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떠나는 날
이젠 혈세귀막주가 아닌 소막주나 총 대주와 협의를 거친다.
단목장룡이 혈세귀막주가 인정한 무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무림맹의 대표가 아닌 특사일 뿐이었다. 세부적인 사항은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런데 두 사람의 태도가 어제와는 확 달라졌군.’
조심성이 느껴진다.
어제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총 대주는 단목장룡에서 반말을 찍찍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은 존대하며 단목장룡을 인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다른 곳들의 눈도 있으니 당연히 대외적으로 동맹 사실을 공표하진 않을 겁니다.”
무림맹과 혈세귀막도 각자의 입장이 있었다.
혈세귀막주와 대화할 때는 동맹이라는 말보다 서로를 이용한다는 다른 느낌의 단어를 사용했지만, 총 대주는 동맹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두 세력 사이의 동맹은 원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리라.
“그래, 아니면 서로 분쟁했다는 것만 은근슬쩍 알리면 될 것 같군. 어제 만난 소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이가 많겠지.”
단목장룡의 말에 총 대주가 긍정한다.
“본 막은 ‘박쥐의 후예’를 풀었습니다. 박쥐의 후예들은 당분간 본 막 밖에서 모습을 일절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내게 모두 전멸한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로군?”
“예.”
오히려 이건 혈세귀막에게도 좋았다.
발톱을 감출 기회. 덩치를 키우고, 기다란 발톱을 자랑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짓도 없었다. 무림에서 혈세귀막이 차지하는 명성이 대단하긴 하지만, 무림이라는 곳은 한 문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거대한 흐름의 물줄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법.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무림에서 삼 할의 힘을 숨기라는 격언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락을 취할 방법은?”
“무림맹 또한 점창파가 있듯, 본 막에도 그곳으로 서신을 보낼 연락 수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 자리에서 모두 알려 드릴 순 없군요.”
“인정한다. 다만 무림맹과 혈세귀막만이 통하는 암호가 있으면 좋겠군. 관계를 눈치챈 다른 이들이 이간책을 펼칠 수도 있으니까.”
단목장룡의 말에 총 대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깄습니다. 살수들에겐 음어가 필수적이지요. 이건 잘 활용하지 않는 구시대의 음어이기에 조악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혈교에서 만들었고 마교에게도 수탈당하지 않아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총 대주가 두꺼운 책자를 꺼낸다.
혈세귀막도 확실히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혈세귀막주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무림맹과의 동맹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했으며, 그것이 총 대주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 음어를 본 막이 푸는 만큼 무림맹에서도 내어 줄 것은 내어 주어야 할 겁니다.”
총 대주는 단목장룡의 실력을 알고 난 뒤에 상당한 충격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목장룡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존중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해야 할 말은 한다. 그가 충성을 다하는 것은 혈세귀막주가 극마의 경지에 올라서가 아니다.
“혈세귀막이 통이 크군. 놀라워. 좋아. 이 부분에 대해선 무림맹주께 특별히 보고드리지.”
총 대주는 당장 그에게 많은 것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림맹은 혈세귀막과 달리 정파 무림의 연합체. 혈세귀막주의 한 마디에 목숨을 거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만약 단목장룡이 혈세귀막주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면 여기서 총 대주가 그를 괴롭힐 수도 있었겠지만…….
“예, 알겠습니다.”
간단히 수긍하는 총 대주였다.
그렇게 여러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무언가 초조한 표정으로 회담을 지켜보던 소막주 화무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뭐지?”
“암천회와도 동맹을 맺을 생각이오?”
“마교는 거대한 적이지. 암천회가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소막주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럼 어제…….”
“어제?”
총 대주의 눈이 가늘어진다. 사실 사파 문파들 간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다고 말할 부분이 아니었다. 무림맹이 암천회와도 관계를 맺는다면, 혈세귀막과의 관계에서도 일정 부분 우위를 점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갈유화와 단목장룡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면?
뭐, 소막주는 조금 다른 부분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갈유화와 같이 저녁을 먹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숨기려 했지만, 분한 마음을 완전히 숨기진 못했다.
갈유화는 분명히 어제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단목장룡과는 저녁을 먹었다. 그것이 걸렸다. 그녀가 자신을 보러 운귀고원으로 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걱정. 화무기가 갈유화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쉬이 대답할 수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연모의 감정이라 말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네 말이 맞다.”
단목장룡은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혈세귀막의 본거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된다.
“무림맹은 암천회와도 동맹 관계를 추진해 볼 생각이다.”
총 대주의 표정이 굳는 것과는 별개로, 소막주의 표정은 은근히 풀어진다.
그런 부분이라면 갈유화와 단둘이 식사하는 것을 인정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정한다고 달라지는 부분은 없긴 했지만.
“대답 고맙소.”
소막주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여기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가 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암천회와 혈세귀막의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갈유화와 더욱 친밀해져야 한다.
소막주는 입을 다물었고, 세부적인 내용을 토론하는 것은 총 대주와 단목장룡이었다. 오늘이나 내일 중에 합의를 완료하여 그것에 대해 문서를 남겨 놓아야 한다. 단목장룡이라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으니까.
* * *
“유화야.”
“…….”
“갈유화.”
“…….”
툭툭.
“……!”
갈유화의 움직임. 그녀는 한 마리의 표범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움직여 손끝을 내질렀다. 화무기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순간 화무기가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저 엄청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 때문도 있었지만, 무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화무기는 갈유화를 자신의 아래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방금 움직임은 대체……?’
그녀가 진심으로 화무기를 공격하려 했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아무리 화무기가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어머, 죄송해요.”
갈유화는 손을 내리고, 화무기에게 사과한다.
“…아니다. 내가 갑자기 접근해 와서 놀란 모양이로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고민은요. 무공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깊이 빠져들었던 거랍니다.”
갈유화의 말에도 화무기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 그는 사파에선, 아니 정파를 통틀어도 자신보다 뛰어난 후기지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궁일몽이라는 천재가 사파에서도 이름을 알렸지만… 실제로 만난다면 별것 아니리라 생각했다. 혈세귀막의 무공은 정면 대결보다는 살행에서 그 힘이 드러나니까. 남궁일몽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고 자부해 왔던 화무기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다르다.
그는 현재의 화무기가 기를 쓰고 악을 써도 죽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거대한 존재가 갈유화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어제 무림맹의 특사와 저녁 식사를 했다고?”
갈유화가 싱긋 웃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어제의 일이 콕콕 쑤셔 왔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화무기의 유도신문에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네,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암천회는 정파 무림에도 손을 뻗고 있으니까요.”
“그것뿐이냐? 단목장룡의 말로는 암천회와도 동맹을 맺을 생각이라던데?”
갈유화가 생긋 미소를 짓는다.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뇌쇄적인 눈웃음이 화무기의 심장을 강타한다.
“흐응, 동맹이요? 암천회와‘도’ 말인가요?”
갈유화의 질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두 세력 간의 동맹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걸 그녀에게 모두 털어놓아야 하나?
화무기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무림맹보다 혈세귀막이 암천회와 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 우리는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다. 마교라는 그 추잡한 놈들과 싸우기 위해서.”
처음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갈유화.
화무기는 저도 모르게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그녀였지만, 암천회의 공주도 모르는 게 있었다. 그것이 화무기의 마음을 자극한다.
“어머, 마교요? 역시 그랬군요. 무림맹에서 특사가 나온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놀랍기도 하네요. 어찌 혈세귀막이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는지… 이제까지의 행보를 보면 혈세귀막이 마교와 싸우기 위해 정파와 손을 잡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순간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것을 말해 줘야 하나?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갈유화의 앞에서 단목장룡을 칭찬하게 되는 거다.
‘난 언젠간 단목장룡을 뛰어넘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가 앞서 나갈지 모른다고 해도…….’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할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
화무기는 용기를 냈다.
“그는 극마의 경지에 올라섰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인정했지.”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특사로서 그를 인정하게 된 계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갈유화에겐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
갈유화가 깜짝 놀란다.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화무기조차도 처음엔 이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렇듯 현재 정파 무림의 힘은 계속 커지고 있다. 그들의 잠재력은 놀라울 정도지. 그러니 혈세귀막과 암천회는 더 깊은 관계를 구축하여서…….”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화무기.
당연히 갈유화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어제 낭군님께서 그런 반응을 보여 주셨던 것이,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어서인가? 극마에 오르셨다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해. 하지만 극마에 오른 아버지께서도 천향옥로단 전체의 기운을 흡수할 순 없으셨는데……?’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나저러나 단목장룡이 어제 그녀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더 노력해야 해. 천향옥로단은 결국 한시적인 수단이었을 뿐이야. 그것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어.’
갈유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화무기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함을 느끼며, 일장 연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넌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잠시 나온 것이라 이제 가 봐야죠. 오라버니의 의견은 회주님께 꼭 보고드리도록 하겠어요.”
조금 안심이 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왜 단목장룡이 떠나자마자 그녀가 떠나는가?
‘아니다. 억측하진 말아야 한다. 그럴수록 추해질 뿐이야.’
화무기는 번뇌를 끊어 내고 갈유화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번엔 자신이 해남도로 찾아가리라.
“그럼 다음에 뵈어요.”
“그래, 혹시 모르니 몸조심해라.”
“걱정 감사해요.”
갈유화는 화무기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바로 단목장룡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운귀고원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녀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단목장룡이 암천회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지하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면패왕에게 알아서 해남도로 복귀하면 된다고 말하곤, 바로 운귀고원을 내려갔다.
한 시진쯤 지나자 단목장룡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 광채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왔나?”
“네에, 공자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가자.”
갈유화가 후다닥 그의 옆자리를 꿰찬다.
이제 기회가 있다. 그와 함께 암천회로 복귀하며 많은 사건이 생길 것이다. 남녀가 같이 여정하면 정분이 나도 몇 번은 나지 않겠는가? 단목장룡이 당장 무림맹에 복귀하지 않고 암천회까지 간다는 말을 들어 보면, 그도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다.
‘천향옥로단의 향이 없어도… 공자님은 날 생각하고 있어.’
콩닥콩닥!
그녀는 단목장룡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관도를 통하면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귀고원 근처에 있는 야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유화의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다.
그가 지하성 안에서 침묵하고 있던 이유!
바로 지금을 기다린 것이 아닐까? 그곳은 감시의 시선이 있기에 사랑을 나누기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꿀꺽……!
갈유화가 해남도에서 있었던 일을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단목장룡이 문득 멈춰 선다.
“휘이이익.”
그가 묘한 울림이 있는 휘파람 소리를 낸다.
현재 갈유화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처음 그가 시선을 주지 않았을 때의 불안함. 천향옥로단을 모두 취했으니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라.
이곳은 인적이 전혀 없는 야산.
이곳에 온 이유가 뭐겠는가?
‘어머, 낭군님의 취향이 이런 것이었나……!’
갈유화가 눈을 감았다.
스르륵.
그리고 매듭을 풀었다. 그녀의 의복은 쉽게 풀어지도록 만들어졌다. 단목장룡이 편하게 풀 수 있도록.
청아한 분위기의 의복이 땅에 떨어지자…….
그녀의 앞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림자가 빛을 가린다. 그가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흥분으로 인해 지금 그녀의 감각은 크게 둔화된 상태.
“지금 뭐 하나?”
“에?”
그런데 이상하다?
단목장룡의 목소리는 코앞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 냄새가…….
그녀가 눈을 뜬다.
“……?”
“끼룩?”
거대한 새가 갈유화처럼 고개를 갸웃한다.
“무, 무슨!”
갈유화가 흥분하여 펄쩍 뛰자 천응 또한 발광한다.
날개를 쭉 펼쳐 몸을 크게 만들고, 감히 자신의 앞에서 소리친 인간 암컷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그만해라, 천응. 내 손님이다.”
단목장룡의 말에 천응의 흥분은 금세 가라앉는다.
하지만 갈유화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거대한 새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이렇게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거기다 혼자 착각하고 흥분해서 옷까지 벗어 던졌다.
“끼엑, 끼엑!”
단목장룡의 손길에 신난 천응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갈유화는 얼른 옷을 입으려 했다.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땅에 떨어졌던 의복은 안타깝게도 흥분한 천응의 발톱에 의해 찢어진 상태였다.
‘죽고 싶어…….’
부끄러움에 치를 떨던 갈유화.
그런 그녀의 살결에 무언가 닿는다.
“……?”
단목장룡이 장포를 벗어 갈유화에게 덮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