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착각과 착각
암천회의 공주, 갈유화가 왔다는 것은 혈세귀막주뿐 아니라 소막주의 귀에도 흘러 들어왔다. 소막주는 단목장룡에 대한 생각으로 심경이 복잡한 상태였지만, 갈유화의 그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리자 약간 기분이 풀어졌다.
‘갈유화? 그녀가 왜 운귀고원에 온 것이지? 설마 날 보러 온 것인가? 암천제에서 날 밀어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당연히 갈유화의 사정을 모르는 소막주 화무기는 자기 멋대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딱히 운귀고원에 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운남성까지 먼 걸음을 했는데,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도록 할까?’
화무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공동을 나섰다.
그 와중에 자신의 방에 들러 동경을 보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갈유화는 어릴 때부터 혈세귀막주가 며느릿감으로 눈여겨보고 있었던 만큼, 화무기 또한 그러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암천회의 소회주와 혼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나찰마궁의 소궁주나 혈세귀막의 소막주인 자신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찰마궁의 소궁주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음란하면서도 추잡한 사생활을 가진 나찰마궁 소궁주 뢰극찰. 그는 절대 혼인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깊은 지하에서 빠져나간 화무기.
그녀는 운귀고원의 중심부, 형형색색의 꽃들이 펼쳐져 있는 정원의 앞에서 살짝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
화무기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단목장룡이라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 사내의 등장. 무인으로서, 혈세귀막의 소막주로서의 자존심이 뭉개졌다. 하지만 요염하면서도 왜인지 순수해 보이는 갈유화의 외모를 보고 있자니….
‘역시 외모가 최고의 무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로구나.’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갈유화의 신분에 저런 외모라면… 어떤 남자가 싫어할 수 있으랴? 저런 여인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생각에 화무기는 무너졌던 자존심이 회복되고 있었다.
‘그래, 지금 그놈보다 늦으면 어떠하리? 생은 길다. 훗날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나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평소 갈유화가 입던 의복과는 거리가 멀긴 하군.’
그녀는 풍만하고, 굴곡진 몸매로도 유명했다.
거기다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보란 듯이 다른 사내들에게 몸매를 보여 주는 의상을 주로 입었다. 그것은 사실 갈유화가 익힌 무공인 탕백환희소와 연관이 있었다. 사내를 유혹하는 내음을 뿜어내는 무공. 그것은 인간의 심기를 흐트러뜨린다. 천향옥로단과 관련이 되어 있는 그 무공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갈유화는 일부러 굴곡을 더 노출한 것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사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갈유화가 과거처럼 노출이 심하지 않은 옷을 입었기에 실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중원의 평범한 여인들처럼 꾸민 정숙한 차림새는 화무기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는 말.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다. 어쩔 땐 소막주로 불리기도 하고, 화 공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갈유화는 왠지 모르게 친근했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릴 땐, 그녀와 함께 장난도 치곤 했었다. 머리가 굵어진 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었지만.
“그래, 해남도에서 보고 처음이로군. 네가 운귀고원까지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이곳에 오는 것이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실례는 무슨, 전혀 걱정하지 마라. 그런 소리를 하는 자가 있거든 내가 혼쭐을 내 주마.”
당당한 사내의 모습.
그의 표정과 말투에선 가식과 억지스러운 자신감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갈유화는 그에게 산뜻하면서도 묘하게 야릇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머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혹여나 해남도에서의 일 때문에 제게 화를 내지 않으실까 걱정했거든요.”
“내가 그런 것으로 화를 낼 위인이더냐? 날 한참 모르는군.”
“그러게요. 제가 오라버니를 몰라뵈었어요.”
정다운 대화가 오간다.
그녀는 싱글생글 눈웃음을 지어 주었고,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화무기는 마음이 녹아내렸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는 단목장룡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충격적인 사실을 잊기 위해서 갈유화에 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
“운귀고원의 지하성(地下城)에 초대해 주시는 건가요?”
혈세귀막의 본거지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이 대놓고 높고 거대한 성을 짓지 않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혈교였으며 그 유명한 살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자신들의 심장부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입구를 복잡하게 꼬아 놓은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널 쫓아낼 수도 없지 않느냐? 가자.”
본래 그녀가 왜 이곳에 방문했는지 물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소막주 화무기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녀가 이곳에 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을 묻는 게 낯간지럽기도 했고, 그건 여인을 전혀 배려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지금쯤 갈유화가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화무기였다.
“가자.”
“후훗. 감사해요, 오라버니.”
갈유화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이유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이젠 안대를 풀어도 좋다.”
아무리 암천회의 갈유화라 하더라도 안대를 차지 않고 대전까지 진입할 순 없었다. 안대를 가리고 있었기에, 은근히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를 감상하던 화무기. 그가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다.
“어머, 이곳은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그때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기도 하고…….”
“계속 공사를 진행했으니까.”
“정말 멋지네요. 본회의 성만큼이나 웅장하고 깊이가 있어 보여요.”
암천회의 환락궁.
그곳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사파 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이다. 환락과 쾌락의 성지인 해남도. 그곳에서도 진짜가 암천회의 환락궁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갈유화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밖에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에 열중했던 그녀였다. 지금은 화무기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흘끔흘끔 옆을 둘러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천하의 갈유화가 부끄러워하다니.’
피식.
갈유화의 행동을 제멋대로 착각한 화무기가 싱긋 미소 짓는다.
“유화야, 식사는 하였더냐?”
“네, 먹었답니다.”
“그래? 그럼 방으로 가서 차라도 하며 마저 이야기를 하자꾸나. 여기선 네가 불편…….”
화무기의 말이 우뚝 멈춘다.
대전의 거대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 그것은 화무기가 애써 감춰 두었던 불안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소리였다. 화무기가 몸을 돌려 대전 쪽을 바라본다.
‘단목장룡…….’
지금은 모자랄지 모르겠으나 언젠간 그를 넘어서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화무기였다.
“오라버니?”
“으음, 그래. 가자꾸…….”
“저분이 무림맹에서 온 특사인가요?”
“네가 그를 어찌 아느냐?”
암천회의 정보망은 중원 전체에 뻗어 있었다. 그들은 몽환이라는 미약을 공급하며 중원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소량을 복용하면 사내들에게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났기에 중독되지 않게끔 극소량만 복용하는 정파인들도 있는 실정이다.
정파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암천회의 정보망.
그녀가 무림맹의 특사에 대해 아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남궁세가의 차남을 꺾고, 무림오룡에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궁금하네요.”
그녀의 말에 문득 불안감을 느낀 화무기.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멀리서 단목장룡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옆에는 총 대주가 있었다.
‘제길, 그와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용기를 내서 단목장룡을 마주한다.
어느샌가 그는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소막주님, 막주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
갈유화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막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갈유화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
입을 살짝 벌리고, 몽롱한 눈빛을 한 갈유화.
당연히 화무기로선 처음 보는 갈유화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왜 단목장룡을 보고?’
의문이 차올랐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단목장룡은 예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소막주와 갈유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막주님.”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지요.”
“특사께서 머무실 방은 이 아이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혈세귀막주의 뒤에서 흑의인이 나타나 인사했다.
언젠가부터 혈세귀막의 총 대주는 단목장룡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유화야, 나중에 보자. 대전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
갈유화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냉정하다 못해 싸늘할 정도로 침착을 유지하던 갈유화. 그녀는 지금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낭군님. 그의 모습을 보는데 어찌 정상일 수 있겠는가?
갈유화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소막주는 딱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크흠…….”
애써 단목장룡과의 시선을 피하고, 총 대주와 함께 떠나간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총 대주가 말한다.
“아마 무림맹과의 거래는 성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총 대주가 존대를 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다.
대전에 들어가기 전, 소막주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단목장룡과 갈유화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그런데 갈유화가 없었다.
단목장룡 또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디로?’
공동을 둘러보는 화무기였지만, 갈유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화무기.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소막주님.”
총 대주의 말에 겨우 철문으로 몸을 돌리는 화무기였다.
그의 마음은 나찰마궁과 협의하여, 해남도에서 떠날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 * *
“낭군님. 아차, 단목 공자님…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답니다.”
“내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온 건가?”
단목장룡의 물음.
평소의 갈유와였다면 태연하게 거짓을 늘어놓았으리라. 은근히 화무기를 이용하여 지하성에 진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단목장룡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그것과 마주하고 거짓을 고하여 불안해하는 것보단 사실을 말하는 게 나았다.
“죄송해요. 단목 공자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답니다. 단지… 혈세귀막에 홀로 찾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서 말이에요. 흑면패왕과 함께 운귀고원에 왔답니다.”
“잘됐군. 암천회에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굳이 갈 필요가 없겠어.”
“아……!”
아쉬움일까? 기쁨일까?
중의적인 탄성을 내뱉은 갈유화. 그녀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단목장룡을 올려다볼 뿐이다. 그러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는다.
“그런데… 키가 더 자라신 것 같아요.”
“음? 그걸 바로 알아보나?”
갈유화가 기분이 갑자기 확 좋아진다.
“네에, 당연하지요. 매번 공자님을 상상했는걸요. 키가 자라신 것뿐만 아니라 눈썹이 더 짙어지셨으며, 눈동자의 색이 조금 바뀌셨어요. 또한, 피부의 결이 달라지신 듯합니다. 마치… 검신(劍身)처럼 말이에요.”
단목장룡은 갈유화의 안목에 놀랐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내뱉는 것이 아닌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을 콕콕 짚어 냈다. 단목장룡은 최근 환골탈태를 통해 새로운 몸을 얻은 상태였다.
“눈썰미가 좋군.”
“공자님께만 그렇답니다. 다른 사내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어요. 믿어 주세요.”
갈유화는 기어코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하려 했다.
“알겠다. 믿어 주지.”
“정말 감사해요, 공자님.”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단목장룡이 말한다.
“식사는 했나?”
“아직 식전이랍니다.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화무기에게 답했던 것과는 반대로 말하는 갈유화.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단목장룡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 * *
“그런데 해남도에서 입던 의상과는 전혀 다르군.”
알아줬다!
낭군님이 그것을 눈치채 주었어!
갈유화는 일부러 이렇게 옷을 입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의 치명적인 몸매를 무기로 삼았다. 그것을 이용하여 사내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그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달라졌다.
특히 당옥정이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
‘여우 같은 계집. 순진하게 웃으며 낭군님에게 꼬리를 쳤을 게 분명해.’
단목장룡 또한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으리라는 걸 예측할 수 있다.
당옥정은 사천성에 보았을 때, 순수하고 귀여운 외형의 미녀였다. 그녀처럼 귀여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면, 이렇듯 참한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옷이 달라져서인지 현재 갈유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져 있다.
쾌락과 환락을 추구하는 암천회의 소궁주가 아닌 듯하다.
“네, 이제 밖에선 이렇게 입고 다니려고 해요.”
“그래?”
단목장룡은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았다.
갈유화는 그런 그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내들은 은근히 보일락 말락 한 것에 더 욕정을 가지기 마련이지.’
분명히 온몸을 꽁꽁 싸맨 의복이었지만, 여지를 남겨 두었다. 언제든 그녀의 무기를 꺼낼 수 있도록. 무기라는 것은 병장기(兵仗器)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단목 공자님도 꽤 많이 쌓였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옷을 홀라당 벗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여인은 매력이 없는 법이다.
‘후후후후…….’
갈유화는 해남도에서 보여 주었던 단목장룡의 야수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천향옥로단을 취하고 욕구를 완전히 억제하지 못했다. 그녀는 야심찬 계획을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목선을 드러내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하여 음식을 건네주며 그 과정에서 약간의 노출을 만든다.
당연히 갈유화는 단목장룡이 금방 달려들 줄 알았다.
해남도에선 그랬으니까. 그녀는 그와 같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났기에 그가 참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는데…….’
갈유화가 침을 꿀떡 삼킨다.
달려들지 않는 건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목장룡이 그 정도 참을성은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뭔가?
단목장룡은 갈유화의 몸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듯했다.
‘대, 대체 왜……?’
해남도에서의 모습과 확 달라진 단목장룡에 갈유화는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