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선전포고
암천회주와의 이야기는 단목장룡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그는 자신을 혹사하며 성장해 왔다. 다른 이들을 꺾는다는 일념 하나로 무공을 수련했다고 한다. 그렇게 무공을 익히며 쌓인 감정의 응어리들은 쾌락을 주는 미약이나 폭력 그리고 여인과의 밤 생활로 풀었다고 한다.
“사실 술이 아닌 차를 마시게 된 이후,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지. 어쩌면 극마라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바꿨기에 종국에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것일 수도 있겠지. 사실 이 부분은 애매하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해 보이는 것이 당시엔 몹시도 어려웠지.”
단목장룡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닫기 전엔 태산보다 높아 보인다. 하지만 알고 난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손에 잡히곤 한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만이 진실이며 옳은 것이라 단정 지을 순 없군. 내가 처음부터 술이 아닌 차를 즐겼다면 아마도 무공 수련에 그토록 매달리진 않았겠지. 소회주가 되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려 죽었을 거야. 그렇다면 유화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겠지.”
단목장룡의 시선에 갈유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사실 그녀도 단목장룡과 암천회주의 대화에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극마나 화경이라 불리는 경지는 같은 경지처럼 여겨지면서도 저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암천회주도 단목장룡도 모른다. 단지 추측할 뿐.
그 추측이라는 것은 이론을 쌓아 나가고 실전적 증거를 몸소 느끼며 발전한다.
종국에는 신념이 되어 무인의 삶을 이끄는 이정표가 된다.
물론.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동물이라 생각합니다.”
단목장룡의 말에 암천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나 또한 오늘 너와 대화하며 변화에 대한 욕심을 느꼈지.”
암천회주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한 단목장룡을 보며 질투심과 열망을 다시금 느꼈다. 과거의 암천회주였다면 단목장룡을 죽이려 했을 것이라는 말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꼭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품게 되는군. 당장 과거의 나로 회귀한다고 바뀌는 것이 있을까, 그런 의심이 들어. 어쩌면 극마라는 경지가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정말 현재 도달한 경지가 끝이라 생각하나?”
암천회주의 질문.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전혀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화경(化竟)과 극마(極魔).
무림에서 말하는 그 경지가 끝일까?
“전 더 높은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를 생각이고?”
“예.”
암천회주가 잠시 침묵한다.
그 또한 사실 극마나 화경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극마에서도 급이 나뉘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단지, 두 사람은 더 높은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암천회주가 어느 정도는 현실을 인정하게 된, 무(武)의 이상향에 대해서.
“시간이 더 지난 뒤, 다시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군. 그땐 너와 나도 또 다르게 변화했을 수도 있겠지.”
“예, 저도 그러고 싶군요.”
두 사람은 내공, 검강, 무공의 구결 따위의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의 대화는 경지에 오른 두 무인에게 각기 다른 여운을 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유화, 너도 나가 보아라.”
단목장룡을 뒤따르는 갈유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갈천능이 한숨을 내쉰다.
“하늘이 허락해 준 재능이라…….”
그는 오래도록 단상 위에 앉아 생각할 뿐이었다.
술이 아닌 차(茶)를 마시며.
* * *
“단목 공자님, 궁금한 게 있답니다.”
갈유화가 단목장룡에게 질문한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의문점이 가득 생겨난 상태였다.
“뭐지?”
“극마의 고수라도 무공의 급이 나뉘지 않나요?”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은 것이 구분되겠지.”
“그 말씀은…….”
“급이 나뉜다는 이야기야.”
갈유화가 입을 다문다.
사실 그녀의 머리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검기나 검강을 더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더 높은 경지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범위가 넓어진다면, 검강의 위력이 강해진다면 더 높은 경지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단목장룡은 이제 막 화경에 올랐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끝’을 언급했을까? 갈유화가 그 의문을 한마디로 정리해서 질문한다.
“그렇다면 극마의 다음 경지는 없는 건가요?”
“무공의 경지라는 건 이제껏 무림에서 무공을 갈고닦은 무림인들이 정립해 온 기준이다. 나 또한 그 기준에 맞춰 성장해 왔지만, 이제부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거지. 쉽진 않을 테지만.”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해요.”
갈유화는 단목장룡의 말을 머릿속에 담아 두려 노력했다.
그녀 또한 무공을 갈고닦는 무인이었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때.
“소회주님.”
“왜?”
단목장룡과 단둘이 있고 싶은 갈유화가 눈을 가늘게 뜬다. 갈유화의 수하인 곡위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나찰마궁이 하후세가에 결국 접근한 듯합니다.”
* * *
사업을 확장할 땐, 그 지역의 세력과 부딪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모든 계산이 끝났을 때, 손해보다 이득이 크다면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비화 표국은 단목장룡이 터 준 길을 따라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녹림에게 인정을 받은 표국은 중원에서 처음이었으니까.
강소성은 정파와 사파의 경계로, 제대로 기틀만 잡아 놓으면 황금을 낳는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청하 표국의 반발을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비화 표국에선 어떻게 대응하고 있소?”
“아버지께서 직접 표사들을 이끌고 남창으로 향하셨다고 해요.”
청하 표국이 비화 표국의 표행을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그들의 표물을 압수했다고 한다. 거기다 표사들을 포박하여 옥에 가뒀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거기에 청하 표국은 고압적인 자세로 비화 표국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청하 표국이 화를 내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은 것이다.
비화 표국의 뒤에 단목세가가 있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건 본가에 대한 도전이에요!”
가모 백예령이 분개한다.
탄탄대로만 걸을 것 같았던 비화 표국의 명성에 금이 갔다. 비화 표국은 녹림에게 인정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표행 의뢰가 산더미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청하 표국과의 싸움으로, 표사들이 사로잡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의뢰의 수가 크게 줄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 비화 표국의 실력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지금 하후세가에 항의 서신을 보내 놓았으니 기다려 봅시다.”
“후우우…….”
백예령이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한다.
하후세가의 명성이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이다니? 비화 표국의 명성을 다시 되돌리려면 하후세가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
그들이 정말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단목세가주가 보낸 서신에 꼬리를 내리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가주님, 하후세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가져와라.”
단목세가의 그림자 묵위가 직접 서신을 가져왔다.
백예령은 당장이라도 가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서신을 같이 읽고 싶었지만, 가모의 체통이 있었기에 꾸역꾸역 참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서신을 읽던 가주 단목무광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한다.
“묵위, 태상가주님께 이 서신을 그대로 보내도록 해라.”
“예, 주군.”
묵위가 서신을 들고, 가주전을 나선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백예령이 황급히 묻는다.
“대체 뭐라고 쓰여 있었길래요? 태상가주님께 그 서신을……?”
“하후세가가 본가에 선전포고를 했소.”
“네? 선전포고요?”
백예령이 황당과 분노가 묻어나는 얼굴로 되묻는다.
이것들이 정말 미쳐 버렸나? 표국의 일로 가문끼리 전쟁을 벌인다고? 허리를 숙이고 사과해도 부족할 판에…….
“하후세가에게 뒷배가 있을 수도 있소.”
“뒷배요? 설마 사파와 손을 잡은 것은…….”
“그건 모르지. 하나, 저들이 이렇듯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것은 믿을 구석이 있어서요. 하후세가의 가주는 남창에서 알아주는 고수기도 하지만, 이렇듯 대책 없는 싸움을 걸 사람이 아니오. 확실한 이득이 있기에 움직이는 것이오.”
“그렇다면 아버지가 위험할 수도……!”
백예령이 벌떡 일어선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서 태상가주께 서신을 보낸 것이니.”
가주가 부인을 달랜다. 태상가주에게 서신을 보내라고 한 것은, 그가 무한(武漢)에 있기 때문이다. 뱃길을 이용한다면 금방 강서성 남창에 도착할 수 있다. 태상가주가 단목세가의 일에서 거의 손을 뗐지만, 이런 일에는 바로 나서 줄 것이다.
‘하나, 태상가주님만 믿고 있을 순 없지.’
무림인은 싸워야 할 때, 물러서면 안 된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장로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단순히 표국의 일이라면, 금방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 * *
“흐읏…….”
여체를 탐하며, 곰방대를 물고 있는 민머리의 사내. 방 안에는 ‘몽환’의 향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환락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을 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궁주님,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가 배를 타고 남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태상가주?”
“예, 그렇습니다.”
나찰마궁의 소궁주 뢰극찰이 손을 떼자 하후예민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녀의 눈은 풀려 있었으며, 몽환의 쾌락에 빠져든 상태였다. 과거 총명하고 순수했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리라.
“단목장룡은?”
“정보에 의하면 운남성에서 무림맹으로 복귀하고 있을 겁니다.”
“그놈이 오려면 멀었겠군. 그 전에 단목세가 따위는 멸문하면 되겠고 말이야.”
멸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참으로 가볍게 내뱉는 뢰극찰.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태상가주라면 꽤 실력이 있겠군?”
“예, 초절정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알겠다. 그놈이 근처에 오면 말해라. 직접 마중을 나가지.”
“존명!”
수하의 기척이 멀어지자 하후예민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입을 맞추고, 그녀의 코와 입에 머무는 몽환의 향을 밀어낸다. 몽환에 취해 있을 때엔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으니까.
하후예민의 눈동자에 다시금 총기가 깃든다.
“콜록……!”
“서방님이 입을 맞추고 있는데, 기침하느냐?”
“죄송해요…….”
“후훗, 장난이다.”
뢰극찰은 하후예민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성격이었다면, 이미 그녀의 정기를 모두 흡수하여 자신의 내공을 늘렸으리라. 그러지 않은 것만 보아도 하후예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사실 더 내공을 늘리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네 원수인 단목장룡의 조부가 온다는군?”
“그분의 조부께서… 꺗!”
뢰극찰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살기에 하후예민이 공포를 느꼈다.
“그분?”
“아, 아니에요.”
“네년도 갈유화처럼 장천을 연모하느냐?”
과거 해남도에서의 장천과 갈유화의 사연을 얼핏 들었던 하후예민이다.
뢰극찰은 갈유화라는 여인을 사모했었으며, 장천이라는 사내에게 뺏겼다고 한다.
“마, 말도 안 돼요……! 제 모든 걸 이미 서방님께 바쳤는걸요.”
“그래, 그래. 알고 있다. 장난을 쳐 본 것이다.”
씨익.
뢰극찰이 광기가 번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하후예민은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부턴 그를 사랑해야 했으니까.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네 소원대로 단목세가의 씨를 말려 주마.”
단호한 말.
하후예민이 침을 꿀꺽 삼킨다.
‘그래, 내가 원한 것은…….’
처음엔 단지 단목장룡을 후회하게 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 사람을 사랑해야 해. 그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줘. 그러니까 믿어야 해. 난 이 사람이 없으면…….’
하후예민이 먼저 몸을 움직여, 뢰극찰의 목에 입을 맞춘다.
방 안에 자줏빛 기운이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