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단목장룡의 무림맹 생활엔 큰 변화가 없었다.
조원들을 단련시키고, 자신도 무공을 갈고닦는다.
아직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완벽히 제어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또 그는 일상적인 무인의 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순찰당과 비선당에서 정보를 받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당연히 천마신교와 관련한 것이다.
물론, 마교에 대한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신교는 중원에 손을 뻗고 있다. 암천회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어. 아마 정파의 권역에도 신교의 힘이 닿아 있으리라. 맹의 정보로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겠지.’
이렇게 정보를 혼자 정리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도 든다.
해남도에선 설비연이 알아서 정보를 취합하여 그에게 중요한 부분만을 보고했었다. 설비연은 흑룡단의 조장직에 있었으니 신뢰할 만한 수하였다.
이제는 같은 조장이 되었기에 그녀를 수하처럼 부려 먹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목표도 신교이니 한번 말은 해 봐야겠군.’
무림맹으로 돌아온 이후에 그녀와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조원들과 지옥 수련을 떠났었기에 얼굴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래도 이제 그녀가 돌아왔으니 말이라도 꺼내 볼 순 있었다. 뭐 그녀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단목장룡이 정보를 취합한 종이 뭉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향한 곳은 삼 조의 전각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지옥 수련을 끝내고 녹초가 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걸어가는 조원들이 보인다. 확실히 몸은 힘들어 보였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광기마저 보이는 집념이랄까?
“오 조장님.”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내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과거 삼 조와의 대결에서 단목위와 싸웠던 사내다. 이름이 최관월이라 했던가?
“최관월 맞나?”
“하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실 줄이야. 감사합니다.”
그 또한 지옥 수련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지만, 확실히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저런 이들이 전쟁이 터진다면 분명히 활약할 수 있으리라.
“조장님은 계신가?”
“저… 설 조장님과는 지금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최관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게 말한다.
“지금 기분이 많이 안 좋으셔서. 저희 조장님 성격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번 불이 붙으면…….”
최관월은 단목장룡과 설비연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고 있었다.
단목장룡을 배려하는 것도 있지만, 설비연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자신들 또한 위험하기에 그리 말하는 것이다.
“그래? 확실히 표정을 보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군.”
“예? 표정을 보……? 으헥?”
최관월이 펄쩍 뛴다.
마치 귀신처럼. 한기가 철철 흐르는 눈빛의 설비연. 그녀가 최관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관월.”
“으엑! 전 그게 아니라…….”
콧잔등을 찡그린 설비연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넌 나중에 보지. 물러나라.”
“옙!”
당장 상황을 모면할 기회였다.
최관월이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난다.
“무슨 일… 인가요?”
그녀는 묘하게 어색한 말투로 단목장룡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안으로 가시죠.”
단목장룡이 설비연의 집무실로 들어간다.
그녀의 성격답게 방은 꾸미지 않고 깔끔한 느낌이다.
“주… 단목 조장님?”
“아, 여기.”
단목장룡이 들고 온 종이를 꺼낸다.
그녀가 황급히 그것을 주워 읽어 나간다.
“분명히 마교는 정파에도 손을 뻗었을 겁니다. 그런데 혼자 정보를 정리하려니 힘에 부쳐서 말입니다. 설 조장님의 도움을 받고 싶군요.”
“…….”
“여유가 있다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설비연이 침묵한다.
그녀의 머릿속은 상당히 어지러웠다. 지옥 수련으로 겨우 번뇌를 잊어 보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단목장룡 때문에 혼란스럽다.
“부탁이요……?”
“예.”
“…….”
단목장룡은 그런 설비연을 보고 오해했다.
자신의 부탁이 달갑지 않다고 말이다. 거기다 그녀는 이제 막 지옥 수련을 끝내고 왔지 않은가? 적당히 시간적 여유를 둔 후에 찾아오는 것이 좋았던 걸까?
“이제 막 지옥 수련을 마치고 오셨으니 피곤하실 수도 있겠군요. 일단 정보를 계속 취합하고 있을 테니 여유가 생긴다면…….”
단목장룡이 말을 끝내려 하자.
설비연이 불쑥 말했다.
“부탁이 아닌 명령을 내려 주시면…….”
“……?”
설비연이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
설비연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지옥 수련을 하면서도 자꾸 생각했다. 명령을 받고 싶다고 말이다. 이게 현실 도피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설비연은 해남도에서의 그 감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로선 다소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단목장룡에게 말한다.
“명령이요?”
“예,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편하게 말을 놓아 주신다면 단목 조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비연에게 이상한 취향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잠시.
오히려 그에겐 좋은 상황이었다. 설비연 같은 이를 수하로 부릴 수 있다면…….
“좋다.”
“……!”
무림맹에 온 뒤로 죽은 눈빛이던 설비연의 눈망울이 생기(生氣)로 반짝였다.
“그럼 정보를 취합하여 매일 보고하도록. 해남도에서 마교가 암천회에게 손을 뻗었다는 걸 알았지? 그들은 은밀히 움직인다. 그러니 사소한 정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라.”
“예, 주공……!”
오랜만에 주공이라는 말을 들으니 해남도로 돌아간 것 같았다.
뭔가 신나 보이는 설비연의 얼굴을 보니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확실히 해남도에서 설비연은 임무를 잘 수행했으니 믿으면 되겠지. 조금은 더 여유가 생기겠군.’
설비연과는 며칠 동안 모았던 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으며, 그녀가 정보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 *
그렇게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단목장룡은 충실한 수하 설비연의 도움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오 조원들도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단목장룡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줄어들 것이다. 잘 키운 수하 하나가 근심을 덜어 준다.
‘슬슬 나만의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 같군.’
그는 무림맹에서의 독립도 생각하고 있었다.
뭐, 아직 예정에 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도 설비연에게 정보를 듣고,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간다.
삼 조장이 계속 단목장룡의 방에 들락거리는 것은 이상했으니 단목장룡이 그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 조 전각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남궁 조장님?”
남궁일몽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단목 조장님,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남궁일몽이 자신에게 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비무라도 청하려는 것일까?
“저도 설 조장님과의 회동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마교와 관련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요. 남궁세가의 힘은 비선당에도 뻗어 있거든요.”
여유로운 얼굴 표정.
용봉지회 때의 천덕꾸러기를 보는 듯하다.
“제가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남궁세가는 무림맹과는 또 다른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
남궁일몽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그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는 의문이었다.
“왜 그런 제안을 제게 하시는 겁니까?”
남궁일몽이 진한 미소를 짓는다.
“대신, 제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보이다
“부탁이요?”
남궁일몽이 대충 어떤 부탁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들어 보기로 한다.
“예. 칠 주야에 한 번은 저와 비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비무라…….
사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나 또한 비무 상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남궁일몽과의 비무는 그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용봉지회에서 겪어 본 남궁일몽의 재능. 그것은 진짜였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남궁일몽이 말을 덧붙인다.
“전 단목 조장님의 진심 어린 비무를 원합니다.”
나와 제대로 붙어 보고 싶단 건가?
이제까지 비무를 신청하지 않은 것만으로 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흑룡단원끼리 비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까. 남궁일몽의 독자적인 정보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림맹의 정보에만 매달리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예.”
남궁일몽이 주먹에 힘을 주며 기뻐했다.
“이리 쉽게 승낙해 주실 줄은 몰랐군요.”
“비무가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씨익 미소 짓는 남궁일몽.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떤 일이든 말입니다.”
비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일까?
정보를 찾는 것에도 노력을 한다는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내일 아침 설 조장님의 전각으로 오십시오. 어떤 정보를 모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 늦지 않고 회동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일몽은 포권지례로 내게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은근히 기대가 된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리는 듯하군.’
무림행을 하며 뿌려 놓은 씨앗이 발아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