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36)

* * *

뚜벅뚜벅.

비화 표국의 깃발이 보인다. 거센 바람에 힘차게 흩날리는 것과는 반대로, 비화 표국주 백자강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처음엔 녹림과의 일이 평생에 한 번 오기도 힘든 기연임을 알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의창현으로 향하던 본연의 목적을 떠올렸다.

‘청야야…….’

그는 단목청야의 외가의 힘을 보여 줌으로써 단목세가의 장로들과 가주를 설득할 셈이었다. 돈을 달라면 줄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그 돈은 자신의 손자인 단목청야가 갖게 될 것이므로. 돈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목격하고 말았다.

‘왜… 단목장룡이라는 이름이 강호 무림을 진동케 했는지 알겠구나…….’

동방강수와의 대립을 보면서도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표국주의 자질이 없는 것이리라. 처음 그가 단목장룡인 것을 몰랐을 땐, 괜한 객기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정체를 알고 나서도 왜 저럴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난 뒤.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릇이 다르다.’

단목청야.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다. 무공의 재능도 뛰어났으며, 정치적인 역량이 뛰어났다. 하나를 말하면 셋을 아는 손자. 그는 대외적으로 말썽을 피운 적이 전혀 없었다.

‘달라. 그 아이는, 아니 단목장룡은… 청야가 경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나가고 있다.’

처음 딸 백예령의 서신을 받았을 땐, 자신감이 있었다.

청야를 밀어줄 자신감이 말이다.

솔직히 동방강수에게 사과를 받아 낼 때까지만 해도, 약간 그런 희망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보고야 말았다, 동방강수와 단목장룡의 비무를.

‘…….’

동방강수는 자신의 친우가 되려면 힘을 증명하라고 했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합을 나누었다.

지금도 그 비무를 떠올리면 오금이 저린다. 손짓으로 사람을 태워 죽인 녹림의 대호법과 그에 전혀 밀리지 않는 단목장룡. 단목세가의 후계자 자리는 일개 표국에 불과한 비화 표국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비화 표국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찼던 백자강이었지만, 이제는 일개 표국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미안하구나, 예령아.’

후계자 자리는 어떠한 오해의 소지도 없이.

깔끔히 포기해야 할 것이다.

* * *

형문산채가 보인다.

이제는 친우가 된 동방강수가 산채에 초대한 것이다. 앞서 산을 오르던 동방강수가 날 바라보며 말한다.

“넌 다른 정파인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정파와 사파나 결국 사람이 아닌가?”

내 두루뭉술한 대답에 동방강수가 피식 웃는다.

“그것도 그렇군.”

단순히 제갈교아에 대한 것만 물어도 되겠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동방강수는 확실히 인물이다. 무공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남달랐다. 현 녹림의 성장에 그가 있다는 걸 잠깐의 대화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연을 맺어 놓는다면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

‘여기선 제갈교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려나.’

녹림의 산채는 처음 와 보는 것인데, 꽤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어가지.”

“그래.”

대호법 동방강수

“어엇……!”

형문산채에 들어서자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든 사내가 날 보고 펄쩍 뛴다. 눈에 익은 사내였다. 성성루에서 만났던 녹림도였다. 천향을 내놓으라니 뭐니 헛소리를 했었던가? 당연히 녹림의 대호법인 동방강수가 눈앞에 있었기에 놀라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강수의 예리한 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라지?”

“그게…….”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동방강수.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의창현에서 널 때린 사람이 이 사내인가?”

“그, 그렇습니다!”

기대 반 두려움 반.

아마 기대는 동방강수가 날 교육해 주길 바라는 마음. 대호법과 성성루에서 자신을 폭행했던 사내가 같이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이리라. 동방강수는 슬쩍 날 바라본다.

“이것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할 것 같군.”

“괜찮다. 녹림도를 폭행한 우리 쪽 잘못도 있으니까. 쌍방 과실로 하지.”

“…고맙군.”

“…….”

나와 동방강수가 태연히 대화를 나누자 사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리 겁먹을 필욘 없다. 하지만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난 여인을 뇌물처럼 받지 않으니까.”

“예… 예엣! 죄, 죄송합니닷!”

군기가 바짝 든 상태로 소리치는 사내.

아마 형문산채에서 대호법이 방문하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요량으로 천향을 데려오려 했던 것 같았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확실히 동방강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녹림도는 아닌 듯하다. 명문가를 이끄는 수장의 기품이 흘러넘친달까. 또 ‘동방’이라는 흔치 않은 성씨를 보건대 명문가의 출신이 아닐까 싶었다.

“저녁은 먹었나?”

“먹긴 했는데, 의창현에서 달려왔더니 출출하긴 하군.”

내 말에 동방강수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렇군.”

표정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가늠이 되질 않는다. 다만, 의심이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산채 아래서 비무한 이후 그와 나는 서로를 인정했다. 우연히 만나 합을 나누고 친우가 된다는 이야기는 무림에서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내겐 신선한 경험이긴 했다.

동방강수를 따라 형문산채의 중심부로 향했다.

형문산채주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동방강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채 아래서 그가 내공을 담아 외친 것을 똑똑히 들은 모양이다.

“일어서라. 아랫것의 잘못은 상관의 잘못이지. 하나, 나 또한 그의 상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를 벌하지 않겠다. 다만, 다음부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라. 녹림이 생존하기 위해선 규율을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예, 예엡! 가, 감사합니다! 규율을 달달 외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며칠 내로 시험을 보도록 하지.”

“……!”

깜짝 놀라 입을 벌리는 형문산채주.

아마 달달 외우겠다는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사내는 단목장룡. 내 친우가 되기로 했다.”

“다, 단목장룡이요……?”

“…….”

동방강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러자 형문산채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동방강수의 주변에 미약한 열기가 치민다.

“죄송합니다!”

“넌 대호법의 친우를 그리 함부로 부르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단목 대협!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땅바닥에 퍽― 소리가 나도록 엎드린 채주.

내 이름을 그냥 불렀다고 딱히 화가 나진 않는다.

“괜찮다.”

“가, 감사합니다……!”

동방강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말한다.

“내 방에 있을 테니 요리를 내와라. 술은 마시나?”

“즐기진 않아.”

“그래? 그럼 술은 가져오지 말도록.”

“아, 알겠습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본래 채주의 방이었던 모양인데 꽤 구색을 갖춰 놓고 있었다. 나와 동방강수는 탁상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아 눈을 마주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말해.”

“형문산에 온 것은 기루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나?”

“아예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피를 볼 생각까진 없었다. 또, 녹림도들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고 말이야.”

“물어볼 것?”

때마침 형문산채의 녹림도들이 커다란 대접에 음식을 내온다. 거의 고기 위주의 요리들이었다. 노린내가 조금 나긴 했지만, 이런 환경에서 요리다운 요리를 기대할 순 없으리라. 그들은 감히 동방강수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얼른 그릇을 올려놓고 떠나갔다.

“녹림도들은 널 많이 두려워하는군.”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공포는 제어를 위한 최적의 수단이니까. 녹림도가 워낙 많지 않나?”

“맞는 말이군.”

제왕학을 배운 것일까.

단순한 녹림도라면 저리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무튼, 녹림에게 물어볼 것이 무언가?”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동방강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지. 나도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출출해.”

느긋하게 삶은 돼지고기를 뜯으며 생각한다.

처음엔 녹림에 와서 적당히 채주를 어루만져(?) 주면서 제갈교아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내는 고작해야 한 산채의 채주가 아니다. 칠십이 채의 주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내.

아마 사마련에서도 그의 입김은 상당하리라.

제갈교아의 실종이 사마련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갈지 고민이었다. 아무리 비무로 서로를 인정하고 친우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동방강수가 말한다.

“날 경계할 필요 없다. 난 진심으로 널 인정하고 있다. 너와 척을 지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도 잘 알고 있지. 진정한 친우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세월도 동반되어야 한다지만, 난 그 세월에 올라탈 생각이다.”

뭐, 이제까지 개방이나 하오문에서도 실종된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많았다.

내가 찾는 대상이 제갈교아라는 것만 밝히지 않으면 된다.

“난 사람을 찾고 있다. 호북성에서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거든. 하남성에서부터 호북성 의창현까지 내려오며 납치 사건이나 실종 사건을 모두 파헤쳐 보았지만, 아직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녹림이라면 이 일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방강수가 작게 두 번 고개를 끄덕인다.

“흠, 그렇군. 그래서 너에 대한 소문이 호북성에 퍼졌던 것이군.”

“내 소문?”

“정파 최고의 인재가 협의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문 말이다. 솔직히 그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콧방귀를 꼈지. 네 앞에서 말하긴 그렇지만, 솔직히 정파인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진 않거든.”

사파인이라면 당연히 그러하리라.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네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하자면, 의심하는 장소가 있긴 하다.”

“음? 의심이 가는 장소?”

조금은 의아한 답이다. 납치나 실종에 대한 사건을 물었는데, 장소를 말하고 있었다.

“미리 말해 두자면, 녹림은 타인을 납치하거나 하여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녹림을 멸망으로 이끌 것을 잘 알고 있거든.”

그건 거짓이 아니다.

동방강수는 오늘 모사일이라는 녹림도를 산 채로 태워 버림으로써 녹림이 나아가는 방향이 어떠한지 명확하게 보여 줬다. 녹림 칠십이 채가 정확한 기준이 없이 마구잡이로 통행세를 뜯어내다 보면 불만이 쌓인다. 표국이나 상단들은 녹림이 무서워 당장 통행세를 낼지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녹림을 ‘적’으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

정사 간의 조약도 영원한 것이 아니니.

아마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녹림이 토벌되리라.

동방강수는 그 부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난 직접 칠십이 채를 돌며 그들이 규율이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오늘처럼 허튼짓을 벌이는 형제를 벌하고 있지. 형문산으로 오기 전에 확인했던 곳이 바로 천자산(天子山)이다.”

“천자산?”

“천자산채가 있는 곳이지. 그리 큰 규모의 산채는 아니지만, 규율을 꽤 잘 지키는 산채였다. 형문산채보단 훨씬 나았어. 아무튼, 그곳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장소라고?

동방강수의 실력이라면 드높은 절벽도 타고 오를 수 있으리라. 뭐, 그것도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긴 하겠지만 그 정도의 고수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라 말한다면…….

“진법이로군.”

동방강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천자산의 봉우리엔 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종류는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실 강제로 뚫으려 했다면 들어갈 순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법이 있다는 것은 그곳으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테니까. 난 녹림 전체의 생존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천자산의 비밀을 캐내다가 녹림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오늘 그가 비화 표국이나 내게 사과했던 모습을 상기하면, 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 아니, 찾더라도 감히 진입할 수 없는 곳. 너 정도 실력자가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호북성과 호남성의 접경 지역에 천자산이 있었다.

그리고 의창현에서 천자산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호북성에서 제갈교아가 실종됐다지만 다른 지역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으니까.

“좋은 정보군.”

내 대답에 동방강수의 표정에 약간의 걱정이 떠오른다.

“내가 말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그곳에 가는 건 말리고 싶긴 하군.”

“왜지?”

“강호엔 괴물이 많거든. 너 또한 그 괴물 중 하나이긴 하지만…….”

피식.

“친우에게 괴물은 심하지 않나? 그리고 너 또한 그런 종류가 아닌가?”

동방강수.

짧은 시간 합을 나눈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진짜였다. 염공(炎功)계에선 아마 최고의 재능이 아닐까? 무림에선 태어날 때부터 음양오행 중 하나에 치우치게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 하늘이 내려 준 재능. 정확히 말하자면 무공의 재능이라기보단 자연의 축복을 타고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하, 그것도 그러하군.”

작은 웃음이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혹시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중원에서 누군가를 납치하는 건 흔한 일이지. 그 외에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만한 정보는 없는 듯하군.”

“고맙다.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뜻밖의 수확을 올렸군.”

“수확이라… 그랬으면 좋겠군.”

그 이후에 우리는 납치나 실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정파나 사파같이 기준을 나누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공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무(武)를 갈고닦는 무인이라면, 그것이 당연하리라.

* * *

선언.

앞으로 녹림은 단목세가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부딪치지 마라. 대호법의 말이었으니 감히 어떤 녹림도가 그의 말에 토를 달 것인가? 하지만 형문산채주 무보진은 의아할 따름이다. 녹림에서 대호법을 추앙하는 데에는 다 그러한 이유가 있다.

그가 뭐가 아쉬워서?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단목장룡을 신경 쓰는가? 친우가 되었다고 해도, 애초에 대호법의 나이가 더 많지 않은가?

“의문스러운 표정이군.”

“아, 아닙니다!”

“명확히 뭐가 의문인지 거짓 없이 고하라.”

녹림에서 대호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채주 무보진이 조심스레 생각을 털어놓는다. 당연히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끔 최대한 조심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대호법이 피식 웃는다.

“무보진, 네 의문은 정당하다.”

“가, 감사합니다……!”

“강호는 넓다. 사파에도 정파에도 고수는 많지. 하지만 ‘진짜’는 보기 드물다. 사파에서 내가 인정하는 인물은 세 명 정도 있지. 사마련주와 암천회주 그리고 혈세귀막주.”

그들은 사파 무림에서도 절대자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 말씀은…….”

“그래, 그는 내가 언급한 사내들과 나란히 설 인물이다.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 않는군.”

동방강수의 머릿속에 그와 손속을 나눴던 때가 떠올랐다.

솔직히 등골이 오싹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 그의 몸에서 풍겨 오는 기묘한 향. 모든 것이 그의 잣대를 넘어섰다.

“……!”

단목장룡의 나이가 고작해야 이십 대 초반이라 들었다.

이게 말이 되나? 그렇다고 대호법이 거짓을 말한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이다. 나도 여기서 만난 것이 행운이라 느껴질 만큼 말이다.”

신분이 어떻고 나이가 어떻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중원 무림에 커다란 폭풍을 몰고 올 사내였다.

꿀꺽…….

채주 무보진은 대호법의 말을 본능에 새겨 넣었다.

대호법의 말은 녹림도들에게 세상의 진리나 이치나 다름없었으니까.

‘다, 단목세가와는 절대 부딪치면 안 돼.’

이러한 생각은 형문산채를 넘어 칠십이 채로 뻗어 나가리라.

* * *

까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악!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천자산 주변으로 날아간다. 어떤 지역에서는 길조의 의미로도 여기고 있긴 하지만, 천자산 하부에 터를 잡은 백성들은 그 까마귀를 두려워했다.

“처, 천지신명이 분노하셨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까마귀 떼가 천자산으로 향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들어가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천지신명의 분노가 마을까지 닿지 않기를 기원하며.

각오는 되었느냐

단목세가.

첫째 부인 백예령의 든든한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비화 표국의 백자강이 장원의 앞에 섰다. 그 뒤로 언제 봐도 늠름한 표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기립해 있다. 왠지 모르게 표사들의 표정이 의기소침해 보였지만, 급히 의창현까지 오느라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라고 백예령은 생각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몸소 마중을 나온 백예령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던 백자강이지만, 어젯밤의 기억에 다시금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래, 예령아. 잘 지냈느냐? 오랜만에 보는구나.”

“죄송해요. 제가 자주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네가 죄송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가주를 보필하느라 바쁜 것을 뻔히 아는데 말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느라 피곤하시죠? 안으로 들어가요.”

“그러자꾸나.”

백자강이 그녀를 따라 들어간다.

“표사분들이 묵을 방은 다 준비해 놓았답니다. 요리도 준비해 놓았으니 출출하신 분들은 시비들에게 말씀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표사들이 우렁차게 외친다.

백예령은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이다. 자그마치 표국주의 딸이었으니. 더군다나 단목세가의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야 한다. 그런 표사들의 위세를 보며 백예령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녀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비화 표국엔 일 급 표사가 고작 다섯이었다. 이제는 하북성 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엔 단목세가의 힘이 컸지만 말이다. 어차피 단목세가에도 비화 표국은 큰 도움이 된다.

소위 명문가라 불리는 곳은 중원에서 많은 사업을 벌이곤 하는데, 표국도 그중 하나였다. 중원 삼대 표국이라 불리는 곳들은 전부 오대세가와 깊은 연이 있었다. 비화 표국이 삼대 표국에 들어가거나 사대 표국으로 그 명칭이 바뀐다면, 단목세가도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

영광은 백예령의 아들인 단목청야가 차지하리라.

그녀는 그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단목청야의 비상함을 알아챘다. 그는 분명히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리라. 더군다나 지금은 들어가기 어렵다는 호법당에 당당히 들어갔다. 오로지 본인의 실력으로 말이다.

‘그리고 난 오대세가의 안주인이 되는 거지. 후후후!’

그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오대세가는 단순히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꿈은 크게 꾸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설령 오대세가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단목세가는 비화 표국과 함께 빠르게 성장하리라.

일단 단목청야가 후계자로 선정되는 게 먼저였다.

부푼 꿈을 가지고 있는 딸이 행복해하는 표정에 마음이 쓰린 백자강.

‘그래, 일단 휴식을 취한 후에 예령이에게 말해야겠어.’

단목세가로 오며 생각했던 것. 단목청야는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똑똑히 알려 줘야 했다. 당연히 자신의 손자가 후계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단목장룡과 경쟁하면 분명히 단목청야가 망가진다.

그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비화 표국은 부질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개미가 인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이러할까? 마음이 공허해진다. 잠이라도 한숨 푹 자고 나면 나아지리라.

백예령은 당장이라도 아버지와 가주 단목무광을 만나게 하고 싶었지만, 백자강의 표정이 너무도 피곤해 보였기에 별말 하지 않고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후우우…….”

방에 들어간 백자강은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끝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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