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하. 형제님들, 이번 표물은 그리 값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표물을 직접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사내. 비화 표국의 총표두인 장춘만이다.
아무리 형문산채에서 땀내 나는 사내들과 어울렸던 주충이라 해도 총표두 장춘만의 근육과 마주하자 평소대로 통행세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크으음, 잠시만 기다려라! 형님……? 어찌할까요? 그리 비싼 게 아니라는뎁쇼.”
주충의 말에 오늘 통행 관리 담당인 모사일이 코를 킁킁대며 걸어왔다. 어릴 적부터 시궁창에서 살아온 인생이라 코에 밴 냄새를 빼려는 버릇이었다. 그 모습이 웃기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얼굴의 흉터를 보면 대부분 눈을 내리깔리라.
“크응크응, 뭐? 이렇게 많은 표사들을 대동하면서 비싼 게 아니라고? 누굴 호구로 아나!”
“형제님, 오해가 있으십니다. 이번 표물은 작은 약방의 의뢰품입니다. 직접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맞다.
본래라면 삼 급 표사 다섯 정도에 쟁자수 열 명으로 인원이 꾸려졌으리라. 하지만 표국주 백자강의 명령에 비화 표국의 최정예가 이번 표행에 달라붙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형문산채가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은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의도에서 의창으로 최대한 빠르게 가려면 이 길이 최선이었다.
보통 녹림은 머릿수대로 통행세를 책정했지만, 요즘 형문산채를 통과하는 상행이나 표행이 확 줄어 수익이 전체 산채 중 최하위였다. 녹림 본산에 매달 거금을 상납해야 하는 형문산채의 입장으로선, 이번 표행이 봉이라 할 수 있었다.
녹림의 규율에 조금 어긋나지만 어찌하겠는가?
형문산채주가 노발대발하며 돈을 벌어 오라고 윽박질렀던 것을.
넓게 상황을 본다면, 본래 받던 통행세만 받으면 되겠지만.
이들은 당장 욕을 먹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지랄하네! 응? 내가 산에만 박혀, 크응! 있다고 병신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작은 약방이 의뢰를 맡겼는데 이렇게 많은 표사를 대동한다고? 크응! 내 장담컨대 이번 표물은 최소 영약이 분명하다! 크으응!”
단호하게 외치는 모사일.
“…….”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는 총표두 장춘만. 그들을 형제라 부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돈 뜯어먹는 산적 놈들이라 생각 중이다. 표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놈들이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
“본래 표물의 값어치는 상관없이 인원수대로 통행세를 책정하지 않습니까?”
총표두 입장에선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아무리 급히 가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놈들에게 거금의 은자를 내어 주기란 아까웠다. 거기다가 이번 표행엔 사소한 지출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비화 표국주 백자강도 함께였다. 여기서 녹림도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된다.
“크으응! 갑자기 인원수를 언급하는 걸 보니 비싼 표물이 분명하다! 크응!”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사일이다.
그는 통행세를 잔뜩 뜯어내고, 채주에게 보고를 올릴 생각만 가득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근육과 얼굴의 흉터로 드러나듯 총표두 장춘만은 한 성깔 한다.
하지만 꾸역꾸역 참아 내고, 대화로 풀어내려 한다.
“형제님, 우리 비화 표국은 형문산채와 긴 연을 맺어 왔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번 표행이 마지막이 아닌데 좀 봐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만약 형문산채 하나라면 뒤에서 대기하는 표사들로 싸움을 걸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녹림이라는 세력은 너무도 거대하다. 비화 표국은 호북성을 넘어 중원 전 지역에 지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원 삼대 표국도 녹림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판국이니 비화 표국으로선 녹림과 척을 질 수 없었다.
장춘만이 저자세로 나오자 모사일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솔직히 그도 장춘만이라는 놈과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뒤에 있는 표사들의 숫자도 장난이 아니다. 이런 대규모의 표행은 쉬이 볼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은 ‘녹림’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빤히 보인다.
“크으응! 먼저 거짓을 고한 것은 비화 표국이 아니냐! 크으응! 어디서 우리 잘못으로 넘기려고! 킁!”
저 콧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코에 주먹을 꽂고 싶은 마음을 장춘만이 겨우 참아 내고 있을 때.
“그만하지, 장 표두.”
“표국주님……!”
표국주라는 말에 모사일이 고개를 갸웃한다.
늙은이가 비단옷을 차려입고 있기에 의뢰를 맡긴 약방의 주인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비화 표국의 주인이라?
‘흐흐흐… 이거 단단히 챙길 수 있겠어.’
그는 채주에게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돈 머리만 굴러가고 있었다.
“그럼 통행세를 얼마나 내면 되겠소? 우리 비화 표국은 녹림의 형제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싶지 않소.”
비화 표국주의 결단.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얼른 돈이나 주고 빠져나가자는 생각이다.
하지만 백자강은 모사일의 욕심을 우습게 보았다.
“금자 석 냥!”
“무슨!”
“…….”
백자강 또한 작게 입을 벌린다.
지금 저 산적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금자 석 냥? 머리가 제대로 돈 건가? 아무리 요즘 녹림의 기세가 무섭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감히 본채에 거짓을 고한 죄! 우리는 표국주의 머리를 금자 두 냥으로 한다-! 크으응!”
당당히 외쳤던 모사일이지만, 저들의 표정이 당황과 분노로 물들자 그래도 조금 겁나긴 하는지 말을 보탠다.
“크으으응! 지금 형문산채엔 대호법께서 와 계시다! 크응! 통행세를 내지 않고, 우리 형제들과 싸울 생각이라면 접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호법……!”
그 단어에 비화 표국주를 비롯한 모두가 경악한다.
표행으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지금의 녹림을 만든 괴물 중 괴물. 소문으로는 인간의 눈알을 파먹는 괴물이라 했다. 또 어떤 소문에선 피를 보기 싫어하는 성인군자라 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든 간에, 지금 녹림이 성세를 누리는 이유 하나를 꼽자면 그가 거론된다.
그런 대호법이 형문산채에 있다고?
모사일이 왜 허무맹랑한 통행세를 외쳤는지 이해가 갔다. 그가 있다면, 비화 표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하는 상대였다.
“어떠냐! 무섭지! 크응! 그러니 고이 통행세를 내놓고 가라! 감히 본채에 거짓을 고한 죄다! 크응크응!”
- 표국주님…….
- …….
비화 표국주가 장춘만의 전음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손자인 단목청야를 지원해 주러 가다가 비화 표국 전체가 몰살하는 수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호법이라니… 사실 대호법이 없었더라도 형문산채와 무력 다툼이 벌어지진 않았을 테지만, 이젠 따지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후우우우… 금자를 내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
강호는 약육강식. 비화 표국이 약한 게 아니다. 중원을 진동케 하는 삼대 표국들도 대호법의 이름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으리라. 저 더러운 콧소리를 킁킁대는 놈이 거짓을 고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비화 표국의 정예는 이 자리에서 모두 목숨을 잃으리라.
그렇게 되면 정파 무림에서도 녹림에 압박을 가할 테지만, 이미 그들은 죽고 사라진 뒤다.
희생양이 될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
총표두 장춘만이 그렇게 피 같은 금자를 내어 주려 할 때였다.
뚜벅뚜벅.
찬란한 달빛을 받으며,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게 다가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금자에 눈이 먼 녹림도.
금자를 뺏겨 피눈물을 흘리는 비화 표국.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사내가 두 진영 사이에 도착했을 때였다.
“크응? 네놈은 누구냐?”
“나 말인가?”
사내가 미소 지었다.
* * *
단목장룡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녹림에게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온 것이다. 혹시 녹림이라면, 제갈교아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기에. 다짜고짜 녹림도를 패서 정보를 뜯어낼 생각까진 아니었다. 처음엔 적당히 대화를 통해 풀어 갈 생각이었지만…….
상황을 보다 보니 단목장룡에겐 더없이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호에선 명분이 중요하다.
사람을 죽여도, 살인마로 불리느냐.
협객으로 칭송받느냐는.
명분의 차이였다.
녹림이 최근 세력을 확장하게 된 배경은 적당한 통행세에 있었다. 산채마다 일괄된 통행을 거둬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물론, 정파에서는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으나 사마련과 무림맹의 조약으로 녹림을 단체로 쓸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금자 석 냥이라는 말도 안 되는 통행세를 요구한다면.
‘패기 딱 좋은 명분이군.’
거기다 정보까지 뜯어낼 수 있었다.
“크응? 네놈은 누구냐?”
“나 말인가?”
단목장룡이 모사일을 바라보며 섰다.
금자를 취할 욕심에 가득 차 있던 모사일. 방해꾼의 등장에 짜증이 가득하다.
“사람 하나는 동전 두 푼이다. 그거 내고 꺼져.”
형문산채를 통과하는 낭인이겠거니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무림에서 그나마 치안이 좋은 곳은 녹림이 직접 관리하는 산채 부근이었다. 그곳에서 감히 약탈을 벌이다간 녹림의 분노를 마주해야 했으니. 단목장룡도 그런 놈팽이 중 하나라 여겼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형문산채를 통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형문산채를 통과하는 데에 금자 석 냥? 중원의 표국을 거덜 낼 생각인가? 아니면 일부러 표국에 시비를 거는 건가? 내가 볼 땐, 후자인 것 같은데 말이지.”
“뭐라? 크응! 네놈은 뭔데 그딴 개소리를…….”
분노를 표출하려던 모사일이 뒤에 멀뚱히 선 주충에게 턱짓하며 말한다.
“적당히 만져 줘라.”
“예, 형님.”
매타작 몇 번이면 깨갱하고 절을 올릴 놈에게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
그의 눈앞엔 자그마치 금자 석 냥이 있었다.
“크으으응!”
퍽! 퍽!
낭인 놈을 패 버리는 통쾌한 타격음이 들려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금자 석 냥 중 하나는 그가 꿀꺽할 생각이다. 금자 한 냥이면 그 천향이라는 계집과 술이라도 한잔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쟁여 두다 들키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을 테니 빠르게 써 버리자는 마음이다.
“……!”
그런데 행낭을 쥔 총표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어허! 손의 힘을 빼라! 대호법님의 분노가 무섭지 않느냐! 크응!”
당연히 돈이 아까워서 손에서 놓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사일.
하지만 총표두의 몸이 경직된 것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형님-!”
표사들이 괜한 짓을 벌이면 바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던 형문산채의 녹림도들. 그들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왜?”
“저, 저기 보십시오! 주충이가!”
“뭐……?”
행낭에서 겨우 시선을 뗀 모사일.
그의 시선이 조충이 젊은 놈을 교육하는 현장으로 향했다.
“어……?”
분명히 바닥에 쓰러진 것은 멋도 모르는 낭인 놈이어야 했다. 그런데 입에 거품을 물고 파르르 몸을 떠는 놈은 주충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머리에 과부화가 걸린 모사일.
“감히……!”
그의 분노는 뒤늦게 찾아왔다.
감히 녹림을 건드려? 형문산채의 뒤에는 칠십이 채의 녹림이 있었다. ‘형제’를 건드리면 녹림의 모두가 나서서 밟아 준다.
그것이 대호법이 만든 ‘규율’ 중 하나였다.
“먼저 공격한 건 녹림이다.”
단목장룡이 말했다. 또 하나의 명분이 생겼다.
그는 여기 있는 조무래기뿐 아니라 산채에서 뒤뚱거리며 누워 있을 간부들까지 족칠 명분을 얻었다.
“저놈을 죽여라! 감히 우리 형제를 건드려!”
급격히 무거워지는 공기. 비화 표국의 표사들도 단단히 긴장했다. 저놈들은 산적이다.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지렁이들. 그들의 분노가 비화 표국에도 미칠 수 있었다.
특히 이 상황을 가장 걱정하는 건 비화 표국주였다.
‘이런… 상황이 좋지 않다……!’
총표두 장춘만에게 눈짓한다. 상황을 보고 물러서야 했다. 이러다가 정말 그 소문의 대호법이라도 내려오는 날엔…….
“동작 그만-.”
“……!”
싸늘한 바람이 등줄기를 스친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백. 특히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이들은 새로이 나타난 존재감에 경악했다.
‘좆됐다.’
비화 표국주와 총표두의 생각이 겹친다.
그 괴랄한 소문의 대호법이라면, 비화 표국도 그 분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금자 석 냥을 주고 형문산채를 통과하려 했던 이유가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파의 종자들에게선 상식적인 행동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대, 대호법님!”
한 산적의 외침에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저, 저, 저게… 녹림의 대호법……!’
어느샌가 소동의 중심에 꼿꼿이 선 한 사내.
어려 보이기도 하고, 은근히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한 묘한 얼굴이다. 거기에 그의 주변에는 희미한 불씨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총표파자(總瓢把子)도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는 녹림의 대호법.
염아귀(炎餓鬼) 동방강수.
그의 등장이었다.
포기하다
염아귀 동방강수.
단목장룡은 흑룡단에 있을 때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한 적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양(陽)의 기운을 타고난 자. 북해빙궁이 냉기를 활용한다면 그는 열기를 이용한다. 지금도 그의 주변에는 불씨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단목장룡이 보기엔 불필요한 내력의 낭비라 볼 수 있었지만, 소모되는 내공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나이는 이십 대로 보려면 볼 수 있었고, 다르게 생각하면 젊어 보이는 사십 대로 보인다. 그가 강호에 처음 이름을 알렸던 때가 십오 년 전이니 최소한 이십 대는 아니다. 뭐,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비화 표국이나 다른 녹림도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지만, 저리 열기를 퍼트리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녹림의 대호법이라… 소문대로의 놈일지 궁금하군.’
동방강수의 등장에 모사일이 겁을 잔뜩 먹은 목소리로 외친다.
“대호법님을 뵙습니다!”
“…….”
동방강수는 가만히 모사일을 응시한다.
그 압박감에 이기지 못한 모사일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주절대기 시작한다.
“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킁! 저 분수도 모르는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통행세를 거두는 행위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주충에게…….”
“그게 끝인가?”
“예? 킁! 당연히 아닙니다! 당장 저놈을 잡아 대호법께 대령하겠…….”
“네놈들이 무슨 수로?”
동방강수가 흘끔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뭐 그런 이야긴가. 그가 느끼기에도 동방강수는 확실히 수준이 높았다. 싸워 봐야 정확한 실력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방심하며 싸울 상대는 아닌 듯했다.
“그, 그게…….”
동방강수가 몸을 돌린다.
그의 시선에 비화 표국주를 비롯한 모든 표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제발, 자신들에겐 피해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길… 저 사내 때문에 우리까지 당할 수도 있다. 여기서 대처를 잘해야 한다.’
비화 표국주 입장에서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손자인 단목청야에게 힘을 실어 주러 가다가 애먼 곳에서 전멸할 위기에 놓였다. 동방강수가 모두를 죽이려 하진 않겠지만, 표사 하나라도 죽으면 그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떠한 희생도 없어야 한다. 표국의 주인이 이런 상황에서 뒤에 숨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왠지 모르게 얼굴이 눈에 익긴 하지만.’
사내의 얼굴을 슬쩍 본 백자강은 그러한 생각을 잠깐 했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비화 표국주는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난다. 특히 비화 표국의 일손이 부족할 땐, 객원 표사도 모집하곤 했었다. 어쩌면 비화 표국의 객원 표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무인일 수도 있다.
비화 표국이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저리 나선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군 성질이 없어서 녹림에게 굽신대는 줄 아는가? 강호라는 게, 표국을 운영한다는 게 이러하다. 굽힐 때는 굽혀야 한다.
“대호법님, 비화 표국주인 백자강이라 합니다. 분란을 일으켜 사죄드립니다. 본 표국은 녹림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너의 생각은 어떻지?”
동방강수가 단목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번에 백자강이 전음을 보낸다.
- 자네가 누군지 내 모르겠으나, 당장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여 사과하게. 녹림의 대호법은 사파와 정파를 통틀어서 위세를 떨치는 무인일세! 자네가 우리 표국을 지지해 준 것은 고맙네만, 괜한 객기를 부리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
대단히 급박한 전음이다.
단목장룡의 대답에 목숨 줄이 걸려 있다는 듯이 말한다. 당연히 단목장룡은 그의 말에 호응할 리 없었다. 명분이라는 것은 이럴 때 써먹어야 한다.
단목장룡은 깔끔히 백자강의 말을 무시했다.
“녹림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해야지.”
“뭣이!”
“자네!”
모사일과 백자강이 당황하여 소리친다.
저놈은 녹림의 대호법이 누군지 모르는가? 그의 말 한 마디면 칠십이 채의 녹림도들이 달려들 것이다. 아니, 수많은 녹림도가 나설 필요 없이 동방강수 한 명으로도 이곳 모두를 몰살할 수 있었다.
“왜 녹림이 사과해야 하지?”
“표물의 가치가 어찌 됐든 금자 석 냥을 요구했으니까. 녹림이 그런 것까지 판단하며 통행세를 거둬 왔던가? 녹림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결국 도적 떼가 아닌가?”
“…….”
“크응! 이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 제발, 그만해 주게. 자네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만하면 됐네. 강호에서 그런 만용은 통하지 않는다네!
모사일이 침을 튀겨 대며 악을 쓴다.
백자강은 전음으로 단목장룡을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고. 동방강수의 몸에서 흐르는 불씨의 크기가 크기를 키우자, 더 조급해진 모양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보군.”
동방강수의 말에 백자강이 입을 벌린다.
큰일이다. 좋은 소문도 있었지만, 염아귀 동방강수는 별호처럼 귀신 같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손속에 자비는 없었으며, 인간을 산 채로 태워 먹는다는 섬뜩한 말도 있었다.
“그런데 넌 누구지?”
동방강수의 물음에 단목장룡이 답한다.
“난 단목장룡이다.”
“다, 단목장룡?”
단목장룡?
백자강은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비화 표국의 편을 들어 주며 만용을 부리는 저 사내가 단목세가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의 손자인 단목청야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 단목장룡? 이 난데없는 상황에 백자강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크응! 단목장룡?”
일개 녹림도에 불과한 모사일도 그의 정체에 깜짝 놀란다. 그가 누구인가? 정파의 역대급 천재라 불렸던 남궁일몽을 꺾고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사내다. 녹림도들은 의외로 강호의 소문에 밝다. 단목장룡을 모를 리가 없었다.
‘크응!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겐 대호법님이 계시다! 크응! 겁먹지 말자!’
그렇다.
지금 그의 곁에는 대호법 동방강수가 있었다.
녹림의 중추라 불리며, 사마련에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인물. 일개 도적 떼에 불과했던 녹림의 위상을 높여 준 존재. 그가 바로 동방강수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녹림의 총표파자, 그러니까 칠십이 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성(星)의 별호를 달 수도 있다고 알려진 존재였다.
아무리 단목장룡이 최근 명성을 떨쳤다고는 하나, 그는 십 년도 전부터 사파 내에서 입지를 굳혀 가고 있었다.
애써 당당히 단목장룡을 노려보고 있던 모사일.
그런 그가 당황한다.
동방강수의 시선이 그를 향했기 때문이다.
“왜 대답이 없지?”
“크응, 에? 예? 무슨 말씀이신지……?”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했다.”
“……?”
그건 단목장룡에게 했던 말이 아닌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단목장룡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동방강수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려 하는 것이다.
“저, 저는……? 크응… 왜 그러시는지……?”
화르르륵-!
동방강수의 몸에서 불씨가 크게 인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타들어 간다. 단목장룡은 그 묘리를 보고 감탄했다. 제어하지 못해서 내력이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저런 효과를 연출한 것이다.
“형문산채는 들어라.”
구우우…….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모르긴 몰라도 형문산의 중턱에 위치한 형문산채에까지 들릴 것이다.
“녹림은 형제를 아낀다. 하지만 형제를 위협하는 형제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형제를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은 화형에 처한다. 나, 동방강수가 처벌을 집행하리라.”
“…예?”
모사일이 눈을 끔뻑인다.
이게 대체…….
화르으으윽……!
삽시간에 그의 옷에 불이 붙었다. 동방강수가 다가갈수록 그 불길이 거세진다. 모사일의 주변에 있던 녹림도들은 그 화마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끄아아! 불이! 불이……!”
“네 잘못을 알고 있느냐?”
“불! 불우우울! 뜨거워! 끄아아아악!”
“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지. 다른 형제들의 본보기가 되어라.”
“뜨거어어어어어어! 뜨거어어어어! 살려 줘어어어어어억!”
그는 더 이상 콧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랜 세월 들인 불쾌한 그 버릇은 동방강수의 뜨거운 화마에 타오르고 있었다. 꺼져 가는 생명. 불이란 생명마저 게걸스레 먹어 치운다. 산 채로 사람이 타오르는 장면에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동방강수는 염아귀라는 별호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
잠시 뒤.
모사일의 목숨이 끊겼다. 서서히 꺼지는 불꽃. 산에서 불을 사용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동방강수는 손짓 한 번으로 모사일에게 붙은 불씨를 모두 지워 버렸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일렁거리던 불씨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단목장룡이라 했던가?”
“그래.”
동방강수가 단목장룡에 다가온다.
비화 표국주는 두 다리가 떨려 도망치지도 못했다. 불이라는 건 사람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주변에만 가도 사람을 태워 죽이는데…….
“미안하다. 정당하게 불만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점에 대해 사과한다.”
동방강수가 허리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산 채로 사람을 태워 죽였던 인물이 말이다.
“비화 표국에게도 사죄하겠다. 말도 안 되는 통행세를 요구하여 혼란에 빠트렸던 것에 대하여 사과한다.”
“말로 넘어가려는 건가?”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백자강이었다. 대체 대호법이 왜 사과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왜! 자신이 있는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녹림과 척을 지는 건 표국의 입장에선 사업을 접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화 표국은 괜찮…….”
“네 말이 옳다. 말뿐인 사과는 의미가 없지.”
동방강수가 말을 이어 나간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녹림은 비화 표국에 통행세를 일절 받지 않겠다.”
“……!”
백자강이 그의 선언에 입을 벌린다.
일 년이라고? 녹림의 통행세가 면제된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을까?
거기다 표국의 위상까지 널리 알릴 기회였다. 중원의 삼대 표국도 녹림의 권역을 통과하려면 통행세를 내야 한다. 이 일을 강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비화 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삼대 표국으로 나아갈 귀중한 발판이라 할 수 있었다.
“단목장룡, 넌 뭘 원하지?”
꿀꺽.
모두의 시선이 단목장룡에게 향한다. 과연 그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비화 표국이 녹림에게 약속받은 것은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물론, 그 후에 비화 표국의 행보가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씨익.
단목장룡이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동방강수, 너랑 친우가 되고 싶군.”
“에에엑?”
모두가 얼빠진 소리를 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