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박쥐의 후예들.
혈세귀막의 살수로, 이제껏 살행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던 살수들이다. 살수들은 기척을 감추고, 함정을 파고,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
정면 대결에선 이기기 힘든 적도, 살수는 끈기와 인내로 버티고 버텨 기회를 만든다.
당하는 입장에선 곡할 노릇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객잔에 들렀는데 음식에 독이 타져 있다면? 객잔 방의 침대 아래에 호흡을 죽이고 보름을 버티고 있다면? 자고 있는 중에 심장을 꿰뚫는 검을 막아 낼 무인은 없었다.
그렇기에 무림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살수였다.
그 살수 중에서도 박쥐의 후예들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다.
“막주님의 명이다. 목표는 단목세가의 단목장룡.”
복주 조괘의 말에 후예들이 종이 뭉치를 받아 든다.
그것에는 단목장룡의 사소한 정보부터 시작하여 초상화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가 의창현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았던 것까지 적혀 있었으니, 상당한 정보력이었다. 살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적의 행동이 어떨지 예상할 수 있으면, 무조건 죽일 수 있었다.
무공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틈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귀주성이나 사천성을 통과하여 운남성에 도달할 것이다. 영선현, 소통현, 선위현, 곡정현.”
네 개의 현 중 하나는 무조건 들를 것이다.
“그는 객잔에 묵을 때, 가장 좋은 곳에 묵는다고 한다. 이제까지 살수에게 노려진 적은 없으나 본 막에 대해 알고 오는 것이니 대비를 했을 테지. 귀식대법을 이용하여 확실한 기회를 노린다. 만약 실패할 것 같다면, 시도조차 하지 마라.”
“예.”
“최초의 시도가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다. 그때는 무조건 단목장룡의 심장이 꿰뚫려야 한다.”
“예, 복주님.”
“사천당문과 깊은 연이 있다고 하니 웬만한 독엔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형잔영산공분(無形殘影散功粉)의 사용을 허한다.”
무형잔영산공분.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나는 독약은 아니다. 복용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단전을 마비시켜 내력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절독 중 하나였다. 경지가 높은 무인들은 내공으로 독을 몰아낼 수 있으니, 최대한 상대가 느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 달 반, 그가 운남성에 진입할 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친다.”
“예.”
“움직여라.”
쉬이이…….
그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살수는 기척을 숨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박쥐의 후예들이 단목장룡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막주의 명령이었기에, 무조건 그를 해치워야 했다.
* * *
“으음…….”
단목장룡이 눈을 떴다.
높은 산의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상쾌하다. 꽤 오랜만에 냄새를 맡는 듯하다. 난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하고 또 명상했다. 상상 속에서 거대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환골탈태를 할 때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긴 꿈을 꾼 것 같군.’
어렴풋한 기억.
으레 꿈이 그렇듯 잡으려 할수록 더더욱 멀어진다. 얼핏 내가 거대한 동경 앞에 서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거기서 내 몸이 변화하는 걸 지켜보았던 것 같았다.
그걸 보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던 것 같지만, 연기처럼 흩어진다.
‘으음, 내부의 노폐물이 배출되진 않은 건가?’
보통 환골탈태를 하면 몸 속의 불순물들이 빠져나온다.
육신이 재구성될 때 필요하지 않은 찌꺼기들. 하지만 그런 것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환골탈태에 성공하지 못한 건가?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군. 그리고 키가 조금 커졌나……?’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다.
“끼이이익-!”
천응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다가왔다. 눈망울에 물기가 촉촉한 것을 보니…….
“울었냐?”
“끼이익!”
내가 환골탈태하는 것을 보았다면, 천응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리라. 애초에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직접 관찰할 기회는 현 무림에서도 한 손에 꼽으리라.
“날 지켜 줘서 고맙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천응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헐떡이며 혀를 내민다.
“끼엑!”
“이 근처에 물가가 있느냐?”
“끽끽!”
긍정의 표시.
외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제는 거의 지워진 꿈속 기억. 그곳에서 무언가를 줄곧 외쳤던 것 같은 느낌이다. 확실하진 않았다.
천응의 등에 올라타, 근처의 잔잔한 호숫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물결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으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머리가 더 길어진 것 같았으며, 키가 확실히 커졌다. 덩치는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애초에 내 몸이 이러했던 것처럼 적응을 완료했다는 것이겠지.’
무공을 펼쳐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
육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정말 화경의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실패한 것인지.
뇌왕검을 쥐었다.
단전의 내공을 운용하려는 순간.
“……!”
뇌왕검에 잿빛의 검기가 맺혔다. 구결을 의도적으로 운용하지도 않았다. 내 몸의 일부인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눈동자를 돌리는 것처럼. 생각과 동시에 내공이 세맥을 타고 질주했다. 보통 세맥에선 내력이 움직이는 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검기를 발현하는 것 정도로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맥이 더 넓어지고, 유연해졌으며 단단해졌다.
‘확실히.’
변했다.
막 명상에서 깨어났을 땐,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력을 운용해 보니 극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내력의 질부터가 달라졌다. 억지로 몸에 붙들고 있던 천향옥로단의 기운이…….
‘단전에 융화되었다.’
짐작했던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깨달음은 이미 화경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무(武)를 추구하는 무인은, 심기체(心氣體)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과거의 나는 심만 완성된 상태로, 기와 체는 그것을 따라오지 못했다.
‘지금은 다르다.’
생각과 동시에 기와 체가 움직여 준다.
단순히 검기를 발현한 것일 뿐이지만, 그 변화가 얼마나 큰지 직감할 수 있었다.
“끼에에엑-!”
옆에서 뇌왕검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천응이 놀라 외친다.
녀석도 내 변화를 알아챈 모양이다.
‘어디 한번…….’
잿빛의 검기가 칠흑으로 물들었다.
* * *
“표적은?”
“사천, 중경, 귀주 어디에서도 단목장룡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복주 조괘가 인상을 찌푸린다.
살수는 감정의 변화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운다. 박쥐를 거느리는 조괘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일 년을 잡아도 세 번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단목장룡이 표적이 된 뒤로는 자주 감정이 드러났다.
기다리고 인내하면 표적이 온다.
그 확신이 있다면,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참아 낼 수 있다. 땅속에 숨어 있을 때, 벌레들이 살점을 물어뜯어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표적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혈세귀막의 들개들이나 하오문, 심지어 사마련의 정보부대까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의 정보는 머리카락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단목장룡은 분명히 변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예상보다 더 조심성이 많은 놈이었다.
단목장룡의 정보로 추정해 볼 때, 무림맹의 장로나 점창파의 장로와도 정면으로 부딪칠 만큼 실력을 과신한다. 다만, 혈세귀막에 방문하는데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네 지역 중 하나를 통과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단목장룡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혈세귀막주의 명령이었다.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여 살행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변명일 뿐이다.
막주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박쥐의 후예라는 명예가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 이 살행은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해당 내용을 모든 후예에게 알려라. 이번 살행은 절대 실패해서는 아니 된다.”
“예, 복주님.”
그렇게 박쥐의 후예들이 악에 받쳐 단목장룡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운남성의 하늘을 갈랐다.
“끼이이익-!”
천응이 있는데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었던 단목장룡.
박쥐의 후예들은 오지 않을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무력 집단이었다면 석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지쳐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끈기와 인내의 표본인 살수였기에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
‘작은 흔적만 드러내 보아라. 네놈은 다시는 하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박쥐의 후예는 객잔 침상의 아래쪽에서.
어떤 박쥐는 함정을 파고 땅속에 숨어서.
단목장룡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살수들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갈랐지만, 제아무리 특급 살수들이라고 해도 하늘을 나는 새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 * *
‘운귀고원이라.’
운남성의 성도 곤명.
그곳은 사시사철 꽃이 피는 장소로 유명했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곤명의 경관은 확실히 일품이었다. 단목장룡은 하늘에서 잠시 그것을 감상하다가 곤명 근처의 야산으로 내려갔다.
“천응아, 다녀오마.”
“끼익!”
녀석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곤 운귀고원으로 이동한다.
하늘 위에서 바라봤을 때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엔 중원인들뿐 아니라 묘족이나 회족 그리고 백족 등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은근히 조연연의 생김새와 닮은 것을 보니 그녀는 저들의 피를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경사가 있는데도 그들은 마치 고양이처럼 마구 들판을 누비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은근히 단목장룡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혈세귀막이라…….’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따끔따끔한 무언가가 피부를 찌른다.
몇몇 이들은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평범한 복장을 하고 양을 키우거나 약초를 캐고 있었다. 실력을 숨기고 변장한 이들. 혈세귀막이 혈교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혈교의 후예를 자처해서가 아니라 살수 집단이기 때문이다.
살수는 평소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나 살수요!’라고 떡하니 붙이고 다니는 이들은 제대로 된 살수가 아니다.
‘날 보면서도 전혀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군.’
확실히 훈련을 잘 받았다.
혈세귀막 같은 문파가 어중이떠중이라면 되레 단목장룡이 실망했으리라.
‘하지만 이것이 저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몸을 얻었다고 해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겨우 힘을 얻었는데 방심하여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적당한 속도로 운귀고원을 오른다. 살수들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사방을 살피고, 심지어는 땅에 있는 기척까지 살폈다.
다행인 점은, 곤명의 중심부까지 도착했는데 어떤 공격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사를 환영해 준다는 것일까?
예상했던 것과는 약간 달랐다.
혈세귀막은 다른 거대 문파들과는 다르게, 드높은 성 따위에서 기거하지 않는다. 그들의 특성상 지하나 동굴을 파놓고 쉽게 찾을 수 없는 은신처에 숨어 있는데, 당연히 정파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중심부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혈세귀막에서 알아서 접근해 올 것이라 했지.’
그렇게 중심부로 걸어가고 있을 때,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가 단목장룡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중원인들보단 훨씬 피부가 검었다.
“…단목장룡 특사님이신가요?”
왠지 모르게 힘이 없는 소녀.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안내해 드릴게요.”
축 처진 어깨. 힘이 없는 발걸음. 하지만 단목장룡은 그녀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리 힘없이 걷고 있을까? 저것도 저들의 무공의 일종이려나?
“여기서부턴 안대를 차 주셔야 해요…….”
안대라.
위험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 또한 본거지의 위치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다.”
단목장룡이 바로 승낙하자 소녀가 직접 그의 눈에 안대를 끼워 준다. 어둠이 몰려들었지만, 딱히 두렵진 않았다. 그는 이제 눈으로만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오히려 눈을 가리니 피부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다.
소녀와 연결된 짧은 실을 잡고, 그녀를 따라간다.
구불구불한 길이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작은 틈 사이를 기어서 빠져나가기도 했다.
‘말 그대로 살수가 머무는 곳 답군.’
그렇게 복잡한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을 때.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연다.
“…모두 죽었나요?”
그녀의 목소리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무슨 소리냐?”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건… 아버지들이 실패했다는 말이겠죠…….”
살기.
작은 소녀가 뿜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걸쭉한 살기였다.
보이진 않았지만, 날카로운 쇠붙이가 단목장룡을 노려 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쉬익!
깔끔한 일격.
단목장룡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의 암습을 피해 냈다.
그녀는 분명히 그를 죽이려 했지만, 공격이 실패해도 당황하지 않았다.
작은 소녀의 눈과 마주한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으면 저런 눈빛을 띨 수 있을까? 공허함이 가득하다. 삶을 포기한 눈빛이었다.
“박쥐의 후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요…….”
“무슨 짓을.”
소녀가 죽음을 각오한 듯이 단검을 찔러 온다.
당연히 막힐 것은 알고 있었다. 순간 단목장룡은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당연히 소녀의 공격은 단목장룡에게 막혔으며, 그녀는 단검을 놓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왜 죽으려 하는 거지?”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을 뿐.
단목장룡은 당연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암습했다고 해도, 너무 엉성했다. 단목장룡 정도의 고수를 노리기엔 턱도 없었다.
“쯧, 네년은 박쥐의 자격이 없군.”
그때 검붉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과거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암천제가 열리는 해남도에서 말이다.
‘총 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