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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세가의 역대급 망나니-156화 (156/236)

156화 동맹 제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소막주와 총 대주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감히 혈세귀막주의 앞에서 저리 말할 수 있는 무인은 없다. 그는 운귀고원의 주인이었으며, 생사를 결정하는 절대자였다.

‘그냥 주제를 모르는 것이었던가.’

혈세귀막의 본거지에 홀로 들어서고도 자신감이 넘쳤던 단목장룡이다.

당시에는 기죽지 않는 모습에 호감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그가 겸손을 보여 주겠답시고 자신의 자세를 낮추었다면 오히려 그를 무시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았지만, 객기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패기가 있는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이다. 주제를 모르는 자만일 뿐이었다.

소막주 또한 총 대주와 생각이 같았다.

감히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운귀고원의 지배자에게 저딴 망발을 내뱉는다? 거기다 언제 봤다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건가? 혈세귀막주와 같이 있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단목장룡의 목을 뽑아 버렸으리라.

혈세귀막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것은 단목장룡 또한 마찬가지였다.

총 대주와 소막주는 단목장룡의 태도에 분개하면서도 이 무거운 침묵이 불편했다.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단목장룡이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옥좌 위에서 절대자의 음성이 들린다. 예상외로 딱히 노한 기색은 아니었다. 운귀고원의 주인 앞에서 저런 망발을 내뱉고도 목숨을 부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소막주와 총 대주는 약간 당황했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나?”

“난 무림맹의 특사 자격으로 온 것이다. 혈세귀막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지. 물론, 더 하겠다면 받아 줄 용의는 있다만… 감당할 수 있겠나?”

빠직.

소막주의 얼굴이 구겨진다.

감히 아버지에게 또 저런 개소리를!

하지만 총 대주는 상황이 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혈세귀막주는 절대자다. 단순히 혈세귀막의 막주라는 지위 때문이 아니다. 그는 무(武)에선 무인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 넓디넓은 중원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실력. 당연히 총 대주는 혈세귀막주가 중원의 최고라 여기고 있다.

화경 혹은 극마라 불리는 경지.

총 대주 악비운은 벽만 넘으면 화경에 올라갈 수 있지만 오르지 못했다. 그 벽의 크기는 중원의 오악보다 높았으며, 천운이 따라야만 넘을 수 있다. 그만큼 화경과 초절정의 차이는 크다. 화경에 오른 이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은 알아차릴 수 없는 공방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혈세귀막주나 단목장룡이 저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총 대주 악비운은 경악했다.

혈세귀막주가 그런 경지에 올랐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혈세귀막의 막주였으며 운귀고원의 주인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단목장룡은 다르다.

그 또한 특사로 온다는 단목장룡의 세부 정보를 살펴보았다. 아직 삼십 대도 되지 않은, 무림맹 흑룡단의 조장 신분일 뿐이다.

단목장룡이 자신은 포기한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천외천이라 불리는 혈세귀막주와 자웅을 겨룰 수 있다고?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단목장룡을 지켜볼 뿐이다.

“건방지긴 하지만… 뭐, 너라면 그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까. 좋다. 유흥은 여기까지로 하지.”

“……!”

총 대주가 경악한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설마가 진실로 드러났다. 혈세귀막주의 저 발언은 단목장룡을 인정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운귀고원의 주인이! 혈세귀막의 막주가 말이다!

‘왜 저 건방진 놈을 혼내지 않으시는……?’

소막주는 혈세귀막주의 화끈한 피범벅 축제를 기대했지만, 막주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겐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아버지가 왜 참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물러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명령이 떨어진다.

두 사람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한 명은 경악한 얼굴로, 또 하나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혈세귀막주의 대전에는 단목장룡과 혈세귀막주 화귀광만이 남게 되었다.

* * *

“총 대주,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예…….”

무언가 무기력해 보이는 총 대주의 표정. 소막주는 그런 총 대주를 본 적이 없었다. 매번 무뚝뚝하고 한기가 풀풀 날리는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는 ‘살귀’였다. 그런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아버지는 대체 왜?

단목장룡을 가만히 내버려 두신 건가?

무림맹과 싸우기 싫어서……?

애초에 그랬다면, 특사를 박쥐의 후예에게 맞이하게 한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아버지께서 왜 그 건방진 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셨던 겁니까?”

“그건…….”

아직 소막주는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초절정과 화경의 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는지, 화경이라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소막주의 시선에선 두 사람이 잠깐 눈싸움을 했을 뿐이리라.

‘사실 나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지…….’

한숨을 내쉬는 총 대주.

소막주가 그를 재촉한다.

“이유를 알고 계시는군요. 얼른 말씀해 주십시오.”

“단목장룡… 그가 특사로 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사로 온 이유? 그게 대체 뭡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단목세가에 뭔가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는?”

“막주님과 같은 천외천의 경지에 오른 듯합니다.”

“……?”

총 대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막주 화무기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뭔 개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끔뻑끔뻑 떴다. 천외천의 경지가 무엇인가? 정파 무림에선 육왕이라 불리고, 사파 무림에선 오성이라 불린다. 그 숫자가 많다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강호에서 어떤 지위에 올랐는지 살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의 장문인.

천하제일가로 이름 높은 남궁세가의 가주.

해남도를 지배하고, 그림자의 왕이라 불리는 암천회주.

각 성의 지배자들이 오른 지고한 경지.

고작 후기지수 따위가 운운할 경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무공을 익혀 왔으며, 그런 무인 중에서도 정점에 오른 이들이었다.

“지금 단목장룡 그놈이 극마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도 사십이 훌쩍 넘었을 때 극마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나이는 고작해야…….”

소막주 자신보다 어렸다.

실력이 비슷해도 믿기질 않는 상황인데, 극마라니? 이걸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아니, 실제로 그가 그런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믿기가 싫었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무(武)를 추구해 온 무인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는 것 또한 무인의 미덕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극마라니?

“저도 믿기질 않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도리가 없지요. 막주님께선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단목장룡을 의심하는 것은, 막주님의 안목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 하하하… 대체 이게 무슨…….”

총 대주의 말이 맞았다.

상황이 말해 준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소막주 또한 아둔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후기지수가 혈세귀막주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니?

아니, 애초에 ‘후기지수’라는 단어로 그를 칭할 수 있는가? 이제는 육왕(六王)이 아닌, 칠왕(七王)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

“…….”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대전의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자극을 얻어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었다.

* * *

“편히 앉도록.”

“그러지.”

혈세귀막주는 감히 자신의 앞에서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무인이라면, 그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높은 단상에 앉아 있었기에 단목장룡이 그를 올려다봐야겠지만, 이곳은 혈세귀막의 본거지. 그런 것까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

“너 정도의 사내가 특사로 온 것을 보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겠군. 말해 봐라, 왜 본 막에 찾아온 것인지.”

두 사람은 치열한 기의 공방을 나눴다.

기(氣). 그것은 드높은 산의 봉우리에도 깊숙한 지하에도, 심지어는 황량한 사막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다. 중원에선 그들을 무림인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무림인 중에서도, 기의 제어가 탁월한 이들이 있다.

검으로 검기와 검강을 발현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 외부로 기를 방출할 수 있는 단계. 두 사람은 서로의 기파로 수 싸움을 벌였다.

이것을 검의 경지로 말한다면 이기어검(以氣御劍)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기로써 검을 움직이는 단계.

경지에 닿지 못한 자들은, 어떤 원리로 어떠한 방식으로 검을 제어하는지 볼 수 없다.

단목장룡은 혈세귀막주와의 기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실제로 싸운다면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화경에 이른 고수의 비무는 무림에 끼치는 영향이 몹시 크다.

혈세귀막주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단목장룡은 무림맹의 특사였으니 두 사람은 싸우지 않았다.

“본론부터 말하지. 무림맹은 혈세귀막과 손을 잡고자 한다.”

“손을 잡는다?”

배포가 큰 혈세귀막주라 하더라도, 쉽게 듣고만 있을 말은 아니다.

단목장룡 정도의 인물을 특사로 보냈으니 단순한 말장난은 아니리라. 사마련과 무림맹이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휴전(休戰)일 뿐이다. 종전(終戰)이 아니었다.

“사마련에서 마교와 접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혈세귀막주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교.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으랴. 피를 숭배하는 혈교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들 때문이며, 혈세귀막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혈교의 후예를 자처한 이후에도 그들은 적이었다.

“공동의 적을 위해 손을 잡자는 것인가?”

“그렇다.”

“본 막이 마교와 과거 악연이 있다곤 해도, 무림맹과 손을 잡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무림맹은 어떻게 대답할 건가?”

단목장룡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굳이 관심 없는 상대와 대화할 필요는 없겠지. 사파엔 혈세귀막만 있는 게 아니니까.”

혈세귀막주가 헛웃음을 짓는다.

“푸핫, 어디 나찰마궁이라도 찾아갈 생각인가? 색욕에 미친 광인들이 잘도 정파 족속들의 말을 들어 줄 것 같으냐?”

“나찰마궁만이 사파의 기둥이 아니지.”

당연히 혈세귀막주의 뇌리에 다른 이름이 떠오른다.

“암천회? 그들은 마교와 악연이 없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다.

단목장룡은 혈세귀막이 마교에게 가진 원한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또 혈세귀막은 결코 자존심만 내세우는 집단이 아니다. 영리하게 실속을 챙기며 사파의 기둥으로 성장해 왔다. 그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마교와 싸울 생각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리가 너희를 돕는 게 아니라, 너희가 우릴 도와야 한다.”

쉽게 풀이하면, 동맹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말이다.

혈세귀막은 가만히 있는데, 무림맹이 갑작스레 특사를 보낸 것이다. 혈세귀막이 고자세로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특사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아첨하고 아부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

단목장룡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교와 사마련이 손을 잡으면, 급해지는 건 무림맹일 텐데?”

“정파 무림의 힘을 얕보지 마라. 우린 어떤 위기라도 극복하여 더욱 찬란한 꽃을 피워 왔다. 역사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지. 정파는 꿋꿋이 싸워 나갈 것이다. 하지만 혈세귀막은 그럴 수 있나? 우리와 싸운다면 아주 오랜 기간 마교와 손을 잡아야 할 것인데?”

마치 다 안다는 눈빛.

너희가 마교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안다는 표정.

아무리 일시적인 동맹이라도, 마교와 손을 잡는 것은 혈세귀막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까진 사마세가에서 마교와 손을 잡지 않은 게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혈세귀막은 분명하게 행동을 취해야 했다.

“혈세귀막은 무림맹의 명령에 따를 생각이 없다.”

혈세귀막주의 단호한 선언에 단목장룡이 미소를 짓는다.

“혈세귀막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서로를 이용할 뿐. 결과적으로 무림맹과 혈세귀막은 각자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지.”

“…….”

혈세귀막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동맹이니 뭐니 하는 말보다, ‘서로를 이용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쁘진 않지만…….’

혈세귀막주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온다.

- 암천회의 흑면패왕과 공주가 운귀고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흑면패왕은 암천회에서도 서열이 최상위권인 고수였으며, 공주는 암천회주의 딸 갈유화였다.

- 암천회에서 왜?

- 정확히 파악 후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단지 현재까지 정황으로 볼 때, 본 막에 용무가 있어 방문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알겠다.

보고를 마친 수하가 물러난다.

당연히 단목장룡은 누군가 일정 거리까지 접근해 왔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혈세귀막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무림맹의 특사와 접촉하기 위해 온 것인가?’

단목장룡을 바라보는 혈세귀막주의 눈빛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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