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돌이킬 수 없는
“이런 미친! 흡!”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던 갈유화. 그녀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그녀는 평소 욕설을 툭툭 내뱉곤 한다. 그녀의 신분 때문인지 외모가 출중하기 때문인지, 상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뭇 사내들의 숨겨진 성향을 자아내는 그러한 욕설. 암천회의 무인들은 갈유화에게 욕을 먹는 것이 일종의 포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아무튼, 평소에 욕설을 내뱉던 갈유화라도 연모하는 사내 앞에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에겐 좋은 부분만 보이고 싶었다.
특히 순수함의 결정체라 불리는 미녀인 당옥정이 숙적이라면!
‘낭군님 앞에선 욕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거늘……!’
갈유화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동자를 굴려 단목장룡을 흘끔 바라본다.
다행히 그 또한 소식을 같이 들었기에 갈유화의 욕설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곡위는 보고를 이어 나갔다.
“파악하기로는 나찰마궁의 소궁주가 하후세가의 약점을 잡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후세가는 청하 표국을 이용하여 비화 표국에 시비를 건 다음, 단목세가가 항의하자 선전포고로 대응했습니다. 아마 단목세가와의 싸움이 목적일 듯합니다. 그리고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가 무한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남창으로 향했습니다.”
태상가주라는 말에 단목장룡의 얼굴이 굳는다.
갈유화는 사실 저 보고를 듣자마자 곡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겨우 해남도에 같이 있게 되었는데, 곧장 헤어져야 할 상황이 도래했으니까.
하지만 옆에 있는 단목장룡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감히, 우리 낭군님의 얼굴에 근심을 만들어?’
분노는 나찰마궁으로 향했다.
분명히 그들에겐 경고했었다. 하후세가에 더 이상 관여치 말라고. 물론, 나찰마궁이 암천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입장은 아니긴 했다. 세력 대 세력으로 나찰마궁은 암천회 못지않은 대문파였다.
“하루 정도는 더 있으려 했더니 안 되겠군.”
단목장룡은 사마련과 마교에 대해서 암천회와 이야기하려 했다.
본래 무림맹에서 특사로 나선 목적이 그것이었다. 혈세귀막만이 목표였으나 암천회와도 그 관계를 트면 나쁠 게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듣고도 특사의 임무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태상가주 단목운뢰.
그는 망나니로 취급받았던 자신을 보듬어 주었던 ‘가족’이었다. 거기다 그 덕분에 사천으로 가서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도 특사 임무에 집중할 순 없었다.
“갈유화.”
“네엣……!”
근심 어린 단목장룡의 옆모습에 저도 모르게 홀딱 빠져 있던 갈유화.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다.
“사마련과 신교에 대해서는 네게 부탁하도록 하지. 이번에 강소성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잠시만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단목장룡.
평소보다 더 차갑고 매몰찬 그 표정에 갈유화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아… 안기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그녀는 여우였으니까.
“그것은 제가 말한다고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 부분은 공자님께서 아버지와 직접 결판을 지으셔야 해요.”
그건 단목장룡도 인정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그럼 나찰마궁의 일을 해결하고 다시 돌아오지.”
“그, 그런!”
갈유화가 당황한다.
당연히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한 단목장룡이기에 질질 시간을 끌 수는 없다. 태상가주라면 단목장룡의 조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해진다.
“저도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너도 간다고?”
“네, 나찰마궁과는 풀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마교와 싸우게 된다면 본회와 무림맹은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봐요.”
갈유화의 무공 실력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거기다 그녀는 암천회의 소회주. 암천회는 나찰마궁과 맞먹을 초거대 세력이다. 그녀가 함께 간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좋다. 같이 가도록 하지.”
“네!”
갈유화가 기쁨에 탄성을 내지른다.
“곡위, 아버지께 보고드려. 난 일이 있어서 강소성으로 향한다고.”
잠시 머뭇거리던 곡위였지만, 갈유화의 강렬한 시선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 알겠습니다. 말을 준비하도록 할까요?”
“아니. 괜찮아. 얼른 아버지께 보고드려.”
“예.”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혹시 모르니 복면을 착용하고 가도록 할게요.”
“그래.”
갈유화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 * *
“이건…….”
갈유화가 장포를 훌러덩 벗는다. 그것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녀의 살 내음과 단목장룡의 향이 섞여 있는 듯하다.
“낭군님껜 다른 장포를 선물해 드려야겠어.”
그리고 이 장포는 자신이 갖는다.
이번 여정은 아마 그리 길진 않으리라. 그리고 이 여정이 끝나면 또 단목장룡과 헤어져야 한다. 향취에 젖을 물건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옷장을 뒤져 단목장룡과 어울릴 법한, 흑색 장포를 꺼내 들었다.
중원 전역에서 돈을 쓸어 담는다고 알려진 암천회. 그들은 사소한 집기나 의류 따위도 장인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단목장룡 또한 질이 나쁜 의복을 입진 않았지만, 지금 갈유화가 꺼낸 것과는 천지 차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흑색 장포를 입은 단목장룡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흐읏……!”
저도 모르게 뜨거워진 양 볼을 감싸는 갈유화.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흑의 무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쓰고 단목장룡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단목장룡은 그녀가 선물한 장포를 거부하지 않고 입어 주었다.
* * *
“예민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후광.
하후세가의 가주는 선전포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실리를 따라 움직였던 그.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였지만, 장천이라는 사내의 등장으로 그랬던 삶의 가치가 뒤흔들렸다. 단목세가에 선전포고의 서신을 보낸 이후,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하후예민이 차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투로 말한다.
과거보다 훨씬 성숙해진 듯한 하후예민. 외모의 물이 올랐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선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그렇다고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찰마궁의 은밀한 속삭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후광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딸을 설득해야 한다. 그의 잘못도 있었으니까.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되돌려야 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정말 하후세가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찰마궁은 믿을 수 없어. 그들은 우리를 이용할 뿐이란다. 그걸 인지해야 한단다. 결국, 우리는 버림받을 거야. 사파는…….”
“닥치세요.”
“……!”
하후예민의 두 눈썹이 떨린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먹었던가? 옳다고 생각했던 일. 하후세가의 더러운 일을 목격하고도 그녀는 참았다. 하후세가를 이끄는 아버지의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후세가의 명예는 땅바닥에 처박혔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느낀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는가?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와서 발을 빼겠다고 하는, 무책임한 아버지가 밉고 또 미웠다.
“너… 너… 지금…….”
하후광은 처음으로 들어 보는 딸아이의 욕설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본가가 정파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나요? 아버지가 했던 모든 짓이 정당화될 수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
“우리는 사도의 마음으로 정도를 걸었어요. 그건 잘못된 길이었어요. 본 가는 나찰마궁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해요. 그것이 하후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옳은 길이에요.”
“예민아…….”
“그만.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정말 막고 싶다면, 지금 제 목을 베세요.”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더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후광이 빽 소리쳤다.
하후예민은 목을 쭉 빼고, 눈을 감았다. 벨 테면 베라는 행동.
“…….”
오랜 침묵이 지나가고.
하후광은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아비가… 미안하구나…….”
그는 하후예민을 안아 주었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죽도록 미운 아버지였지만, 지금 그의 품은 너무도 따스했다.
* * *
“같이 가도록 하지.”
나찰마궁의 뢰극찰. 그가 만면에 웃을 띤 채로 다가왔다. 그가 나가는 목적은 하나였다. 단목세가의 태상가주 단목운뢰, 그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남창에 도착했다. 당연히 그는 하후세가의 뒤에 나찰마궁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홀로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선전포고라 할지라도 두 세력이 멸문까지 가는 일은 드물다.
단목운뢰는 두 가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직접 만나 하후광을 설득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그런 단목운뢰는…….
‘이 사내에게…….’
하후광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예민이는 뭘 하고 있소……?”
“아, 예민이는 잘~ 자고 있지.”
“…….”
하후광이 수치로 몸을 떨었다. 혼사도 치르지 않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다는 것. 물론, 그 또한 과거에 단목장룡에게 딸의 몸을 내어 주려 한 적이 있었다. 과거의 잘못은 이렇게 현재를 발목 잡는다. 후회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하다.
‘참자. 이 사내는 예민이를 사랑한다. 예민이의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사내야.’
사파라서 그런지 손윗사람에 대한 예의는 전혀 없었지만, 그것을 따질 순 없었다.
하후광은 죄인이었으니까.
“가지 않을 건가?”
“아니오. 가겠소.”
하후광이 검을 허리춤에 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런 일에 가주가 뒤로 물러나 있을 수는 없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다녀오마.’
건들거리는 뢰극찰을 뒤따르며, 하후예민이 숙소 방향을 바라본다.
그녀가 잠에서 깰 때쯤이면 모든 것이 끝나 있으리라.
* * *
“헤헤, 하후세가는 요즘 평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요.”
개방의 삼결제자 흑치골은 오랜만에 돈벌이가 생겼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모의 노인. 노인치고는 너무도 건장하여 한눈에 봐도 무림인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남창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으며, 그곳의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흑치골은 강소성 남창에 위치한 하후세가까지 길을 안내해 주며,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안내해 주며 은자 석 냥이라는 거금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신이 잔뜩 난 상태로 아는 것을 모두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던가.”
“예, 단목 대협! 그들이 선전포고한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요.”
“혹, 그들과 연합을 맺은 다른 문파가 있던가?”
“과거엔 많았습니다만… 요즘 하후세가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서 이제는 있던 연도 끊어지고 있습니다요. 식객의 수도 일 할 정도로 줄어들었습죠.”
“후우우… 마음이 아프구나.”
단목운뢰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후세가의 전대 가주는 그가 젊을 적 무림행을 하며 만난 적이 있었다. 당차고 쾌활했던 사내. 단목운뢰는 당시엔 단목세가의 소가주였으며, 그 또한 하후세가의 소가주였다. 같이 세가를 일으켜 오대세가에 들어가자며 술잔을 부딪쳤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단목세가와 하후세가는 깊은 연을 맺진 못했지만…….
하후세가의 전대 가주 하후종우가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단목세가에 선전포고한 것에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힘들면 그런 무리수를 뒀을지 안타깝기도 했다.
“아마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께서 방문하시면 바로 선전포고를 취소할 겁니다요! 그들이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말입죠!”
단목운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만 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도 바쁜 삶이다. 서로를 미워해서는 되겠는가? 같은 정파끼리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대화로 풀어 갈 수만 있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으리라.
“이제 이 관도를 타고 쭉 가다 보면 하후세가의 장원이… 커헉!”
단목운뢰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움직여 흑치골을 밀어냈다.
난데없이 바닥을 구르게 된 흑치골은 어안이 벙벙했다.
“콜록! 콜록! 단목 대협……?”
“자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리도록 하게!”
“예?”
“얼른!”
태상가주의 노한 음색에 흑치골은 황당해했다. 이미 약조한 금액은 모두 받은 상태였지만, 갑자기 왜 저러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인지…….”
카아앙!
거대한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개방의 삼결제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다.
그리고 짧은 순간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제기랄! 하후세가가 공격을 해 온 건가!’
개방에서는 하후세가가 선전포고를 한 것을 알았다. 문파끼리의 싸움은 중원에서 꽤 흔한 일로, 처음은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거기다 이 사람은 단목세가의 태상가주 아닌가?
그를 공격한다면, 정말 끝을 보자는 말이 된다.
‘큰일이다! 얼른 방에 가서 보고를……!’
흑치골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도망치려 할 때.
“어……?”
순간 시야의 수평이 흐트러진다.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그곳에서 붉은 무언가가 시야를 감싸고,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암흑이 밀려오고 있다. 죽음의 광경.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 보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흑치골을 잠식한다.
툭.
개방의 삼결제자 흑치골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목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처량히 바닥에서 구른다.
“갈! 무슨 짓이더냐-!”
대로(大怒).
단목운뢰가 이렇듯 화내 본 것은, 근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단목세가의 태상가주.
그의 분노에도 미소를 지은 채로, 평안히 선 민머리의 사내.
“네가 그 단목세가의 태상가주인가?”
“네놈!”
뢰극찰이 미소 짓는다.
“넌 이 거지새끼처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자색 연기가 그의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