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36)

* * *

“장룡아, 형을 도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형제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단목장룡의 말에 단목청야가 눈시울을 붉힌다.

어찌 이런 인재를 몰라보았는가? 그리고 왜 그를 자신의 길로 끌어들이려 했는가? 단목장룡은 누군가 이끌어 주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존재였다. 오히려 단목청야의 그릇으론 그를 이끌어 줄 수 없었다.

이번 일로 단목청야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습지만, 지금의 나는 널 돕기에 많이 부족한 듯하구나. 하나, 언젠간 네가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나아가겠다.”

굳건한 결의가 느껴지는 단목청야.

그 정도면 되었다. 굳이 그에게 보답을 받고자 했던 행동은 아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단목장룡의 목표에서 단목청야는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미래를 보면 이번 행동은 좋은 선택이었다. 물론, 이번 일로 어떤 세력과는 확실히 척을 진 것이긴 했지만.

“예,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적당히 감사 인사를 주고받은 형제.

단목청야가 화제를 바꾼다.

“그건 그렇고, 본가의 방계를 조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느냐?”

“예.”

단목청야가 속으로 깊게 반성한다.

단목장룡은 누구보다 단목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하고, 흑룡단의 조장이 되고, 가문의 방계까지 영입하여 키우고 있다. 모두 단목세가가 오대세가의 반열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이토록 노력하는 동생에게…….

“하하……. 난 네가 가문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것도 모르고, 황룡단에 입단하라고 했었구나…….”

가문의 영광을 바란다기보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걸 부정할 필욘 없었다.

“큰 노력은 아닙니다.”

동생의 겸손에 미소 짓는 단목청야.

“그래, 나 또한 네 의지를 이어 본가 방계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겠다. 방계에도 분명한 인재는 있을지니 아버지께도 이 내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단목청야가 단목세가를 위하는 마음은 단목장룡도 약간 놀랄 정도였다.

과거에 그를 처음 보았을 땐,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하는 사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겪어 보니 그런 사내가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며, 그것을 고쳐 나가는 사내였다.

그가 이대로 전진한다면 언젠간 단목세가가 오대세가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갈 가주님껜 언제 찾아뵐 생각이더냐?”

“오늘 찾아뵐 생각입니다.”

“오, 잘 생각했구나. 그분과 연을 맺는다면 확실히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그분은 무공뿐 아니라 진법과 학문에도 조예가 대단하신 분이지. 천룡각에 있을 적에 몇 번 특별 수업을 나오셔서 뵌 적이 있었거든.”

“그렇군요.”

단목청야가 제갈강량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아마 그와 연을 맺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단목장룡도 당연히 그와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그가 어떤 향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궁금하긴 하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조언이라…….’

전대 맹주의 부탁

전대 맹주 제갈강량의 전각.

맹주직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아직 무림맹에 머물고 있었다. 사실 맹주가 무얼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진 않았지만, 오늘 만남으로 흥미가 생겼다. 그는 내게 향을 극복하면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리 말한 것은 내 경지를 꿰뚫어 보았다는 말일까?

그래도 그 정도 되는 인물과 담소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난 단목청야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그를 찾아갔다. 맹주전에 비해선 확실히 그 규모가 작아 소박한 느낌이었다. 흑룡단의 오 조가 머무는 전각보다 훨씬 작았으니 전대 맹주가 머무는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다.

‘으음…….’

입구에 잠시 멈춰 선다.

소박한 전각이지만, 묘한 느낌이 든다. 마치 이 전각 안에 들어가려면 각오를 다져야 할 것 같은 느낌. 제갈세가라서 그런 것일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일까? 가만히 서서 전각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오게나.”

제갈강량의 목소리가 들린다.

“…….”

등골이 서늘하다.

난 그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고수는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하다. 쉽게 예를 들자면, 짐승들은 인간은 인지할 수 없는 냄새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짐승끼리의 싸움에서 먼저 ‘기척’을 알아내는 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아무리 경지가 높은 무림인이라도, 급소를 내어 주면 목숨을 잃는다.

난 지금 그에게 패배한 것이다.

‘분하군.’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말인가.

물론, 천향옥로단을 취하여 어쩔 수 없이 몸에서 과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점도 변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탓하진 않기로 했다. 그 향으로 인하여 내게 득이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난 천천히 문을 열고 제갈강량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내부는 전각의 외부와 비슷하게 소박하고 검소했다. 전대 무림맹주라면, 제갈세가의 가주라면 흔한 난초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제갈 가주님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이리 빨리 찾아올 줄 몰랐군. 편히 앉게.”

“예, 감사합니다.”

제갈강량의 앞에 앉는다.

깊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제갈 가주님, 제게 어떤 이야기가 있어 이리 초대를 해 주셨는지요?”

“아, 그건 말일세.”

스으으윽…….

“……!”

제갈 가주의 손짓. 그 한 번의 움직임에 무언가 두둥실 떠올라 부드럽게 공중을 헤엄쳤다. 백자 병이다. 또한, 찻잔 두 개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최상승의 무공 경지 중 하나였다.

검기(劍氣) 같은 것은 손으로 쥐고 있어야 외부로 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허공섭물은 신체에 직집 맞닿지 않고도 외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초절정, 그중에서도 벽에 가까워진 자들은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제갈강량처럼 저리 자연스럽게 하려면…….

‘화경.’

정파 무림의 지배자.

육왕이라 불리는 이들이 오른 경지였다. 하지만 제갈세가주의 별호는 왕(王)의 호가 아니다. 이곳에 오기 전 그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의 경지는 분명히 초절정의 벽에 도달한 상태라 했다. 제갈세가주가 맹주가 된 것은 무력보다는 진법이나 군사 지식 등에 특출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리 자연스러운 내력의 발현이라니. 역시 무림맹의 맹주 정도가 되면…….

“뭘 그리 놀라는가? 자네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은가?”

너무 태연스러워 마치 나를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그러한 고도의 기예는 부리지 못합니다.”

내 대답에 제갈강량이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향 때문인가? 위지 장로와 비무하는 것을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건만……. 자, 마시게나. 항주의 용정차라네. 마셔 본 적이 있나?”

“용정차는 처음 마셔 보는 것 같습니다.”

“향을 잘 음미해 보게.”

좋은 향이다.

차를 즐기진 않았지만, 향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향을 맡고 살짝 목을 축이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차를 마시는 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차를 찾으리라.

“천향옥로단인가?”

“…….”

그의 물음에 평온한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천향옥로단을 취한 것은 흑룡단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기에. 내가 위지무외에게 망나니처럼 비무를 신청했다고 하더라도, 암천회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예, 맞습니다.”

이미 천향옥로단의 명칭을 정확하게 아는 상대에게 거짓을 고해 보았자 얻는 것은 없으리라. 당당하게 인정하는 것이 나았다. 내 대답에 제갈강량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 기운을 제어하기 힘들지 않은가?”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됐습니다.”

처음엔 나 자신이 이 정도 수준이었나 싶을 정도로 욕망을 추구하게 되었다. 심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망. 아마 갈유화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또한, 무림맹에 오면서 차츰 천향옥로단의 기운에 적응했다.

“그걸로는 부족할 걸세.”

“천향옥로단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알다마다. 신병이기 중 하나인데 말일세.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모두 취한 자는 무림을 차지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지.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맞는 말도 아니지.”

틀린 것도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았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갈강량이 잠시 눈을 감는다.

내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자네는 무공을 뭐라고 생각하나?”

슬그머니 눈을 뜬 제갈갈량이 묻는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호오… 자네의 무(武)란 그것인가?”

“틀렸습니까?”

제갈갈량이 작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답은 없지. 내가 답을 알고 있다면 여기에 있지 않고 신선이 되지 않았겠는가? 무공이란 익히는 사람에 따라 그 길(道)이 달라지곤 한다네. 사람마다 타고난 성정과 성향이 다르기에 생겨나는 일이지. 같은 스승을 두고, 똑같은 검법을 익히더라도 어느샌가 차이는 벌어지게 되어 있다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얼핏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천향옥로단을 모두 취할 정도의 인재라면, 그걸 취하지 않고도 무림을 발아래 둘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지. 오히려 그걸 취함으로 인해 길이 더 좁아졌을 수도 있다네. 어떤 방향으로 가든 극(極)과 한없이 가까워질 수 있음에도 뚜렷이 보이는 길을 선택했으니 말일세. 하하! 재밌지 않은가?”

제갈강량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천향옥로단을 취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란 말인가?

그는 내 표정을 읽었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간다.

“당연히 그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네. 사실 나도 잘 모르지. 그 선택이 옳았을지 틀렸을지는 말일세. 단지 폭이 좁아진 것이 아쉬운 느낌이랄까… 거창하게 말한 결론치고는 너무 허무한가? 끌끌.”

오묘하다.

단목장룡으로 살아가며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은 극히 드물었다. 사공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때, 신교의 신녀인 영령과 대화할 때, 교주인 아버지와 대화할 때 가끔 이런 느낌을 받곤 했다. 뜬구름을 잡는 대화. 물론, 그런 그들에게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에 난 신교에서 망나니로 살 수 있었다.

“선택한 길이 다를 뿐이지요.”

“다르다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는 싱긋 웃으며 차를 마신다.

제갈강량과 대화하고 있으니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 걷히는 느낌이었다. 또한, 목표가 더 멀어진 것 같기도 했다. 풀어 말하면 안개는 걷혔으나 목적지가 더 멀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정도일까.

“너무 사설이 길었군. 내가 자네를 부른 목적은 따로 있다네.”

“제게 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제갈강령이 놀란 눈빛을 한다.

“설마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당연히 아니다.

그가 뭔가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아마 내게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기에 부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그런 표정이셨습니다.”

“하하,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게야. 누구에게 내 기분을 읽혔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아니면 자네의 눈썰미가 뛰어나든가? 그래, 내 솔직히 말하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리 불렀다네.”

“그게 무엇입니까?”

순간 제갈강량의 눈빛이 번뜩였다.

“내 딸을 찾아 주게.”

“예?”

제갈강령의 딸이라면 제갈교아……?

“교아가 무림맹과는 다른 조금 비밀스러운 단체의 군사와 비슷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알고 있다.

그녀는 만월(滿月)이라는 단체에서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음침한 분위기의 여인.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신교의 신녀인 영령과 비슷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제갈강량이 이리 말하는 것을 보아선, 제갈교아가 그의 아버지에게 나와의 만남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용봉지회에서 그녀와 만나 많은 것을 듣게 되었다. 내 팔찌에 혼이 깃들었다는 사실과 혼의 냄새를 맡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제갈교아는 내 냄새를 맡고 싶어 했다.

“제갈 소저를 찾아 달라는 말씀은, 그녀가…….”

“그래, 사라졌다네. 땅으로 꺼진 것인지 하늘로 솟은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어. 본가의 식솔들을 풀어 찾고 있긴 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네.”

설마 제갈강령이 급히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이 생긴다.

“왜 굳이 제게 맡기시려는 겁니까?”

“자네의 능력을 믿기 때문일세.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맹주의 자리에 있었다네. 자네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이미 보고를 들었지. 사파의 잔치인 암천제에 참가하여 우승까지 하였으며, 마교가 중원 무림에 다시 등장했다는 걸 알아냈지.”

그는 제갈 가주였지만, 무림맹주였다.

무림맹의 모든 정보는 그에게로 흘러갔으리라.

“그리고 오늘 확신했다네. 자네에게 맡기면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일세. 위지 장로와 비무하며 보여 줬던 실력과 더불어 천향옥로단을 취한 것을 보고 말이야.”

하지만 난 무림맹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를 언제 찾을지도 모르고, 내게 중요한 것은 전대 무림맹주와의 연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벽을 깨서 목표에 다가가야 한다. 취사선택. 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었다.

“전…….”

“당연히 맨입으로 부려 먹을 생각은 아니라네. 자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 주겠네.”

“그게 무엇입니까?”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온전히 취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알려 주겠네. 이것도 여러 방법 중 하나지. 그렇지만 분명히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이야.”

나는 아직 부족하다.

하늘의 재능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야 할 길이 많았다. 제갈강량은 내게 가르침을 내려 줄 수준이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확실한 길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떤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어찌해야 할까?

조언을 받고 임무를 수락해야 할까? 제갈강량을 보고 있자니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다. 제갈강량 정도 되는 인물이 허튼소리를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것만으론 결정할 순 없었다. 제갈교아에겐 미안하긴 했지만, 이 넓은 중원에서 그녀를 찾느라 내 시간을 모두 사용할 순 없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물으니 제갈강량이 답한다.

“자네를 믿지만, 자네에게 모두 맡긴다는 건 아닐세. 교아와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곳은 호북성 흥산현일세. 자네가 호북성에서 교아를 찾아 줬으면 하네. 기한은 반년으로 잡고 말일세.”

“반년 말입니까……?”

씁쓸한 눈빛의 제갈강령.

“반년이 지나도록 교아를 찾을 수 없다면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봐야겠지. 뭐 자네가 수색을 멈추더라도 본가에선 계속 그 아이를 찾겠지만, 자네에게 부탁할 수 있는 기한은 그 정도겠지.”

“그런데 제갈 소저가 실종됐다는 소식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혹 제갈세가에서 비밀리에 그녀를 찾고 있는 겁니까?”

나는 흑룡단에서 남궁일몽, 설비연과 함께 매일 중원 무림에서 벌어지는 여러 정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교아가 실종됐다는 정보는 본 적이 없었다.

“교아가 극비리에 맡은 임무가 있다네. 그 아이가 실종됐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한 상황이지. 만약 자네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교아의 실종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아니 된다네.”

그녀가 만월이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마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죄송하지만, 이 일은 당장 결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해하네.”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기에 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 제갈 소저를 찾는 임무를 맡는다면, 조원들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난 무림맹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조원들에게 강호 경험을 시켜 줄 기회이기도 했으며, 또 그들을 두고 떠나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이네. 그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군. 물론, 그들에게도 이 일을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서약을 받아 내야 한다네. 하나,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 속한 이들은 되도록 아니었으면 하는군. 자네 조원들은 그에 속한 이들이 있나?”

“조원 중엔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난 멈추지 않고 계속 그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확실한 길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네. 내 아주 우연히 얻은 무공 구결이 있다네. 그것을 활용하면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제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네.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저렇게까지 말하니 확실한 방법인 듯하다.

그는 천향옥로단의 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또 실례일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만…….”

“괘념치 말고 뭐든 물어보게.”

“제갈 가주께선 직접 그녀를 찾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정말 소중하다면, 내게 부탁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찾는 것이 현명하다.

“후후… 다른 이에게 이걸 보여 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는 하얀 천을 꺼내 내게 펼쳐 보였다. 하지만 천의 중심부에는 붉은 무언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건…….”

“내가 토한 피라네.”

“예?”

“자네가 소문을 들었을지 모르겠네. 병환으로 인해 맹주의 자리에서 급히 내려왔다는 소문 말일세. 그건 사실이라네. 조금만 심장에 무리를 가해도 피가 역류한다네. 과거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점점 심해지더군. 하하.”

제갈강량 같은 고수가 병환을 앓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지만, 그의 앞에서 그런 표정을 내보일 순 없었다. 애초에 무림인도 사람이다. 생명은 언젠간 죽음을 맞이한다. 무공의 경지가 아무리 강해도, 중원을 뒤흔들었던 무림인이라도.

“…괜한 것을 여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끌끌. 참, 그리고 자네에게 내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겠네.”

“어떤 것을……?”

그는 손가락을 휘저어 뒤편에 있는 책장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어쩌면 그가 허공섭물을 저리 잘 다루는 데에는 병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이 먼 장님들은 청각이 발달한다고 한다. 시력을 대체할 신체 기능이 발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꺼내 온 무공서를 바라본다.

‘저건……?’

첫 임무

무영심결(無影心訣).

당연히 한 사람이 떠오른다. 무영신투. 도둑인데도 왕(王)의 호를 받을 뻔한 사내. 무공으로만 따지면 육왕과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소문이 났던 사내였다. 당연히 사파의 인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사실 부패한 관료들이나 패악질을 일삼는 무림인들의 재산을 훔쳐 나눠 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의적(義賊)으로 불리기도 했다.

도둑질이 미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에 반대로 악소문도 많았다. 막 혼례를 올린 처녀를 첫날밤이 치르기 전 납치했다든가, 기루에서 비싼 술을 잔뜩 시켜 놓고선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갔다든가. 그 외에도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난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서녕 지부의 지부장으로 있던 시절. 그와 대작한 경험이 있다. 내 경험으로 그는 악인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내 물건을 훔치지 않았으니, 무영신투의 악소문이 진실인지 파악할 수 없었으니 내가 본 그대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무영심결이 맞나?’

내 표정을 알아챈 것일까?

제갈강량이 이에 대해 설명한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무영신투의 무공이라네.”

“그랬군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무영신투는 십 년도 전에 죽었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제자인 방구에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은혜를 갚겠다던 그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거짓을 고할 사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마 제갈세가에서 무영신투를……?”

“아닐세. 무영신투에게서 이 무공을 빼앗은 것은 아니라네. 이와 관련된 참으로 기구한 사연이 있지만, 이건 무영신투의 사부인 천면신투(千面神偸)과 거래하여 얻은 것이라네.”

천면신투.

무영신투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지만, 그도 도둑으로서 중원에서 한 획을 그은 사내다. 변장술이 대단하여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속았다고 한다.

사실 무영신투의 무공을 꺼냈을 때, 뭔가 꺼림칙하긴 했다.

무영신투는 누군가에게 죽었다고 했으며, 그 배후에 제갈세가가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제갈세가는 오대세가이기도 했지만, 만월이라는 비밀 조직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도박장을 여는 것 말고도 그들이 중원에 개입하는 것은 많으리라.

뭐 제갈세가가 무영신투를 죽였다고 해도 크게 상관이 없긴 했다.

그와의 인연은 한 번 술자리를 같이했을 뿐이니까. 그의 복수를 하겠다며 나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이것이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몰아낼 방법입니까?”

“그렇다네. 이건 내공심법과는 조금 다른 무공이라네. 아니, 무공이라기보단… 하나의 깨달음이라 할까? 무영신투는 중원에서 흔히 말하는 일류의 수준일 때도 월등히 강한 고수에게서 ‘기척’을 숨길 수 있었지.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은 무영(無影)이라는 이름처럼 자연의 법칙마저도 속이려 했어. 보통의 내공심법이 자연에 순응한다면…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것이지.”

“…….”

사실 마교에선 그러한 무공이 참으로 많았다.

대부분 쓸데없는 시도에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역천(逆天)의 무공이라 할까?

“사실 무영심결만으로 그 대도(大盜)의 무공을 모두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네만, 자네라면 이 무영심결만으로 가치가 상당할 것이라 믿는다네. 나 또한 이것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말일세.”

“제갈 소저를 찾아오면 그걸 제게 주시려 하는 겁니까?”

그가 입꼬리를 올린다.

“당연히 아니지. 지금 자네에게 줄 생각이라네. 그래야 자네가 열심히 교아를 찾아 줄 것이 아닌가? 가져가게.”

두둥실 떠올라 내 앞에 살포시 떨어진 무영심결.

아무리 그래도 이런 귀한 것을 바로 주어도 되는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본일 뿐일세. 그 무공을 외인에게 알려 주지 않겠다고 약조만 해 주면 된다네.”

그러니까 그게 괜찮겠나? 날 어찌 믿고?

의문이 떠올랐지만, 준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뭐 받은 만큼 열심히 제갈교아를 찾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장 어떤 무공인지 살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무영심결은 정말 심오한 무공이라네. 나조차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 보통의 경우였다면 무영심결에서 얻은 심득을 알려 줘야 하겠지만, 자네라면 홀로 그것을 잘 익히리라 생각하네. 오히려 내가 알려 주는 것은 수많은 길 중 하나를 특정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일세.”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제갈 소저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는 약간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했으면 하네.”

그 후로 제갈교아가 언제부터 연락이 끊겼던 것인지, 제갈세가에선 어떤 지역을 위주로 탐색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보를 받았다. 그 넓은 호북성에서 실종된 제갈교아를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받은 만큼 열심히 찾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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