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뭐든지 열심히
정리해 본다.
육합문과 지룡문. 정말 솔직히 말하면 이들이 마교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천마신교는 단지 중원에 씨앗을 뿌렸을 뿐이다. 그 나무가 자라 높이 솟아오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무공의 고수가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언제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하지만 양씨세가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이미 꽤 궤도에 오른 상태다. 거기에 천마신교의 지원을 받는다?
‘껄끄럽겠지.’
거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마련과 천마신교가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면, 확실히 무림의 균형이 무너진다.
‘갈유화에게 서신을 보내야겠군.’
일단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으니 검증을 해야 한다. 암천회의 소회주라면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그녀가 모른다면, 암천회주에게 물어서라도 알려 줄 것이다.
‘당분간은 수련에 열중해야겠어.’
당연한 선택이다.
신교의 정보를 알아낸 것은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그들과 싸울 수 있을까? 아니다. 난 아직 한참 부족하다. 처절한 복수보단 통쾌한 복수를 원한다. 그러려면 본신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힘이 지배하는 무림. 그 누구보다 강해진다면, 많은 선택지가 생긴다.
일단 종이와 먹을 꺼낸다.
‘옥정이에게 맞는 보법부터.’
그녀에게 약조했다.
내일 그녀에게 맞는 보법을 전해 주기로. 시간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옥정에게 무공을 알려 주는 건 다르다.
상상의 힘.
난 상상 속에서 무공을 무한히 떠올려 최적의 경로를 찾아낸다. 그 힘은 나 자신에게만 통용되는 힘이었다. 다른 이들이 주체가 되어 머릿속 세상에서 활보하지 못한다. 하지만 당옥정은 달랐다.
‘어디 보자…….’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무공 구결들이 상상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난 그 세상을 활보하며, 보법의 구결을 살펴본다.
구결은 저마다의 빛을 내며 내게 선택받기 위해 강아지처럼 들러붙는다.
그중 가장 빛나는 보법은…….
‘사사유령보(死賜幽靈步).’
천마신교에서도 특급 살수만 배운다는 보법이었다.
‘여기에 무영혼까지 결합한다면……?’
머릿속의 보이지 않는 안개가 조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 * *
“자자, 살살할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
모용상의 말에 당옥정이 밝게 대답한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선배님!”
“그래, 그래.”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상큼한 과일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사천당문 출신이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아직 미숙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알려 주면 당연히 사랑이 싹트겠지. 그는 오랜 무림 경험으로 여인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친절과 배려.
사내대장부 같은 패기에 끌리는 여인들도 있지만, 당옥정 같은 성향의 여인들은 친절에 녹아내린다.
“난 이번 비무에서 삼 할의 힘만 사용할 것이다.”
“삼 할이요?”
당옥정의 얼굴에 미약한 걱정이 떠오른다.
그것을 본 모용상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하하,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것이냐? 그럴 필요는 없단다. 네가 어떤 공격을 하든 막아 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네게 삼 초를 양보해 줄 터이니 마음껏 공격하거라.”
열린 자세.
당옥정이 보기에 모용상의 지금 자세는 빈틈투성이였다. 그렇다고 당옥정이 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더 긴장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당용아와 비무하며 확실히 느꼈다. 진짜 고수는 빈틈을 일부러 드러낸다.
‘모용 선배님은 대단한 고수신가 보구나.’
당옥정이 검을 꽉 쥔다.
‘일단 적당히 거리를 재야 해.’
그녀가 천천히 다가간다.
일정 거리에 들어가면, 상대의 기감이 피부에 느껴진다. 어떤 무인은 일 장 안에 들어가면 닭살이 돋았고, 어떤 무인은 오 장 안에 들어가면 소름이 돋았다. 전자의 무인은 청룡단에서 만난 선배들이었고, 후자는 사천당문의 내당주인 당용아다.
그리고 어떤 기감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장룡.’
그는 지척에 도달해도, 당옥정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았다.
모용상은 어느 정도일까?
칠 장… 오 장… 삼 장…….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삼 장이라면…….’
전해지는 감각이 조금 약하긴 했지만, 당옥정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먼저 가볍게……!’
적당히 상대와의 거래를 파악한 당옥정.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확 바뀐다. 순진하고 명랑한 눈빛은 사라졌다. 그 악명 높은 사천당문의 무인처럼, 그녀 또한 서슬 퍼런 눈빛으로 모용상에게 접근했다.
쉬이이익-!
당옥정의 검격이 모용상을 노렸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모용상은…….
‘흡……!’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당옥정의 검격은 마치 뱀처럼 미묘하게 비틀리며 다가왔다. 거기다 검에 담긴 힘이 장난이 아니다. 삼 할의 힘을 사용한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본심으로 피하고 말았다.
‘허어……! 사천당문의 검법은 거의 견식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란 말인가? 아무리 절기를 사용했다고는 하나 대단한 위력이군. 당옥정은 훗날 강호에 이름을 날릴 무인이 되겠어.’
그녀를 인정하며, 모용상이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더욱 매력이 있었다. 이런 여인이라면 가르칠 맛이 날 듯하다.
“하하! 실력이 대단하구나!”
“과찬이세요.”
“자,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공격하거라. 네 모든 것을 삼 초식에 담아 펼쳐 보아라!”
늠름한 자세로 어깨를 편 모용상.
그는 당옥정의 검을 받아 낼 준비를 마쳤다. 저게 당옥정의 최선이라면…….
‘삼 할보다는 조금 더 힘을 쓰겠지만…….’
조금 힘을 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유로운 표정의 모용상.
당옥정이 그에게 검을 휘두른다.
카앙! 캉캉!
“옳지!”
모용상이 외친다.
여인들은 늠름하고 여유로운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
그는 그것을 실천하려, 당옥정의 검격을 막아 내며 외치고 있었다.
카아앙……! 까앙! 캉! 캉캉!
“그, 그렇지!”
카랑! 캉! 까아앙!
“크읏……! 조, 좋구나!”
당옥정의 일 초식이 거의 끝날 때 쯤.
모용상은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만만하게 보았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다.
‘실전 경험이 많은 건가? 어찌 저렇게 투로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거지.’
초식의 연계는 환상적이었다. 빨라졌다가 느려지는 공격에 모용상은 적잖이 당황했다. 거기다 검에 실리는 힘은…….
‘이제 막 무림에 온 후기지수가… 이 정도면 대단하긴 하군.’
“하압!”
당옥정은 더 힘을 내서 공격을 시작한다.
비무는 실전을 위한 것.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당용아에게 실전과도 같은 가르침을 받은 당옥정의 살벌한 검격이 모용상에게 들이닥친다.
‘무, 무슨!’
모용산은 그녀가 일 초식에 전력을 펼쳐 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리라.
하지만…….
“크읍!”
모용상은 저도 모르게 단전의 내력을 온몸에 순환시켜, 그녀의 검을 막아 내고 있었다.
카아앙! 캉캉!
“허억!”
쉬이익!
이번 검격은 정말로 위험했다. 까딱 잘못하면 그녀의 검에 베일 수도 있었다.
‘여, 여자가 무슨 힘이……!’
워낙 초식의 연계가 깔끔해서, 이 초식이 끝났는지 삼 초식이 끝났는지 분간이 안 간다. 보통 초식을 나누고 또 나누는 것이 초식을 벗어나는 길이다. 보통 후기지수들은 저렇듯 초식을 깔끔하게 연계하지 못한다.
“크음, 사천당문의 검법이 대단하구나!”
그는 짐짓 당당하게 외친다.
당옥정이 그의 말에 화답한다.
“삼 초식입니닷!”
“뭣?”
거기다 그녀는 이제 막 몸이 풀렸다는 듯, 속도가 더 빨라졌다.
현란한 보법으로 모용상의 중심을 빙빙 돈다. 예리한 검이 갑자기 등을 찌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일 것 같은가?
“이런, 제기랄!”
모용상이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뱉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그녀의 공격을 받아 주기만 해서는 분명히 이번 삼 초식에서 그녀의 검로에 휘말린다. 그것을 깨기 위해선…….
섬광분운검(閃光分雲劍).
모용세가의 절기를 펼쳐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삼 초식을 양보해 준다던 모용상.
그가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지만, 당옥정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방어만 하는 적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앗!”
당옥정의 검격이 더 매서워졌다.
그에 반해 모용상의 얼굴에선 완전히 여유가 사라졌다.
* * *
“허어억! 허억!”
“하아아…….”
비무장에서 두 사람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 모용상은 흠뻑 젖어 한쪽 무릎을 꿇고 검에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당옥정은 살짝 허리를 숙였지만, 땅에 주저앉아 있진 않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비무를 펼쳤다. 모용세가의 검법은 지독할 만큼 빠른 쾌검. 당옥정은 이번 비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선배님, 비무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허억… 큼! 크으음! 그, 그래……! 시, 실력이 대단하구나! 커허읍!”
짐짓 밝게 대답하려던 모용상의 숨이 꼬인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거미줄처럼 얽혀, 혼란이 가득했다.
‘대체 뭐지? 분명… 이십 대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실력을……?’
비무는 당옥정의 패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일검대 대주인 모용상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그녀에게 패배할 뻔했다. 아무리 삼 초식을 양보했다고 하지만, 이런 결과는 절대 예상할 수 없었다.
실전이었다면 달라졌을까?
모용상이 수많은 강호의 경험 덕분에 더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옥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번 비무에서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비무에선 암기가 비겁하게 보이기도 한다. 거기다 검법 수련의 목적이었기에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용 선배님, 비무 감사했습니다!”
“크흠! 그래… 다음에 또…….”
비무하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
저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다른 대(隊)의 대주들이 즐거움이 가득한 채로 웃고 있었다.
‘저놈들이……!’
분명히 저놈들은 당옥정의 실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언질도 주지 않았다.
‘네놈들이 비웃지 못하도록 해 주마!’
이젠 될 대로 돼라다.
그는 진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녀는 예상외로 훨씬 강하다. 역시 용봉지회의 우승자 출신답다. 당옥정에게 더 마음이 간다.
“크음! 옥정아.”
“네, 선배님.”
당옥정이 깍듯한 표정으로 답한다.
확실히 호감이 생겼다고 판단한 모용상이 그녀에게…….
“저녁에 약조가 있더냐?”
당옥정의 입에서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죄송해요……. 오늘은 약조가 있어서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약조가 있구나? 그렇다면 내일 나와 같이 화장 반점에 가서 식사…….”
그때, 그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 자네, 멈추게!
응? 뭘 멈추란 건가?
질투심에 눈이 먼 놈들이.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차지한다!
“…라도 하지 않겠느냐?”
“어? 장룡?”
당옥정의 시선이 모용상의 뒤를 향한다.
그의 뒤에는 단목장룡이 있었다.
‘장룡?’
당옥정이 펄쩍 뛰며 단목장룡에게 달려간다.
모용상에겐 안된 일이었지만, 단목장룡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단목장룡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장룡이 먼저 와 주다니! 신난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모용상.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저 사내는……?’
본 적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무림맹의 장로 위지무외에게 비무첩을 건네던 살벌한 모습을. 처음엔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정도로 너무 버릇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비무하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무인은 결국 무공으로 말하는 법.
신난 당옥정을 적당히 달래 준 단목장룡이 모용상에게 다가온다.
“모용 선배님.”
“예……?”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하는 모용상.
- 우리 옥정이…….
“…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 옥정이’라는 말은 모용상에게만 들리게끔 전음으로 전달했다. 그렇기에 비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청룡단원들은 듣지 못했다. 모용상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답한다.
“벼, 별것 아닙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목장룡이 깍듯하게 예를 차려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모용상도 덩달아 그에게 인사했다.
“가자, 옥정아. 가져왔어.”
“정말? 알겠어! 모용 선배님! 내일 뵙겠습니다!”
“그, 그래…….”
그렇게 단목장룡과 당옥정이 떠나가고.
뒤에서 청룡단의 대주들이 다가온다.
“끌끌, 이 친구 보게. 넋이 나갔구만?”
“내 이럴 줄 알았지. 천하의 일검대주라도 차기 대주 후보 당옥정에겐 힘들었지?”
차기 대주 후보라는 말에 모용상이 깜짝 놀란다.
벌써?
“차, 차기 대주 후보?”
사실 대주들끼리의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당옥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녀는 모든 일에 열성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독(毒)을 다루는 솜씨는 일품. 청룡단의 중요한 인재였다.
“클클, 몰랐나?”
“당연하지! 난 오늘 막 복귀했다고!”
거한의 사내, 패력대의 조장인 팽훈이 공간이 울릴 정도로 호탕하게 말한다.
“껄껄! 근데 이거 큰일이군! 그 유명한 단목 조장에게 눈도장을 콱 찍었으니!”
그의 말에 다른 대주들이 놀리듯 말한다.
“그러게? 임자 있는 여인을 노리는 건 당연히 화낼 만한 일이지, 암.”
“자네, 큰일 났구만.”
다른 대주들은 청룡단 부단주인 남궁휘에게 단목장룡이 어떤 사람인지를 들었다. 하지만 비무만 보고 바로 임무 때문에 무림맹을 떠난 모용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힘내게. 비무첩을 받아도 이기면 되지 않겠는가?”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걸세!”
청룡단의 분위기는, 특히 대주들끼리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평소였다면 장난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모용상이었지만…….
‘크, 큰일이다…….’
과거 크게 망신을 당한 위지무외가 떠올랐기에…….
전혀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본 대주들은 하루 정도는 모용상을 계속 놀려 줄 생각이었다.
* * *
“허어, 이거 참.”
한 사내가 음침한 동굴에 들어와 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여기에 그것의 ‘향’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향은 여기에서 뚝 끊겨 버렸다. 마치 하늘로 솟은 듯이 말이다. 아니, 책들이 가득 모인 방에서 확 흩어졌다. 마치 여기서부터 향을 숨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듯.
“골치 아프게 됐군.”
사내가 한숨을 내쉬고,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금방 결론을 내렸다.
‘뭐, 어쩔 수 없나.’
운명이라면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다.
천상의 별이 그것을 인도할 것이기에.
‘때가 되면 만나겠지.’
사내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았다.
그가 있는 곳은 제운산.
무영신투의 비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