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군. 마교가 암천회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니… 설 조장과 단목 조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면, 난 믿지 못했을 것이네. 솔직히 지금도 믿을 수가 없긴 하군. 그 마교가 중원의 문파에게 손을 뻗었다라… 아무리 사파라고 해도 말이지.”
마교.
단목장룡도 조금 의아한 부분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교는 중원과의 타협이 없었다. 십만대산에서 내려올 때는 파멸뿐이었다. 매번 그들의 침공을 먼저 막아 냈던 도가 제일의 문파였던 곤륜파. 그들의 명성은 과거 마교의 손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 외에도 그들의 손에 많은 문파가 흥망성쇠를 달리했었다.
뭐 꽤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하지만, 단목장룡은 불과 십 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마교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마교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정사는 구분이 없었다. 모두 똑같은 ‘정복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암천회에 손을 뻗었단다.
마교도 달라지고 있다는 말일까?
“그래도 변함없이 마교는 척살해야 할 적일 뿐입니다.”
설비연의 단호한 음성.
그녀의 말에 단목장룡과 흑룡단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렇지. 두 조장에게 임무를 맡긴 선택은 탁월한 결정이었군. 설마 암천회에서 우승까지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러던 중 조백의 시선이 설비연의 왼쪽 눈을 바라본다.
안대가 아니라 정상적인 눈동자. 시력이 감퇴하여 흐릿하게 세상을 보는 조백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기연을 얻었다고 했다.
사실 의문이 많았지만, 조백은 모두 캐묻지 않았다. 쉬이 말할 수 있었다면 ‘기연’이라는 두루뭉술한 말이 아닌, 세부적인 보고가 있었으리라. 그래도 설비연이 눈을 잃은 것이 마음이 아팠는데,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도 설비연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생각이리라.
“참,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과는 달라진 듯하군. 둘 사이에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조백이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늙은이의 주책. 젊은이들은 부끄러움에 쉽사리 관계를 인정하지 못한다. 설령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슬며시 돌을 던져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발전하더라도 좋은 일이다.
그는 전쟁을 겪은 후 여러 사연으로 남들은 다 이룬다는 가정을 이루지 못했으니.
“생각하시는 일 없었습니다.”
설비연은 평소의 성격대로 차가운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다만, 아주 살짝 단목장룡을 곁눈질했을 뿐이다.
“단주님, 나찰마궁에 대해 보고했던 건은 어찌 됐습니까?”
단목장룡의 질문.
흑룡단주와는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마교, 나찰마궁 그리고 새로운 무림맹주.
모든 것을 파악해야 했다.
만약 무림맹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과감하게 선택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바로 결정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나찰마궁의 이야기가 나오자 장난기가 어렸던 흑룡단주의 표정이 굳는다.
그들이 행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행은 단주급 인사를 넘어 맹의 의사 결정권을 지닌 장로들과 내원주, 외원주 그리고 맹주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다. 하지만 요즘 무림맹 내부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다 보니 사파의 권역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 쓸 순 없었다.
흑룡단주는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내원주에게 전쟁병이 도졌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물론, 흑룡단주에게 동조하는 의협심 강한 무인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후배들에게 진짜 무림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흑룡단이라면, 흑룡단원을 이끄는 조장들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군.”
* * *
새벽이 되어서야 흑룡단주와의 이야기가 끝났다.
참으로 머리가 아프다.
흑룡단주의 객관적인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는 간다. 무림맹이라는 집단은 천마신교처럼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마련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정사대전이 아니라 신교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칼을 뽑을 상황은 아니라는 뜻.
개인적으로 정파의 모든 문파가 합심하여 신교를 처단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그래. 아직은…….’
그렇게 오 조의 전각에 들어선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것이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찬찬히 그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조장님……!”
이새붕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새붕아, 시간이 늦었는데 안 자고 뭣 하냐?”
장난기 어린 말투.
이새붕은 내가 가장 편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조장님을 기다렸죠. 첫날인데 짧게나마 꼭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또 부조장으로서 보고드릴 일도 있고요.”
“보고?”
“예, 상세한 보고는 내일 드릴 건데요…….”
이새붕이 내게 다가와 힘내라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당 공녀님께서 서신을 엄청나게 많이 보내셨거든요. 그거 다 읽으시려면 날을 새우실 수도…….”
“아…….”
그녀에겐 임무차 멀리 떠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꾸준히 서신을 보냈나 보다.
“조장님, 그럼 부조장 이새붕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는 정말 인사만 하고 떠날 생각이었는지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떠나간다.
그래도 수하 하나는 정말 잘 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다고……?’
여러 상황에 복잡했던 생각이 풀어지는 듯하다.
그래, 일단은…….
‘무슨 말을 썼으려나.’
착각과 그리움
『장룡! 오늘 날씨가 정말 좋다. 난 오늘도 뇌공검법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어. 이제 사 성에 접어들었는데, 네가 해 준 조언 덕분에 고모님께 정말 천재가 아니냐고 매번 칭찬을 받고 있어. 그럴 때마다 난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정말 좋아. 참, 오늘 점심은 봉봉계를 먹었는데 네가 떠오르더라. 네가 닭 다리를 줬을 땐 얼마나 놀랐었는지. …… 후! 오늘도 열심히 수련했어! 회신은 없겠지만 그래도 매일 쓸게. 나중에 귀찮아서 다 안 읽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귀찮으면 안 읽어도 돼. 난 이제 잘게! 너도 잘 자!』
서신을 보면 완전 수련에 몰입한 날을 빼놓고는 거의 매일 보낸 듯하다.
아마 그녀는 매번 종이와 붓을 들고 다녔을 것이 뻔하다. 봇짐에 그것을 담고 다니는 그녀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미소가 어린다.
그렇게 서신 한 장을 정성스레 눈에 담는다.
무공서를 읽을 때처럼 휘릭 넘기지 않았다. 그녀의 글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가끔 날림체로 글을 쓸 때가 있는데, 그땐 시간을 내서 촉박하게 글을 적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독봉 당용아와 같이 수련할 때, 쓴 듯하다.
서신을 몰래 쓰다가 독봉에게 걸린 적도 있는데…….
독봉에겐 서신을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서신의 내용이 부끄럽다나? 뭐 당용아가 그것을 강제로 빼앗아 읽을 성격은 아니었다. 당옥정 몰래 서신을 빼돌려 읽을 수는 있더라도 말이다.
여러 상상을 하며 서신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때만큼은 천향옥로단의 욕구가 새어 나오진 않는 듯하다. 극도로 몰입하여 명상할 때와 같은 상황이랄까.
그렇게 난 앉은자리에서 당옥정의 서신을 모두 읽어 나갔다.
마지막 서신을 읽을 땐, 아쉬움에 조바심이 날 정도랄까. 그녀의 서신을 더 보기 위해서 미래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해남도에서 항상 긴장했던 내게 당옥정의 서신은 크게 다가왔다. 마음이 울린다.
‘마음이라…….’
천향옥로단을 취하고 나서 그걸 극복할 근본적인 방법은 경지의 상승이라 여겼다.
암천회주가 말했듯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환골탈태를 거친 후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당옥정의 서신을 읽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천향옥로단을 취하여 욕구가 늘었다고 하면, 내가 아니게 되는 건가?’
그걸 취한 후엔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이런 욕구를 가진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옥정의 서신을 읽고 즐거워하는 나는 그건 진짜 나인가? 사람의 감정이란 무공의 경지가 상승한다고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무공이란 지금 내 감정을 기반으로 펼치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 감정을 속이고, 경지의 상승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생각은 편의주의적인 생각이 아닐까? 과연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 정답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단지 당옥정의 서신을 읽고, 복잡했던 고민과 욕구가 사라졌다는 것에 여러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공은 초식을 펼치고, 내공을 다루는 게 전부는 아니다.’
난 내 재능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분명히 정파에서는 화경이라 부르고 사파에선 극마라 부르는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르리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그 이상. 현경(玄境)과 탈마(脫魔). 아버지에게 듣기로 그 경지는 재능으로만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라 했었다. 아버지의 말로는 현 무림에 그 경지에 접어든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었다.
그런 경지에 접어들기 위해선.
지금 내 고민이 중요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층 머리가 개운해진 느낌.
흑룡전에서 나온 뒤로는 고민이 많아졌다. 뭐가 가장 효율적인 길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당옥정의 서신을 보고 나니 어렴풋이 깨닫는 게 있다.
‘일단 회신부터 하자.’
그녀가 서신을 받으면 좋아하겠지?
당옥정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난 오늘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단목위, 조장님을 뵙습니다.”
“조연연, 조장님을 뵙습니다.”
“부조장 이새붕, 조장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각이 딱딱 잡혀 있었다. 인사하는 연습이라도 한 것일까? 처음 무공을 가르칠 때만 하더라도 중구난방이었던 세 사람. 동시에 절도 있게 포권지례로 예를 차리는 것을 보니 이제는 호흡이 잘 맞는 듯하다.
“그래, 반갑다.”
난 꼿꼿하게 선 세 사람의 주위를 걸으며 어깨나 등, 허벅지 등을 쿡쿡 찔러 보았다. 당연히 힘이 들어갔으며, 근육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해남도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단단해졌으며, 탄력이 생겼다.
‘근력 훈련은 게을리하지 않은 듯하군.’
하지만 이것으로 그들의 노력을 모두 판단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전에서 어떻게 싸우느냐. 광풍개가 잘 지도해 주었다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다를 수 있었다.
“한 명씩 나와 비무한다.”
“……!”
내 말에 세 사람이 긴장한다.
“겁나는 건가?”
“아닙니다! 조장님!”
가장 먼저 대답한 이새붕.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른다. 역시 첫 시작은…….
“부조장이 패기가 좋군. 좋다. 바로 시작한다, 이새붕.”
“아, 아닛……? 예!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새붕이 두 주먹을 꽉 쥔다.
당연히 난 모든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당히 힘을 제약하여 그들에 맞춰 비무할 것이다. 최대한 그들의 한계까지 끌어내면서.
“좋아. 다섯 수를 양보해 주지. 만약 내 몸에 한 번이라도 주먹이 닿으면, 새붕이 너에겐 특별한 선물을 주마.”
“특별한 선물이요……?”
“그래.”
“제 모든 것을 펼치겠습니다!”
이새붕이 기합성을 터트리며 자세를 잡는다.
그 자세만큼은 절정 고수 뺨을 친다. 뭐 자세만큼이나 실력도 따라올 것인지는 직접 겪어 봐야 알 것이다.
“와라.”
“하압!”
이새붕이 보법을 펼쳐 접근한다.
한눈에 봐도 과거보다 훨씬 발전한 이새붕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