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236)

* * *

우리는 무한에서 배 하나를 잡아 뱃길을 이용했다.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소영이 있었기에 노숙은 최대한 지양하는 쪽을 선택했다. 또, 이번에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규모가 있는 배를 통으로 빌렸다. 소영의 육신이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하고, 무공을 익힐 마음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손님을 전혀 태우지 않아 넓은 배는 참으로 조용했다.

다른 조원들은 홀로 수련하고 있었고, 난 소영과 같은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씨익.

용봉지회에서 보았을 땐, 음침한 느낌이 들었던 그녀. 정신연령이 어려진 탓인지 해맑기만 한 모습이다.

‘그리고 마냥 어리기만 한 것도 아니야.’

본래 제갈세가의 여식이라 그런지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다. 하나를 말하면 그것만 이해하지 않고, 뒤에 있는 속뜻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그게 보인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다면…….

“우웅? 가가, 팔찌에서 빛이 나.”

“빛?”

팔찌를 보니 전혀 빛이 나지 않았다.

“으응, 그 검은빛이 자꾸 가가 쪽으로 들어가려고 해! 근데 가가 몸의 냄새가 너무 커서 그냥 막 흡수되고 있어!”

기의 흐름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영은 내가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있는 건가.

‘신녀의 자질이라…….’

신기하긴 했다.

또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듣진 않았다.

“그게 나에게 좋지 않아 보이느냐?”

“그건… 가가, 냄새 맡아도 돼?”

기승전냄새인가.

고개를 끄덕이니 소영이 후다닥 달려와 팔찌에서부터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으으흐응…….”

“……?”

갑자기 묘한 소리를 내는 소영.

그녀를 살짝 밀어내니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 여기가 찌릿찌릿…….”

소영의 손목을 잡는다. 해우심법의 기운을 이용하여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운을 씻겨 준다. 그녀는 지금 천향옥로단의 냄새에 중독되어 있었다.

“소영아.”

“미, 미안해요.”

“그래서 어떤 것 같아?”

“좋은 것 같아. 가가의 냄새가 더 진해지는 것 같아!”

“그래?”

“으웅!”

혼의 냄새가 진해지는 건가. 이건 소영이 언젠가 정신을 완전히 되찾게 되는 날 다시 물어보면 될 것이다.

이젠 그녀에게 다른 것을 물을 차례다.

“소영아, 너한테 말할 게 있다.”

“웅…….”

내 진지한 모습에 소영도 단단히 긴장한다. 두 손을 꽉 쥐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영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소리친다.

“배울래!”

사실 그녀에게 무공을 알려 주며 날 배신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영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녀가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배반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는 솔직히 정상이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무공을 알려 주고 배신하면 안 된다느니 강요하는 것은…….

‘건달패나 하는 짓이지.’

내가 소영에게 무공을 알려 주는 게 어떤 결과를 부를진 모르겠으나.

난 순수한 소영의 모습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애초에 인간관계가 그리 시작되지 않는가?

그래도 그녀에게 자극을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열심히 안 하면 냄새 못 맡는다.”

내 말에 소영의 눈에서 의지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 * *

우리는 포양호에서 서쪽 연안으로 항해하여 남창에 도착했다. 뱃길이 잘되어 있는 곳은 상행이 활발했는데, 항구에 내려서니 온갖 상인들과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또 우리처럼 배에서 내리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조장님, 전 먼저 남창의 중심부에 객잔을 잡아 놓도록 할게요!”

조연연이 말한다.

슬슬 우리 조도 저마다의 역할이 정해지고 있었다. 조연연은 정보 수집이나 전령 등의 역할을 자처했다. 경공이라면 셋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새붕 또한 개방 남창 지부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정보 수집은 조연연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거기다 부조장이니 정보에 대한 것은 빠삭해야 한다. 그는 뱃길에서도 여러 종류의 서적을 읽고 공부했다.

마지막으로 단목위는 묵묵히 나와 소영의 곁을 지켰다.

가장 편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단목위는 정파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할 수 있는 곳에서도 경계 임무를 철저히 섰다. 이런 곳에서 긴장을 놓을 리가 없었다.

조금 쉬엄쉬엄하라고 하는 것은, 그의 의지를 꺾는 일이기에 그냥 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소영의 주먹이 꽉 쥐인다. 아마 자신만의 각오를 다지는 중이리라. 정신연령이 어리다고 하여 그녀가 멍청하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며 느낀 건데, 그녀의 머리는 정말 좋았다. 왜 제갈세가 출신인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정말 ‘조직’이 되어 가는 중이다.

여기서 궤도에 오른다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세력이 만들어지리라.

남창의 중심부에 도착하자.

먼저 떠났던 조연연이 우리를 맞이했다.

“조장님, 방 세 개를 잡았어요!”

“그래, 고생했다.”

툭툭.

소영이 내 옆에서 옷깃을 잡아당긴다.

“왜?”

“다음엔 나도 조 언니 따라갈래.”

‘그래도 돼?’라는 표정.

뭔가를 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이다.

“그러렴.”

“으응!”

소영이 참으로 기뻐했다.

의지가 있다는 건 참으로 중요했다.

객잔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새붕 또한 도착한다. 우리는 한 방에 모여 그가 가져온 정보를 얻었다. 하후세가에 대한 정보였다.

“남창에서의 하후세가의 평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관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 주고 있고요. 정말로 무관과 학관을 짓고 있더군요.”

“무영신투에 관한 건?”

“개방에선 진짜로 그를 잡았다고 확신하더군요.”

“그렇군.”

개방이 확신할 정도라.

그렇다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난 무영신투를 구출할 생각이다. 단, 이것은 흑룡단의 임무는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흑룡단의 이름으로 움직인다면 잡음이 생길 우려가 있다.

난 조용히 무영신투를 빼낼 생각이었다.

* * *

어두컴컴한 지하.

두꺼운 철창이 한쪽 공간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창의 안쪽에는 한 사내가 족쇄에 묶인 채로 갇혀 있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진짜 보물이 있는 위치를 말할 생각이 들었나?”

으드득.

사내가 이를 간다. 본래라면 저놈들에게 잡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딴 놈들의 보물 따위는 한나절이면 모두 훔칠 수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무영신투의 제자였으니까. 이름을 완전히 물려받진 못했지만, 사내는 유일하게 무영신투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잡힐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네가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들이 처참하게 죽는 꼴을 정녕 보고 싶나?”

당대의 무영신투 방구.

아니, 구방.

그는 스승의 의지를 받드는 것과 동시에,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고아들을 거두어 키웠다. 그들에게 무영신투의 이름을 강요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라 세상과 마주하길 바랐다.

중원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길로 빠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을 또 이용하는 놈들이 있었다.

“네놈이 그러고도 정파냐.”

“정파? 맞지. 난 정파다. 너 같은 천하의 도둑놈을 잡아 처죽이기 위해서 대를 위한 희생을 감내하는 진짜 정파지. 그걸 몇몇 이들은 악이라 부르더군.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야.”

개뿔.

그게 정파라고?

무공에 재능만 있었다면, 싸우는 방법만 알았다면……!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제기랄…….”

“네게 주었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끝까지 발설하지 않는다면, 하나씩 네 눈앞에서 고문하도록 하지. 아이들은 너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그걸 꼭 기억하도록.”

“씨발, 개새끼야! 그 아이들은-!”

인자한 얼굴의 사내는 구방의 말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모두 도둑놈인 네 탓이다.”

남창의 명가

하후세가.

남창의 중심부에 지어진 하후세가의 장원은 단목세가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그 앞에는 백성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뭘 하는지 지켜보니 곡식이나 육류 등을 받아 나오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이들도 있었으며,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있었다.

하후세가는 차별 없이 평등하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베풀고 있었다. 당연히 바깥엔 그들을 찬양하는 말이 가득하다.

“하후세가 만세!”

“우리 같은 놈들에게도 곡식을 베풀어 주시다니… 정말 성인군자가 따로 없으시구나!”

“학관이 지어지면 글도 알려 준다고 하던데?”

“허허, 하후세가가 협의의 길을 걷는구나. 이들은 강서성의 영웅이야. 백성들을 위한 진정한 영웅!”

“옳소!”

“말는 말이외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후세가를 칭찬한다.

당연히 장원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은, 군중의 칭찬에 몹시 흐뭇한 표정이었다. 하후세가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것이다. 나도 그런 것을 보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난 그들에게서 방구를 구해 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선 내가 나쁜 놈이고, 하후세가가 정의고 협일 것이니.

‘쯧, 전장에 묵혀 둔 돈이라도 꺼내서 하후세가에 줘야겠군.’

난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인간적인 양심이라는 것은 있었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백성들을 챙겨 주는 가문. 그곳의 일을 방해한다면 맘 편히 잘 수는 없으리라. 돈이야 만월에게 받은 것이 넘쳐났으므로 크게 아깝지 않았다. 생각없이 내 전재산을 기부할 것도 아니었고.

단지, 약간의 양심을 지키려는 것일 뿐.

하후세가의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한 한 사내가 말을 건다.

“소협,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가시오. 하후세가는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소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안에 들어가서 직접 말하시오!”

내가 긴장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내의 말에 군중이 얼른 들어가라고 아우성이다. 무시하기도 그래서 하후세가의 정문으로 다가간다. 문지기가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한다.

보통 명문가의 문지기라면 거들먹거리기도 할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곡식을 받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그냥 구경하러 왔습니다. 하후세가가 선의를 베풀고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두 문지기가 서로 시선을 교차한다.

무언가 말을 맞춰 둔 것이 있나 보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잠시 쉬다가 가시지요. 본가엔 명망 높은 식객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좋은 인연을 만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본가와의 연도 생기는 거지요.”

“제가 누군지 묻지 않는 겁니까?”

내 물음에 문지기가 고개를 젓는다.

“허리에 검이 있으신 것으로 보아 무림인이시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무림인이기 전에 같은 백성이 아닙니까? 위험한 일을 벌일 분 같지도 않고요.”

“…하후세가는 대단하군요.”

솔직히 감탄했다.

보통 문지기라면 상부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대부분. 일이 커지면 문지기가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사내는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보인달까? 문지기치고는 아까운 인물이다.

‘하후세가가 문지기까지 이렇게 교육할 정도로 대단하던가.’

내 말에 사내가 고개를 젓는다.

“전혀 대단하지 않습니다. 모두와 함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뿐이지요. 자, 안으로 들어가시면 저 아이가 안내해 줄 겁니다.”

문지기가 손짓하자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소년이 달려온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구나.”

소년을 통해 식객이 모인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엔 이미 술판을 벌이는 자들도 있었고, 탁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 이들도 있었다. 논검으로 무공의 격을 따지는 무인들도 있었다. 참으로 화기애애하다. 단목세가 또한 명문가였지만, 이처럼 식객이 많진 않았다.

강호에선 식객의 숫자와 명성에 따라 그 가문의 평판이 나뉜다고 하는데, 식객으로만 판단하면 하후세가는 이미 단목세가를 넘은 것이다.

명성이 빛바랜 가문이라는 정보가 있었기에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확실히 달랐다.

‘개방의 정보로는 하후세가가 온갖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었나?’

표국, 상단, 전장, 약방, 대장간, 의방…….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업에 손을 뻗은 하후세가. 오대세가나 할 법한, 아니 그들도 버거워할 정도로 많은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실속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하후세가에 와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주가 어떤 인물인지 만나 보고 싶군.’

과거에 나는 사람을 만나길 좋아했다.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우애를 다지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사교적인 목적보다도 향상심이 목적이 되었다. 누군가의 상관이 되고, 책임을 져야 할 자리가 되니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았다.

배울 점이 있다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배워야 한다.

그것이 수장이 해야 할 일이다.

하후세가에 온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으나…….

여유는 있었으니까.

개방의 정보로는 아직 무영신투는 무사하다고 한다.

식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주변에서 감탄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오오오! 남창제일미!”

“뭐시여? 그게 참말이여?”

“허허, 정말 아름답구만!”

하후세가의 식객들이 감탄한다. 순백의 비단옷을 입은 한 젊은 여인이 사뿐사뿐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식객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저 여인은 누굽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옥검수사라는 별호를 가진 중년 사내에게 묻는다. 그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저 여인을 모르시오?”

“예, 남창은 오늘 도착한 것이라서 말입니다.”

“저 여인이 바로 하후세가주의 장녀 하후예민 소저요. 남창제일미라 불리고도 있지. 외모를 보면 알겠지만, 남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 수 있지!”

마치 자신의 자랑인 듯 어깨를 으쓱하는 옥검수사.

대부분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또한 어떤 식객이라도 예를 갖추었다. 무림에서 딱히 명망이 높지 않은 무인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식객들과 인사하던 남창제일미 하후예민이 나와 옥검수사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옥검수사 대협, 강녕하셨나요?”

“난 언제나 강녕하지! 오랜만에 객당에 오는구려.”

“자주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요즘 무공을 수련하느라 바빠서 말이에요.”

“오호, 만약 이 옥검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비무 정도는 몇 번이고 도와줄 수 있소이다.”

“어머나, 말이라도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폐를 끼칠 수야 있나요. 모두 하후세가의 손님이신데요.”

“클클, 우리는 하후세가의 밥을 빌어먹지 않소? 전혀 폐가 아니니 내킬 때 말하시오.”

“네,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옥검수사와 인사를 나눈 하후예민.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어, 새로이 본가에 객으로 오신 분인가요?”

“예, 오늘 처음 하후세가를 방문했습니다.”

“반가워요. 전 하후세가의 하후예민이라 해요. 언제까지고 본가에 머무셔도 된답니다. 만약 본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편히 말씀하시고요.”

“그리 말씀해 주셔서 반갑습니다.”

“으음, 그런데…….”

그녀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혹시 예전에 저와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칠칠치 못하여 공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을까 걱정되네요. 왠지 공자님의 얼굴이 낯이 익어서 말이에요.”

“처음 보는 겁니다.”

뭐, 내가 단목장룡이 되기 전에는 그녀와 연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정말 다행이에요!”

밝게 미소 짓는 하후예민.

그녀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주변 사내들의 질투심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하후예민은 이곳에서 공주나 다름없었다. 식객들이 그녀를 대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공자님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장천입니다.”

굳이 내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난 방구를 구출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방구가 사라지고, 나까지 갑자기 사라지면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뭐, 날 범인으로 몰더라도 크게 상관없긴 했지만 말이다.

“아, 장 공자님이셨군요. 혹, 하후세가의 내부 규칙은 들으셨나요?”

“아뇨. 이제 막 들어와서 말입니다.”

“본래 본가의 식솔들이 설명해 줘야 하겠지만, 다들 곡식을 나눠 주느라 바빠서 말이에요. 식객분들이 도와드리고 있긴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내가 하도록 하겠소!”

옥검수사가 나선다.

그러자 하후예민이 그럴 순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옥검수사 대협, 정말 죄송하지만…….”

“하하! 농이요, 농. 하후세가의 사람이 직접 가문의 규칙을 알려 줘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소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하후예민이 깊게 허리를 숙인다.

예의범절이 확실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본래 명가의 자제가 저리 허리를 숙이기가 쉽지 않다. 보통 이 정도 규모로 가문을 키웠으면 몸이 뻣뻣해지기 마련이었다.

‘겸손이 미덕이긴 하지.’

하후예민이 날 보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가문의 장원을 안내해 드리면서, 규칙을 알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장원을 둘러보며 방구가 대충 어디에 갇혀 있는지 찾아볼 겸 들른 것이다. 그녀가 안내까지 해 준다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조금 미안한 감정이 일긴 했으나, 미안하다고 내가 계획했던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후예민과 함께 장원을 거닐고 있으니 시선이 집중된다.

“불편하신 것은 아니시죠?”

“괜찮습니다. 하후세가의 공녀께서 장원을 직접 안내해주 신다니 조금은 부담되긴 하지만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으세요. 하후세가가 크게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저 또한 한참 부족하고 또 부족한 여인인걸요.”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여인이라.

나쁘진 않았다. 당연히 이성적으로 좋게 본다기보다 사람으로서 좋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여기는 곡식을 쌓아 두는 창고예요. 사실 쌀은 오래 보관할 수 있긴 하지만, 육류나 과일 등은 빨리 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육류나 과일을 보관하는 곳은 저어기 지하에 땅을 파서 만들어 놓았답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배포하기 위해서 만든 창고로군요.”

“네, 아버지께선 많은 것을 베풀고 싶어 하신답니다. 아버지 또한 강호에서 받은 것이 많다고 하셨지요. 저 또한 그것에 감명받아 배우려 하고 있고요.”

그녀는 의지를 다지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내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다른 곳으로 날 안내했다.

“이곳은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서책을 읽도록 가르치는 학당이에요.”

입으로는 말을 쉽게 내뱉지만,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글이다.

“이 학당이 좁아서 학관을 짓는 겁니까?”

“네! 알고 계시는군요!”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외친다.

뭐, 남창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예,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관뿐 아니라 무관도 지을 생각이에요. 글도 좋지만, 강호에선 검이 앞서기 마련이죠. 모두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을 주자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에요. 다른 이들이 강해진다고 경계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하셨지요.”

“좋은 생각이로군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예, 실천하긴 정말 어렵죠. 사실 강호에서는 아무에게나 무공을 알려 주지 않잖아요? 저도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그로 인해 세가가 커져 가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알게 되더라고요.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요. 다수가 행복하면 소수까지 덩달아 행복해진다고요.”

방구를 납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실 하후세가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무영신투는 악랄한 도둑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설마 이 모든 걸 무영신투의 보물로 한 것은 아닐 테고…….’

처음에도 조금 그러했지만, 하후예민과 대화할수록 더욱 양심이 찔렸다.

그렇게 하후세가에서 식객이 지켜야 할 내용들을 들으며, 장원을 돌았다. 이제는 장원의 끝부분에 도달했다. 이곳엔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이 있었다.

“여기까지 보여 줘도 되는 겁니까?”

“제 느낌이지만… 공자님은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는 하후예민.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대놓고 표현하진 않는다. 어차피 내일이면 여길 뜰 예정이었으니까.

‘으음, 어디 보자……. 혹시 저긴가?’

저 멀리 작은 전각이 보인다.

다른 전각과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까?

“저긴 병기고입니까? 왠지 철 냄새가 나는 듯한데요.”

“아, 철… 냄새요?”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후후, 아니에요. 저긴 백성들에게 신선한 고기를 가져다주기 위한 도축장이랍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하후예민.

“그렇습니까?”

“자, 장원은 모두 안내해 드렸어요. 고생하신 우리 장 공자님께 제가 손수 차를 대접해 드리겠어요! 아, 혹시 차를 안 좋아하시나……?”

“예, 가끔 즐기긴 합니다.”

“정말요? 다행이에요. 그럼 가요!”

그녀가 명랑하게 말한다.

난 도축장이라 말한 곳을 슬쩍 바라본 후, 하후예민을 따라갔다.

하후가의 여식

하후세가.

꿈이 많은 이들은, 스스로 더 발전하려 노력한다. 하후세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가이지만 무공뿐 아니라 학문까지 공부했다. 참으로 많은 서책을 읽었다. 도가, 불가 그리고 속세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역사를 토대로 발전했다.

선조들의 가르침을 발판 삼아 하후세가는 높이 오르려 했다.

비상한 포부를 품고, 세상에 소리를 냈다. 희망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만, 그러한 꿈을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후세가는 몇 번의 커다란 좌절을 겪었으며, 다른 세력과의 갈등 때문에 많은 것을 내주어야 했다. 심지어 가문이 몰락할 뻔한 큰 위기도 겪었다.

하후세가를 이끄는 가주 하후광은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또 성장했다.

하지만 그 성장이 언제나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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