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재회
안휘성.
우리는 제운산에서 떠나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合肥)로 이동했다. 합비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일단은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가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제운산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무영신투의 비동은 확실히 숨어 지내기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궁도들이 당했다는 걸 알게 된 나찰마궁의 본대가 제운산을 샅샅이 뒤진다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비동 내에서만 지낼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나서야 할 터인데, 분명히 꼬리를 잡히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합비로 왔다.
아무리 나찰마궁이라도 합비에 무인들을 보내 위험을 자초하진 않을 것이다. 또 우리는 제운산에서 천응을 타고 날아왔기에 이전처럼 마부에게 정보를 얻어 내 추적할 수도 없다. 천응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이동 경로였다. 누가 하늘을 날아 이동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만약 나찰마궁의 마수가 합비까지 뻗어 오게 된다면,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안휘성의 북쪽으로는 하남성 정주, 그러니까 무림맹이 있으니까.
“꽤 돈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방구는 비동에서 꺼내 온 금괴를 팔아 합비에 있는 장원을 매입했다.
남궁세가의 장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강호 무림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장소라 말할 수 있다.
“괜찮아 보이네.”
“예, 사실 이렇게 빨리 장원 생활을 하게 될진 예상치 못했지만… 막상 장원을 매입하니 뿌듯하군요. 아이들도 좋아하고요.”
저 멀리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그리고 장원 곳곳을 청소하는 노인들도 보인다. 저들은 제운산에서 우리와 함께 빠져나온 노인들이다. 저들이 나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었으니 응당한 보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구는 그들에게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으며, 방구의 장원에서 일하기로 했다.
산에서 평생 약초를 캐며 살아왔기에 약초에 관한 지식이 꽤 있었으며, 관리해야 할 아이가 많은 방구에게도 전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남궁세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남궁세가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언질을 주겠다.”
남궁일몽.
용봉지회에서 이어 온 연으로 맹에서도 함께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가 될 사내이니,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꽤 있으리라.
“사형,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방구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나중에 꼭 갚아라.”
“예, 물론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사형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력을 갈고닦고 있겠습니다.”
“그래.”
아직 방구는 미숙한 무인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영신투라는 별호에 걸맞은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방구.
그가 조금 섭섭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물었다.
“이제 무림맹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방구와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슬슬 전대 맹주를 만나 봐야 한다. 일단은 제갈교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할 생각이다. 그녀를 납치한 배후가 제갈세가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버지인 제갈강량이 그랬다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소영을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소 소저를 처음 봤을 땐 약간 모자란 여인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더군요. 사실 저보다 더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연무장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소영.
그녀에겐 당분간 방구와 함께 장원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 말했다. 사실 그녀가 내 말에 어리광을 부리며 결정에 반대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녀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정신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조만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얼른 기억을 되찾았으면 좋겠군.’
납치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기억을 되찾는 게 가장 좋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무림맹으로 전서구를 보내도록 해라. 합비엔 개방 지부가 있으니 비용을 내면 전서구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사형.”
그 후로도 난 방구에게 여러 가지를 일러 주었다.
하후세가에게 당한 뒤로 여러 가지를 깨달았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 *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
한 명씩 차례로 천응의 등에 타고 이동한다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직 천응이라는 존재를 드러낼 때는 아니라 판단했다. 강호의 격언 중에선 가진 힘의 삼 할을 숨기라는 격언이 있었다.
적절한 때, 천응을 활용하리라.
천응은 무림맹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야산에 있으라 명했다. 말도 알아듣는 영물이니 알아서 먹이를 사냥하며 홀로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드디어 도착했군.’
안휘성 합비에서 정주까지 한 달 정도 소요됐다.
저 멀리 무림맹 정문이 보인다. 걸음을 멈춰 조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러 두었다.
“미리 말했듯, 우리는 제갈교아를 찾지 못한 것이다.”
“예, 조장님!”
조원들이 제갈강량과 만나진 않을 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무림맹의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하니 무림맹에 출입하기 위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방문객이 많은 것 같았다. 무림맹 소속인 우리는 당연히 방문객처럼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단목 조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 알아본 외성 경비대원이 포권지례로 인사했다.
“그래, 고생하는군.”
격려의 말을 건네고 성 내부로 들어가려는데.
외성 경비대원이 모두 우리를 보며 절도 있게 포권 지례를 했다.
“오늘도 강호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맹에 복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편안한 휴식이 되시길 바랍니다.”
“…….”
나를 비롯한 조원들이 멈칫했다.
무림맹에 오면서 저런 거창한 인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 표정을 본 경비대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한다.
“맹주님의 특별 지시 사항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시는 모든 맹원에게 이렇게 인사하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맹주가?
내가 무림맹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꽤 유별나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다.
“처음엔 저희도 어색하긴 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됐습니다. 거기다 무림맹의 일원이라는 자긍심을 높이기도 해서 맹원들에게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나도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맹주가 무림맹의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갈교아를 찾는 임무를 맡기 전만 해도 무림맹 내부 분위기에 실망하여 맹 밖으로 나가 나만의 세력을 구축할까도 생각했었는데, 이렇듯 변화를 추구하는 맹주라면 조금 더 믿어 봐도 될 것 같았다.
“환영해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하하! 그럼 전 이만.”
마지막으로 포권지례를 하고 다시금 자신의 임무로 되돌아간 경비대원.
조원들끼리 눈이 마주친다.
피식,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 오글거리긴 해도 임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확 든다고 할까?
“가자.”
“예!”
우리는 바로 내성을 통과하여 흑룡전으로 향했다.
제갈강량보다 먼저 상관인 흑룡단주에게 복귀 신고를 해야 했다. 흑룡전으로 들어가니 단주가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예를 갖춰 그에게 인사했다.
“단목장룡 외 세 명,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오랫동안 고생했군.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모두 생채기 하나 없습니다.”
끄덕끄덕.
흑룡단주가 흐뭇한 얼굴로 말한다.
“다행이군. 하기야 우리 오 조장이 어디 가서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안 그런가? 껄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 그래. 겸손은 무인의 미덕이지. 전대 맹주께서 맡긴 임무는 잘 수행했는가?”
“아쉽게도 임무를 완수하진 못했습니다.”
흑룡단주가 고개를 갸웃한다.
“자네가 실패했다고?”
“예, 아쉽게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날 위로한다.
“너무 낙담하지 말게나. 실패를 겪어야 성공의 값짐을 깨달을 수 있으니 이번 임무에서 많은 것을 배웠길 바라네.”
흑룡단주는 내가 정확히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모른다.
전대 맹주가 흑룡단주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날 위로하는 흑룡단주를 속이는 것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 확실히 이번 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 이후, 흑룡단주와 대화를 나눈다.
오늘 무림맹에 복귀할 때 들었던 거창한 감사 인사.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흑룡단주는 무림맹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들려준다. 새로이 무림맹주가 된 복마진인은 맹의 많은 것을 바꾸려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언젠간 자네도 맹주님과 대화할 기회가 올 것이네.”
“어떤 분인지 직접 뵙고 싶긴 하군요.”
“곧 만나게 될 것이네. 그분께서도 자네가 전대 맹주님의 임무를 받아 나간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일세.”
현 맹주인 복마진인이 전대 맹주에게 어떤 임무를 받았냐고 날 압박할 수도 있으려나?
당연히 묻는다고 해도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현 맹주님과 전대 맹주님은 사이가 나쁜 편입니까?”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고 있긴 하네만, 실상 그리 나쁘다곤 할 수 없긴 하지.”
“그렇군요.”
흑룡단주가 대화의 마무리를 짓는다.
“내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고 있었군. 전대 맹주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얼른 가 보도록 하게.”
“예, 단주님. 그럼 이만…….”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찰나.
“참, 자네.”
“예?”
“자네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이 있더군. 꼭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게.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하네.”
남궁일몽과 설비연을 말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내게 묘하게 집착하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뭐, 크게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내가 없는 동안 맹 내에서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을 테니 고맙다는 말은 전해야 했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왠지 묘한 느낌의 흑룡단주의 미소. 과거엔 전쟁의 악귀라 불렸다지만, 사실 지금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흑룡전을 나섰다.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제갈강량의 전각.
전대 맹주가 기거하는 곳이었지만 그 규모가 작아 소박하게 느껴졌다. 물론 맹주치고는 소박할 뿐이지, 허름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으음.’
전각의 입구 앞에 잠시 멈춰 선다.
과거 이곳에 들렀을 땐 제갈강량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동시에 난 그에게 감지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무영혼을 익히고,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었다. 스스로 체감될 정도로 크게 발전한 상태.
‘느껴진다, 제갈강량의 기척.’
과거에 그에게 감지당했을 때.
제갈강량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땐, 분한 감정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낄 수 있었다. 제갈강량의 잔잔한 기운을 말이다. 발전하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제갈 가주님, 단목장룡입니다.”
“장룡, 자네……? 안으로 들어오게.”
조금 놀란 듯한 제갈강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흐으음…….’
전대 맹주이자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강량. 그와의 대화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내가 제갈교아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날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날 탓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찾지 못했다면 흥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애초에 찾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내게 부탁한 것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 아예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마음을 접은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고민되는군.’
제갈강량에게 제갈교아를 구해 냈다고 사실을 말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제갈교아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둘 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제갈교아의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진법의 규모를 봐도, 살아 있는 인간의 몸으로 강시를 만드는 것을 보아도 확실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있으리라.
‘그래, 소영의 정신이 빠르게 성숙해지고 있으니… 기다려 보자.’
사실 무림맹에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 굳혀 둔 생각이었지만, 제갈강량과의 대화 후에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딸을 잃은 아비의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순 없겠지만, 제갈교아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니 그가 상황을 알게 되더라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제갈강량과 대화를 마치고, 흑룡전에 도착한다.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 펼쳐진다.
“주……! 조장님!”
“단목 조장님!”
설비연은 저도 모르게 날 주공이라 부를 뻔했으며, 남궁일몽은 승부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두 사람이다.
확실히 두 사람의 기도가, 특히 남궁일몽의 기세가 더 예리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발전한 것처럼, 남궁일몽도 발전한 것이다.
“오랜만이군.”
그렇게 두 사람에게 걸어가고 있을 때.
“장룡!”
뒤편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B22
“너……?”
타다다닷!
그녀, 당옥정이 있는 힘껏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