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혈세귀막
초절정에서도 당연히 급은 나뉜다.
이제 막 검강을 다룰 수 있게 된 수준이라면, 초절정의 초입으로 불린다. 당연히 초절정이라는 경지는 무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대문파, 그러니까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의 장로들 모두가 초절정에 오르진 못한다. 그만큼 지고한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당연하게도 그 초절정에서도 급이 나뉜다.
검강이라는 것을 따지고 들면 해석하기 나름이며 각자가 익힌 무공마다 정의가 다르긴 하지만, 초절정의 중급에 든 자들이 활용하는 검강은 당연히 초입보다 더 안정되며 파괴력이 크다. 적절한 시기에 검강을 활용하고, 때에 따라서 많은 양의 내력 쏟아부어 검강을 활용할 수 있는 단계를 초절정의 중급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초절정의 상급.
여기서부턴 딱히 구분하기 어렵다. 같은 초절정이라도 ‘격’이 다르다고 표현된다. 무(武)의 한계라 불리는 화경과 가장 가까운 경지이니만큼, 일시적으로나마 화경의 고수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함을 뽐내곤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자면, 단목장룡.
그는 같은 초절정으로 분류되는 고수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단목장룡이 그들보다 뛰어나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초절정의 상급에서도 급이 나뉘곤 하는데, 그것은 무공의 차이도 있을 수 있겠으며, 타고난 육체가 얼마나 뛰어난지도 변수가 되리라.
혈세귀막의 총 대주 악비운.
그는 타고난 살인마였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의 어디를 찔러야 효과적으로 죽음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타고난 살귀.
그의 경지는 초절정의 상급에 올라 있었으며, 벽을 넘으면 화경에 닿을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해남도에선 보이지 않았던 것.
단목장룡이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까? 악비운의 실력이 피부에 와닿는다.
당연히 단목장룡이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더 강하다는 증거.’
싸우지 않더라도, 기세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내가기공을 활용하는 무인들이라면 상대의 기운을 읽어 들일 수 있다. 단목장룡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오감이 아닌 육감(六感). 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악비운을 보며 단목장룡은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모두 취한 자신의 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는 계가기 되었다.
‘화경에 오른 모든 자들이 이러한가?’
또한, 궁금증도 생겨났다.
초절정에서도 급이 나뉘듯, 화경에서도 그러하리라. 무의 한계가 화경으로 정의되어 있었지만, 천마신교의 교주는 화경에서 무공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총 대주의 말이 들린다.
“명예롭게 자결하라.”
“…….”
소녀가 몸을 파르르 떤다.
공포? 그런 것이 아니다. 순간 소녀와 눈이 마주친 단목장룡. 그녀의 눈빛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억울함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다. 단목장룡은 이제 막 혈세귀막에 도착한 것일 뿐인데, 왜?
“…네.”
하지만 총 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소녀는 단목장룡에 대한 복수심을 접었다. 박쥐의 후예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늘에 먼저 올라간 아버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소녀가 단검을 들고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한다.
대체 혈세귀막에서 어떻게 키워졌기에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생긴다.
“잠시.”
“…….”
소녀의 팔이 우뚝 멈춘다.
그녀는 원한이 서린 눈으로 단목장룡을 노려본다.
그것은 악비운도 마찬가지였다.
“본 막의 일에 개입하지 마라.”
“날 죽이려고 했던 이유를 들어 보고 싶군.”
악비운의 시선이 소녀를 향한다.
그는 소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단목장룡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박쥐들의 후예가 실패했다는 뜻이리라. 아마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소녀, 위류향에게 단목장룡의 안내를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어릴 때부터 성심성의껏 길러 준 박쥐들. 그들을 죽인 단목장룡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을 것인가, 그것을 보고 싶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키울 가치가 있었으니까.
위류향은 확실히 무의 재능이 출중했다.
현재의 복주(蝠主)보다 더 뛰어난 박쥐의 후예가 될 자질이 다분했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단목장룡에 검을 겨누었다. 그것은 박쥐의 후예로서 취해야 할 행동이 아니었다.
“왜 무림맹의 특사에게 검을 겨누었지?”
알면서도 물어보는 총 대주.
그의 질문에 위류향이 천천히 입을 연다.
“…살아갈 가치가 없으니까요.”
단목장룡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살하려고 날 공격한 건가?”
단목장룡의 가증스러운 말.
위류향이 살기를 내뿜는다. 단목장룡의 눈이 가늘어진다. 고작해야 열셋 정도는 될까? 그런 소녀가 내뿜을 살기의 수준이 아니다. 저것은 단순히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다.
“…아버지들의 원수, 개, 자식.”
어색한 욕설.
욕을 내뱉는 것이 처음인 듯이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아버지의 원수라고? 단목장룡은 혈세귀막의 무인들을 죽인 적이 없었다. 나찰마궁이라면 눈에 보이는 족족 황천길로 보낸 기억이 있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당시에는 단목장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저 소녀의 무공은 살수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수를 죽였다는 말인데.
혈세귀막에서 살수를 보냈었나?
확실하진 않았지만, 대충 상황이 머리에 그려진다.
‘날 죽이기 위해 함정이라도 팠던 건가?’
그런 함정이 있었다면, 단목장룡이 걸려들 리가 없었다.
그는 하늘을 날아 운귀고원에 도착했으니까.
단목장룡이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타닷!
누군가 동굴 속에서 빠르게 접근해 왔다.
“총 대주님,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수하의 전음을 듣던 총 대주의 눈썹이 꿈틀한다.
새로이 들어온 정보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박쥐의 후예들이 지원을 요청했어?’
단목장룡을 흘끔 바라본다.
그는 무표정하게 위류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엎질러진 물이로군.’
이미 위류향은 단목장룡을 공격했다.
그는 혈세귀막의 손님으로 인정되어 이렇게 안내를 받았다. 무림맹의 특사이기도 한 그를 명령도 없이 공격한 것은 중죄였다.
‘이 아이가 마지막 보여 준 그 살기. 아까운 재능이긴 한데…….’
총 대주가 단목장룡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위류향의 처분을 맡기도록 하겠다. 이 아이는 네가 아버지들을 죽였다고 ‘착각’하고 있군.”
착각이라는 말에, 위류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런 반응은 영락없는 소녀였다.
“…총 대주님, 아버지가……?”
“그래, 모두 무사히 살아 있다. 네년이 실수한 거지.”
“……!”
“그렇다고 감히 본 막의 손님을 해하려고 한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걸 지켜보던 단목장룡.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
“뭔가 착각이 있던 모양인데, 용서하지. 좋은 날에 피를 보고 싶진 않군.”
“진심인가? 널 죽이려 했다.”
총 대주는 당연히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용서해?
설마 어린아이라서 아량을 베푸는 건가?
“그래, 너도 저 아이가 살았으면 싶잖아?”
정곡을 찔린 총 대주가 찔끔한다.
위류향은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다. 아버지들이 살았다고 좋아해야 하나? 그렇다면 내가 했던 행동은 뭐가 되는 건가? 만약 자신이 죽었다면? 아버지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벌’을 받았으리라.
오들오들!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흐른다.
“위류향이라고 했나? 넌 나한테 빚을 진 거다.”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철막, 위류향을 옥에 가두도록.”
“예, 총 대주님.”
철막이라 불린 사내는 위류향을 어깨에 둘러메고 사라진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소녀는 단목장룡 쪽으로 뻣뻣하게 손을 뻗을 뿐이었다. 당연히 끝까지 무슨 말이 나오진 않았다.
“…어떻게 박쥐의 후예들과 마주하지 않고 이곳까지 온 거지?”
총 대주 자신이라 해도 박쥐의 후예들을 쉽사리 따돌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혈세귀막의 최고 살수 집단이었다. 설마 단목장룡의 경지가…….
“그건 말해 줄 수 없지.”
괜한 것을 물었다.
무림맹의 특사로 온 만큼 확실히 재주는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박쥐들의 그물에서 그리 감쪽같이 빠져나갔는지 알려 줄 리가 없었다. 총 대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위류향에게 자비를 베풀어 줘서 고맙군.”
“난 무림맹의 특사 자격으로 왔으니까.”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총 대주 악비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는 총 대주인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따라와라.”
그를 따라 동굴을 들어간다.
더는 안대를 채우진 않았다. 이제 끝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넓은 공동이었다. 지하에 이런 장소를 만드는 것에 꽤 공을 들인 듯하다.
“회담은 너와 하는 건가?”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다만…….”
위류향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수하가 들고 온 소식 덕분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총 대주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혈세귀막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좋았고.
그는 광장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단목장룡을 안내했다. 그곳은 음침한 동굴이라기보단 평범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흔히 들를 수 있는 객잔의 방과 비슷한 구조라고 할까?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라.”
“그러지.”
총 대주가 떠난 지 이각이 되었을까?
복면을 써서 눈동자만 보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사, 막주님께서 부르신다. 따라와라.”
이놈들은 말을 놓는 것이 기본인가?
단목장룡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부터 예를 차릴 것이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공동의 끝에는, 발이 열 개나 달린 거미가 양각된 거대한 철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이 혈세귀막주가 있는 곳인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르으응-!
천천히 열리는 문. 그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시선이 느껴진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
총 대주의 기세 또한 장난이 아니었지만, 철문 사이로 느껴지는 시선은 차원이 다르다. 당연히 그 시선의 주인은 혈세귀막주였다. 화경의 고수. 단목장룡이 화경에 다다른 고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화경에 올라 그만한 고수와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즉,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처음으로…….
무공의 극에 도달했다는 고수와 대치하게 된 것이다.
“들어가라.”
뚜벅뚜벅.
철문 뒤에는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공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똑똑. 군데군데 천장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마치 오래된 동굴의 종유석처럼 말이다. 아마 비릿한 내음의 정체일 듯하다.
‘설마 사람의 피인가?’
혈세귀막.
혈교의 후예라 자처하는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공동의 중심에는 음침한 동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어탑(御榻)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위로 마치 황제의 그것과 같은 붉고 금빛을 띤 화려한 옥좌가 있었다. 그 옥좌에는, 혈세귀막주라고는 믿기지 않는 젊은 청년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옆으로 총 대주와 낯익은 청년이 기립해 있다.
‘이름이 뭐였더라? 화무기였던가?’
화무기.
혈세귀막의 소막주였다.
단목장룡은 당당히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호오?”
단목장룡이 다가올수록 권태에 잠겨 있는 듯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던 혈세귀막주의 허리가 펴진다. 그것을 느낀 소막주와 총 대주 또한 더욱 긴장하여 몸을 꼿꼿하게 한다.
“네가 무림맹에서 온 특사인가?”
“그렇다.”
찌릿!
‘감히 아버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어!’
화무기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단목장룡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아버지가 두려웠다. 아버지가 문제 삼지 않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열심히 눈알을 부라리는 것뿐.
피식.
혈세귀막주는 당연히 아들과 총 대주의 반응을 알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본 좌의 딸을 용서해 줬다고?”
“당신의 딸이었나?”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다.
혈세귀막주의 딸이었나?
“본 막에 있는 이들은 모두 내 아들과 딸이지.”
“그렇군.”
잠시 침묵이 흐른다.
혈세귀막주가 단목장룡을 빤히 바라본다.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점창파의 장로나 장문인을 대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홀로 왔다. 자만인가? 그를 보기 전까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니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나쁘지 않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서로 시선을 마주했을 뿐이지만, 혈세귀막주는 단목장룡을 인정했다. 혈세귀막의 소중한 인재를 살려 줬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박쥐의 후예들을 완벽히 따돌리고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 자격은 갖춰진 것이다.
“그래서, 무림맹에서 본 막에 특사를 보낸 이유가 뭐지?”
단목장룡이 입을 열려고 할 때.
혈세귀막주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한다.
“쓸데없는 일로 본 좌의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면, 죽음을 각오하도록. 죽음이 두렵다면… 말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내 딸을 용서해 준 배려로 말해 주는 것이다.”
단목장룡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다.
혈세귀막주는 사파의 지존 중 하나였다. 그에겐 패배란 단어는 없었다. 단목장룡은 눈여겨봐 줄 무인 중 하나였을 뿐이다. 사실 그런 인재가 전 무림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긴 했지만 말이다.
위엄, 절대자의 패기가 사방을 옥죄어 온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절대자의 그 기세에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 오만방자한 모습에, 소막주와 총 대주의 눈썹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단목장룡이 기어코 화경에 오르려 했던 이유.
혈세귀막은 오성(五星) 중 하나. 사파의 별이었다. 사실 특사로 와서 혈세귀막주와 마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의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선 화경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는 을이 되기 위해서 운남성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구차하게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줄 생각이 없다.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뿐이지, 싸워야 한다면 당당히 검을 뽑으리라.
“날 죽일 수나 있나?”
단목장룡의 말에 혈세귀막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