지와 마주했을 때…….’
뢰극찰은 사실 무공의 재능이 다른 형제들보다 부족했다.
떨어지는 재능인데 어찌 소궁주가 되었나? 그것은 나찰마궁이 비밀스럽게 연구하던 무공의 존재 때문이었다. 마정대흡인술. 다른 인간의 생명을 취하여 내력을 흡수하는 술법. 뢰극찰은 그것에 재능이 있었다.
자신의 재능에 절망한 뢰극찰이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마정대흡인술을 익혔을 때.
그는 아버지가 ‘진짜’ 분노한 얼굴을 보았다. 한 마디만 해도 산 채로 잡아먹힐 듯한 공포에 오줌을 지려 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찰마궁주 뢰마유는 마정대흡인술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뢰극찰은 죽음에서 벗어났었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선명하다. 왜 뢰극찰의 뇌리에서 그때가 떠오르는가? 단목장룡은 당연히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는 고작해야 초절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의 눈에 겁을 먹는단 말인가?
뢰극찰이 눈동자에 힘을 주고, 앞을 쏘아보려 한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누구에게도 눈을 내리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술을……!”
그의 눈빛은 단순히 사술에 불과하리라.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버텨 낼 수 있다. 자미소의 기운이 가득한 주먹으로, 놈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면 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리라.
그래! 그거면 된다!
뢰극찰이 굳은 마음을 먹고, 주먹을 휘둘렀다.
단전에 쌓인 팔 갑자의 내력이 해일처럼 쏘아진다.
‘내 내공은 천하제일이다!’
호기롭게 내지른 주먹이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단목장룡의 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쿠웅!
“크흑!”
분명히 공격한 것은 뢰극찰이다.
그리고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린 것 또한 그였다.
“이노오오옴-!”
참을 수 없는 분노. 자신의 내공은 천하제일이다. 누구도 막아 낼 수 없다. 극마의 경지에 오른 자신의 주먹은 강철마저도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검날과 주먹이었지만, 뢰극찰은 주먹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내력을 주먹에 담는다.
구오오오-!
자줏빛 기운이 이제는 붉게 변하여 주먹으로 모인다.
수라폭권(修羅暴拳).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릴 듯한 거대한 기운이 뢰극찰의 주먹에 맺힌다. 나찰마궁이 자랑하는 무공 자미소의 오의가 그의 주먹에 현현하고 있었다. 응축되고 또 응축된 권강.
“뒈져라! 단목장룡-!”
거칠게 포효한 뢰극찰.
응축된 기운이 마침내 폭발한다.
쿠으으응-!
어찌나 기운이 거센지 주변을 둘러싼 자줏빛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어차피 단목장룡에겐 그것이 통하지 않았으니 별 상관 없었다. 저 주제도 모르는 놈은 이 주먹으로 피떡이 될 것이다.
뢰극찰은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놈! 어떠냐!”
뢰극찰이 호기롭게 외친다. 주먹에 닿는 감각이 없다. 그의 검에 베여 시큰하긴 하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이 정도 상처는 금방 치유할 수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자신과 내력 대결을 하려 하다니! 정말로 멍청하지 않은가!
처음처럼 촐싹대며 피했다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진 않았으리라.
“……?”
무언가 이상하다.
흙먼지가 걷혔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사내는 그대로 있다. 전혀 밀려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손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왜?
뢰극찰이 다시금 오른 주먹에 내력을 쏟아 내려 할 때.
눈앞의 검이 흔들렸다.
사악……!
몹시 평온한 소리. 마치 종이가 깔끔하게 잘리는 듯한 소리가 뢰극찰의 귀에 스쳐 갔다. 동시에 찾아오는 허전함. 시원하기도 하며, 허전하기도 한 느낌에…….
뢰극찰이 고개를 돌렸다.
“……?”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다.
뢰극찰의 머리는 본능적으로 그 괴리를 해결하려 했다.
꿈틀!
푸슈우우…….
“끄아악!”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 깔끔하게 잘려 나간 어깨. 그의 팔이 잘린 것이다. 대체 언제? 뢰극찰은 검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육안으로 식별하고서야 팔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내 팔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차마 바닥을 내려다보지 못했다.
사실 지금 그의 팔은 세맥이 터져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수라폭권을 펼치던 거대한 기운을 제어할 주체가 없으니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세맥과 혈맥이 터져 나갔다.
“사술… 사술이다! 네노오오옴!”
뢰극찰은 왼쪽 주먹을 그에게 휘두르려 했다.
방어기제. 당장이라도 눈앞의 단목장룡을 찢어발겨야 했다.
“왜 더 뻗지 않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다시금 수라폭권을 쏟아 내려 했던 뢰극찰이지만, 차마 손을 뻗진 못했다. 왜냐고? 나머지 손마저 잘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더 이상 나찰마궁의 소궁주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체 어찌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은 팔마저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사술을……? 난 극마에 올랐단 말이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단목장룡에게 소리치는 것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일말의 기대심을 품었다.
단목장룡이 사술의 진실을 밝히기를. 멍청한 놈이 사술의 비밀을 말하기만 하면 바로 파훼하고 놈을 피떡으로 만들리라. 그의 머리는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의 귀기 어린 눈빛을 보고 난 후부터,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넌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야.”
“뭐라고-!”
노호성을 터트리는 뢰극찰.
그는 분명히 환골탈태를 했다. 환골탈태를 하는 게 극마에 올랐다는 증거가 아닌가? 대체 이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난 극마다! 네놈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극마라고!”
단목장룡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뢰극찰을 바라볼 뿐이다.
비웃지도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었기에.
“네까짓 놈은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극마의 경지에 올랐다! 지고한 경지! 모든 무인이 바라 마지않는 위대한 경지란 말이다! 네놈 따위가……! 네까짓 놈이 뭘 안다고!”
단목장룡이 검을 내린다.
극도의 공포를 느낀 뢰극찰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의 검이 향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게 그 증거다.”
“…….”
뢰극찰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검 끝이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팔이었다. 세맥에 남아 있던 내력이 폭주하여 징그럽게 찢어진 자신의 팔. 아래턱이 벌벌 떨려 온다. 차마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목격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넌 극마의 벽에 닿지도 못했다.”
“거짓말이다……. 날 속이기 위한 사술… 그래……! 네놈은 거짓을 고하는 것이다……!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인정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단목장룡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현실이라면 이럴 리가 없지. 그래, 이건 꿈이었어!”
뢰극찰은 지금을 꿈이라 단정 지었다.
차마 단목장룡을 바라보지는 못한 채로. 그의 눈빛을 보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크아아악!”
순간 괴성을 내지르며, 뢰극찰이 몸을 돌려 뒤로 도망친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다.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었다.
달려가던 뢰극찰의 눈앞에 두 사람이 보인다.
복면을 쓴 갈유화와 멍하게 선 하후예민. 그녀의 시선을 보자 분노가 치솟는다. 어제 저년에게 ‘정기’를 나눠 준 탓이다. 그랬다면 이딴 악몽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여우 같은 년! 감히 내 정기를 훔쳐!”
남은 왼쪽 팔에서 자줏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권격 한 방이면 하후예민의 머리통이 부서지리라. 하후예민의 동공이 커진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녀는 자력으로 그것을 피해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뢰극찰의 주먹이 닿으려는 순간.
사악……!
조금 전에도 들었던 소리. 뢰극찰의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또다시 시원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 뿐.
쿠당탕탕!
왼쪽 팔이 잘려 나간 뢰극찰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크어억……!”
당장 자리를 박차고 가고 싶었다.
하나 일어날 수 없다. 정면에서 고통이 전해진다. 바닥에 얼굴이 갈린 고통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팔이 잘린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 그 아픔을 느끼고 있으니, 팔이 없다는 게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묵직한 무언가가 그의 머리통을 짓누른다.
단목장룡의 발이었다.
“꾸르으윽……!”
후끈!
이것이 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마치 양 어깻죽지가 타오르는 듯하다. 애써 무시해 왔던 고통이 척수를 타고 뇌리에 전해진다.
“구으으으으……!”
“전혀 균형이 맞춰지지 않은 육신. 과도한 내력으로 육신이 비정상적으로 변했군. 이게 환골탈태라고? 나찰마궁주도 그렇게 이야기하던가?”
“으으으으……!”
바닥에 얼굴이 처박혔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렇기에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 자신은 이놈에게 당하고 있기에 부정당하는 것이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뢰극찰이 안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목장룡의 그 미친 눈동자와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다. 오히려 땅속에 박혀 있는 것이 좋았다.
그는 발악하는 척.
일어서고 싶은 척.
몸을 뒤흔들어 댔다.
허나, 단목장룡은 그런 뢰극찰의 꼼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단목장룡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동시에 죽음보다 더 피하고 싶었던, 그의 눈빛과 마주한다. 대체 저게 뭐라고 저리 무섭단 말인가? 뢰극찰은 부정하려 했지만, 차마 그 공포마저 지워 내진 못했다. 그는 추하게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만… 그마아안!”
단목장룡이 그런 뢰극찰의 눈꺼풀을 벗긴다.
뢰극찰과 단목장룡의 눈빛이 마주한다.
“곱게 죽고 싶다면, 사실대로 말해라.”
“누, 눈을 감게 해 다오! 제발, 눈을 감게!”
침을 튀겨 가며 외치는 뢰극찰.
그런 그에게 단목장룡이 물었다.
“단목세가의 태상가주는 어떻게 됐지?”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뢰극찰이 외친다.
“지하 뇌옥에 있다! 지하 뇌옥! 아직 죽이지 않았다! 제발, 그러니 눈을 감게 해 다오!”
천마(天魔)의 눈동자.
완성에 다다른 천마지체의 눈동자는, 뢰극찰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의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뭐든지 상관없었다.
“지하 뇌옥……?”
중얼거린 것은 단목장룡이 아니다.
그 뒤에서 멍하게 선 하후예민이다.
“단목세가의 태상가주는 아버지와 싸우다가 당신에게 죽었다고…….”
분명히 뢰극찰은 아버지인 하후광을 죽인 태상가주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하 뇌옥에 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무슨 소리……!”
뢰극찰에게 달려가려던 하후예민이었지만, 그것을 가로막는 한 여인이 있었다.
“건방진 년이…….”
차가운 눈빛.
본래 갈유화는 전혀 착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사파의 기둥 중 하나인 암천회의 소회주였다.
“우리 낭군님께서 일을 보고 계시잖니? 혓바닥을 뽑히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있어.”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하후예민을 쏘아보던 갈유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녀가 몸을 떨었다.
파르르……!
‘나, 지금 무슨 험악한 말을……?’
단목장룡의 앞에서 천박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착해지는 건, 단목장룡의 앞에서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