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책임
“맹주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단목장룡은 맹주와 처음 마주하는 것이다. 처음 무림맹을 왔을 땐, 그가 부맹주에 올라 많이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무림맹의 권력 구도가 급변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딱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근 무림맹주가 무림맹을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는지 들여다보면 꽤 고심한 태가 났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맹주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성향은 아닌 듯했다.
‘뭐, 수뇌들이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건 다를 수 있겠지만.’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
딱 봐도 명산 깊숙한 곳에서 도를 닦고 있을 법한 행색의 사내였지만, 당연히 체격은 다부졌다. 맹주전에 들어올 때엔 누구도 무기를 착용할 수 없지만, 맹주만은 예외. 거대한 중검을 허리에 찬 상태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자연스레 그의 기세가 뻗어 나간다.
단목장룡은 그의 기운을 읽어 들이려 노력했다.
‘역시 무림맹주는 무림맹주인가…….’
아무나 무림맹주가 될 순 없었다.
정파 무림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맹주가 일파의 그저 그런 장로 수준에 불과했다면, 무림맹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퇴색되리라.
“오랜만에 여는 회의로군. 모두 반갑소.”
맹주가 착석하자 당주들과 단주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앉는다.
그런 와중에도 단목장룡을 흘겨보는 황룡단주. 단목장룡은 그의 적의가 위지무외와의 비무첩 사건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황룡단으로의 입단을 제안했었다. 정파의 중진 고수들이 고작 그런 일로 적의를 가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흔한 일이었다.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일수록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무림맹은 평등을 위한 단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다. 황룡단주는 단목장룡을 쉬운 먹잇감으로 인식했으리라.
단목장룡은 자신의 행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열렬히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면 반대로 극도로 싫어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 모두를 품고 갈 순 없었다. 뭐, 정치적인 수완이 매우 뛰어나서 모두를 갈고리처럼 쓸어 담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그럴 필욘 없지.’
단목장룡은 황룡단주의 시선을 무시할 뿐이었다.
“모두 간략하게 내용을 알고 있으리라 보오. 마교는 중원에 몰래 침범했으며, 중소 문파에 잠입했소. 그리고 소위 명문가로 불리는 가문까지 집어삼키려 했지.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사태가 중원 어딘가에서 또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오.”
숙연한 분위기.
왜 무림맹이 막지 못하나?
사실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이 없었다. 무림맹이 정파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은 맞다. 하지만 강호라는 곳이 그보다 더 넓었을 뿐.
“일단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소. 현재 순찰당의 당원들이 열심히 중원 곳곳을 살피곤 있지만, 사실 그것만으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발언해도 좋소.”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적룡단주였다.
“일단 모든 문파에 모두 서신을 보내야 합니다. 마교의 존재를 알리고, 정파인 모두가 그를 경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서신을 보낸다면 분명히 마교도 맹의 서신을 읽게 되지 않겠소? 그들은 더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오. 양씨세가는 마교도들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했었지. 가문의 존폐 위기에서 무림 전체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오.”
맹주의 반론.
그것은 단순히 적룡단주를 반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되면 생기는 문제점과 상황이 더 심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적룡단주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마교의 일을 무림에 알리지 않는다면, 피해자가 더 생겨날 겁니다. 대비하지 못하는 것과 경계하는 것의 차이는 클 것이라 판단됩니다.”
무림맹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이야기는 사실 장로 회의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 보겠소.”
맹주의 말에 한 명씩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원론적인 방법들. 마교를 경계해야 하며, 언제든 싸울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의견들.
물론, 과격한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정파 무림의 힘은 오랜 평화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모두 마교가 두렵습니까? 전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놈들은 자신들의 힘이 약하다고 인정했기에 치졸한 방식으로 작은 문파들을 포섭하려는 겁니다. 당장이라도 전 무림에 소집령을 내리는 겁니다. 그리고 단번에 십만대산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박살 내야 합니다! 과거 중원의 선배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치욕을 당했습니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와 여인까지 죽임을 당했으며, 선조들의 무공을 빼앗겼습니다! 이제는 참지 않을 때입니다!”
열렬한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있다.
황룡단주의 말대로 무림맹의 힘은 절정에 달했으며, 그것을 한곳에 집중한다면 마교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황룡단주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당하기만 했던 건 이제 끝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그들을 타격해야 합니다! 다시는 중원 무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무림맹주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다.
단지 걸리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황룡단주의 의견에 동감하오. 강호 동도들이 마교도들에게 당했는데 지켜만 본다면 무림맹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는 것이지. 이미 마교는 중원을 침범했소.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
무림맹주가 자신의 말을 옹호하는 듯하자 황룡단주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단목장룡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오늘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소. 회의를 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몇 번이든 다시 열 수 있소. 어떤 의견을 내더라도 상관없으니 각기 의견을 내보도록 하시오.”
무림맹주가 아직 발언하지 않은 이들을 둘러본다.
흑룡단주와 호법당주 그리고 내당주 등은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무림맹주의 말에.
“그러고 보니 흑룡단주님께서 데려온 조장께선 말이 없으시군?”
황룡단주가 단목장룡을 지목한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단목장룡을 향한다.
“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가? 조장급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면 생각해 둔 것이 있는 게 아닌가?”
그 말에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목장룡의 회의 참석을 허가해 준 것이 그였다. 해남도에 잡입했던 것부터 장로 위지무외에게 비무첩을 던졌던 것까지. 흥미가 가는 후배였다.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단목 조장, 발언하겠나?”
황룡단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강호의 경험도 없는 놈이 무슨 생각이라도 있겠는가? 어차피 선배들이 발언한 내용을 다시 줄줄 읊을 뿐이리라.
‘긴장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할 수도 있겠지.’
단목장룡이 흑룡단주를 흘끔 바라본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껏 단목장룡이 발언하지 않은 것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무림맹의 수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단목장룡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 나간다.
‘흥, 애써 태연한 척하는군. 이번 회의가 끝나면 네놈은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뇌 회의에선 의견이 갈리더라도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수뇌 회의는 맹주가 나간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 물론 동석한 은영전주가 모두 맹주에게 보고하겠지만, 그때부턴 의견이 나뉘는 이들끼리 연합하여 줄기차게 싸운다.
하지만 황룡단주는 맹주가 있는 앞에서 단목장룡의 의견을 하나하나 반박할 생각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면 뭣 하겠는가?
경험이 다르다. 이제껏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
“일단 소집령을 내려 전 무림의 힘을 모아 마교에 쳐들어가자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뭣이……?”
그의 논리의 빈틈을 파고들려 준비했던 황룡단주.
갑자기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하자 당황했다.
단목장룡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이야기한다. 그의 시선은 무림맹주를 향했다.
“전 예전부터 마교가 싫었습니다. 평화로운 중원 무림에 갑자기 정면으로 쳐들어와서 수많은 무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무공까지 훔쳐 갔습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찌릿!
황룡단주가 시비를 걸려고 할 때, 옆에 있던 흑룡단주가 허여멀건 눈동자를 굴려 그를 노려본다. 그 기괴하고 무서운 모습에 황룡단주는 입을 닫아 버렸다.
그 틈에 단목장룡이 말을 이어 나간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래 알고 있던 마교와 지금의 마교는 다릅니다. 그들은 무서운 마교도들을 이끌고 보이는 모든 문파를 멸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 양식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단목장룡이 모두를 바라보며 말한다.
“마교가 정파에만 접근했을까요?”
“…….”
은영전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다.
이 부분은 대부분 수뇌가 모르는 사실이다. 어쩌면 마교가 사파에도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정보. 이것을 밝히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전은 완벽해야 했으니까. 은근히 이 부분을 흘리려고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이 부분을 언급한다.
“현 무림은 마교와 무림맹 그리고 사마련의 균형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균형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교와 사마련이 손을 잡고 위아래에서 정파를 합공한다면 과연 정파는 버틸 수 있겠습니까? 황룡단주님께서 정파 세력의 힘이 절정에 달했다고 말씀하셨지만,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황룡단주의 이마에서 주름이 생겨났다.
갑자기 왜 자신을 걸고넘어지는가?
“마교와 사마련 또한 그 힘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아마 무림 역사상 최고겠지요. 그들이 연합을 맺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침묵에 휩싸인다.
하지만 황룡단주는 자신의 의견이 반박당했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단목 조장, 사마련과 마교가 손을 잡았다는 발언을 책임질 수 있는가?”
참으로 치졸한 수법.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책임’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무섭다. 특히 무림맹의 수뇌들 앞에서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훗날 독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이놈, 세 치 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망상을 떠든다고 내가 눈 하나 꿈쩍할 줄 아느냐!’
황룡단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단목장룡이 말한다.
“예,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을 지겠다고……?”
황룡단주는 그가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너무도 당당히 책임을 입에 올렸다. 그 무게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 어려서 그런 것인가?
“말이라는 것은 주워 담을 수 없지 않습니까? 내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것은 아마 저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리라 생각되는군요. 황룡단주게선 어떠십니까? 단주님의 발언에 책임을 지실 겁니까?”
‘이놈이…….’
이제는 모두의 시선이 황룡단주에게 향한다.
몇몇 단주는 고소하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단목장룡을 밀어내려다가 도리어 자충수에 빠졌다. 책임을 진다? 사실 황룡단주는 소집령을 내려 마교에 쳐들어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단목장룡의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기에…….
“나는…….”
책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는 단목장룡과 다르다. 황룡단의 단주였으며, 형산파의 장문인이 될 사내였다.
‘난 네놈과는 책임의 격이 다르거늘……!’
하지만 그도 머리가 있었다.
그것을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때 굳은 표정의 무림맹주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말린다.
“그만하시오. 책임을 운운한다면 모두 제대로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오.”
무림맹주의 말에 두 사람의 신경전이 끝이 났다.
당연히 밀린 쪽은 황룡단주다. 그는 고작 조장 따위에게 밀려 버렸다. 이것은 두고두고 수치로 남으리라.
‘제기랄……. 마교와 사마련이 접촉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내가 그걸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여기서 단목장룡을 몰아세우는 것은 악수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단목 조장, 자네에게 묻고 싶네. 사마련과 마교가 접촉했다고 생각하는 타당한 근거가 있나?”
황룡단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단목장룡은 선선히 대답했을 뿐이다.
“예. 사마련이 개최한 비무 대회에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가면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더군요. 누군가는 그 사람이 사마련주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전 마교도가 아닐까 생각합…….”
벌떡!
은영전주가 저도 모르게 일어선다. 저 정보는 은영전에서도 이제 막 파악했다. 사마련의 비무 대회에 의문의 고수가 등장했다는 것. 그가 어쩌면 마교도일 수도 있다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사마련주의 숨겨진 아들이라? 그런 정보는 은영전주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왜 사마련주에겐 자식이 없지?
왜 이런 당연한 의문을 생각하지 못했지?
은영전주로서 실격이었다.
“…….”
단목장룡과 은연전주의 시선이 부딪친다.
“…….”
은영전주가 말을 하려나 싶어 단목장룡이 침묵했다.
“하하하……. 미안하군. 아무것도 아닐세.”
은영전주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 앉는다.
단목장룡, 그가 비선당을 통해 마교의 정보를 찾아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그가 비선당을 통해 알아내 봐야 얼마나 알아냈겠는가? 노력은 가상하지만, 비선당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무공만 강한 줄 알았더니…….’
단목장룡이 말을 이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