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주.
정파의 심장이라는 무림맹이 있는 곳이다.
나와 설비연은 마차를 타고, 서평에서 정주까지 도착했다. 명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대부분 시간을 명상하며 내부의 기운을 다루는 것에 투자했다. 천향옥로단을 취한 후에 확실히 경지가 올랐다고 할 수 있었지만… 여러 감각이 예민해진 것은 조금 문제였다.
좁은 마차 안에서 설비연과 함께 있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뭐 이젠 그것도 끝이긴 하지만.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제 무림맹 안으로 들어왔다.
내성부터는 마차를 탈 순 없었다. 내성의 입구에선 총 다섯의 무인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설 조장님?”
설비연을 알아본 한 무인.
그가 소리치자 주변의 시선이 우리가 있는 마차로 쏠린다.
“헉! 정말 소문대로 안대를 차지 않으셨어. 정말 원래 눈을 다치신 게 아니었던 말인가?”
꼿꼿한 자세로 서서 내성의 입구를 경계하던 무인들도, 설비연의 등장엔 깜짝 놀랐다. 사실 설비연은 무림맹에서 꽤 유명했는데, 실력도 실력이지만 깐깐한 태도 때문에 하급 무인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었다고 한다.
설비연의 차가운 시선에 내성 경비를 맡은 무인들의 자세가 꼿꼿해졌다.
그리고 금세 그들의 관심은 설비연에게서 나로 향했다.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일까? 점창의 장로를 곤죽으로 만들었다던데…….”
“고검야 장로라면 무림맹의 장로로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역시 용봉지회의 우승자인가, 대단하군.”
“쉬쉿! 조용히 말하게. 단목 조장님의 심기를 거스리면 좋지 않다네. 그 소문을 듣지도 못했는가?”
이미 예민해진 청각에 저 멀리서 속닥이는 이들의 말소리까지 전부 들린다. 아무리 천향옥로단으로 감정이 풍부해졌다고는 하나, 저런 말을 듣고 분노에 젖진 않았다. 무슨 소문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경계 이상 무! 설 조장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목 조장껜 인사도 안 하나?”
“죄, 죄송합니다!”
내성의 경계를 서던 무사들이 허겁지겁 내게 인사한다.
해남도에서 보던 설비연과는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다. 이제 그녀와는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동등한 조장의 관계다.
내성 무인들이 우리 봇짐을 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직접 봇집을 들고 내성으로 들어갔다. 흑룡전, 그곳으로 가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먼저 흑룡단주에게로 가서 있었던 일을 보고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성으로 들어가 흑룡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무인 몇 명이 급하게 달려온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도련… 조장님-!”
이새붕과 단목위 그리고 조연연이 달려오고 있다.
세 사람은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내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나란히 선 세 사람이 꼿꼿한 자세로 내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한다.
“조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그들을 살펴본다.
서 있는 자세로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놀고 있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지 않아도 됐는데.”
“아닙니다! 조장님이 오신다는데 어찌 흑룡전 안에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부조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슬쩍 옆을 바라본다.
설비연의 조원들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만든 5조의 조원들은 흑룡단 내부에서 임무를 맡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이리 달려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설비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전…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수하들과 해우를 나누고 들어오시지요.”
“아니오. 먼저 흑룡단주께 보고부터 올리는 게 예의지. 해우는 나중에 연무장에서 나누자꾸나.”
내 말에 이새붕과 두 명의 조원은 긴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그럼 일단 연무장에서 몸을 좀 풀고 있겠습니다.”
“얼른 가요, 부조장님!”
조연연의 말에 이새붕이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이새붕 또한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시다, 설 조장.”
“…예.”
설비연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조원들이 마중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설비연이 차가운 모습을 많이 보여 주긴 해도, 그래도 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해남도에서 그녀와 계속 붙어 다녔으니 말하지 않아도 성격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왠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으음…….’
일단은 흑룡단주에게 보고하는 것이 먼저였다.
설비연과 함께 흑룡전으로 향한다.
그렇게 흑룡전에 거의 도착 했을 때.
“드디어 다시 만났군!
“응……?”
의외의 인물이 열망이 가득찬 눈으로 흑룡전 앞에 서 있었다.
“남궁일몽?”
왜요
남궁일몽.
그는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에서도 천재라 칭송받았다. 처음엔 천재라 불리는 것이,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불편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나이가 들며, 자신의 재능이 진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재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압도적인 재능엔 시기와 질투는 부질없었다. 대부분은 그의 재능에 결국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다 남궁세가주의 둘째 아들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 그는 역경 없이 자라났다. 육왕 중 한 명인 그의 아버지마저 언젠간 자신을 뛰어넘을 인재라 칭했으니 그는 걱정이 없었다.
천룡각.
정파 무림의 기재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남궁일몽은 인생을 즐겼다.
소무림이라 불리며 온갖 귀계와 정치가 판치던 그곳도 그에겐 소꿉놀이 장난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재밌었다. 처음엔 자신들의 알량한 출신을 믿고 천방지축으로 나서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그를 보면 시선을 내리깔았으니까.
그렇게 천룡각에서 즐겨 온 남궁일몽은, 처음으로 무림에 나설 생각은 한다.
계기?
단지 천룡각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을 뿐이다.
그는 그해에 열리는 용봉지회에 우승한 후, 그 기세를 몰아 해남도에서 사파가 주최하는 암천회까지 나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단목장룡.’
남궁세가에서도 유례없는 천재. 역대급의 천재라 불리던 남궁일몽이다.
그런데 그는 용봉지회의 결승전에서 자신보다 어린 사내를 만나 패배했다. 남궁일몽을 따르는 이들은 멋진 승부였다고 칭찬했지만, 글쎄. 남궁일몽이 보기엔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망연자실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첫 패배에 정신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는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의 손에서는 술이 든 호리병이 떠나질 않았다. 그를 알아본 몇몇 무인들이 이제 남궁일몽은 틀렸다며 소문을 낼 정도였다.
그러던 남궁일몽은…….
마치 꿈에서 깨듯 자연스레 그 패배에서 벗어났다. 딱히 외부적인 요인이 따로 있어서 그 좌절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단지 한량처럼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순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시에 단목장룡이 마지막에 펼친 유성일락이 떠올랐다.
패배한 순간 떠올렸던 깨달음이 그의 육신에 각인되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불현듯 찾아온다고 했던가? 남궁일몽은 꽤 오랜 시간을 낭비했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만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남들은 평생이 걸려도 단목장룡의 유성일락을 극복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남궁일몽은 그 순간의 깨달음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동시에 하나의 벽을 허물었다.
과거의 남궁일몽이었다면.
바로 단목장룡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지만 일반 비무도 아니고 용봉지회의 결승에서 패배한 남궁일몽은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허송세월하며 이렇게 성장했다면… 단목장룡은?’
부르르!
한순간의 깨달음도 잠시.
단목장룡은 이 순간에도 더 노력했을 것이며 더 성장했을 것이다.
남궁일몽은 무서웠다.
그와의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것이.
그 순간 남궁일몽은 하나의 소식을 들었다. 단목장룡이 흑룡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용봉지회가 끝나고 잠시 쉬어도 될 터인데, 단목장룡은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 있다. 그의 재능이 자신보다 압도적인가? 그것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용봉지회가 열리는 화음현에 와서도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수련광이라면 확실한 길을 찾아 놓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일몽은 그를 따라 하기로 했다. 남궁일몽은 어찌 노력해야 하는지 모른다. 배울 것이 있다면, 자존심을 부리면 안 된다.
그것이 남궁일몽의 결론이었다.
그는 결국 흑룡단의 여섯 번째 조장이 되었다.
* * *
‘근데 막상 무림맹에 와 보니 단목장룡은 없었지.’
흑룡단주에게 자신도 해남도로 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흑룡단주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울 것이 많다나? 과거의 남궁일몽이라면, 흑룡단주의 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으리라. 그의 뒤에는 남궁세가가 있었고, 남궁세가엔 검왕이 있다.
하지만 남궁일몽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흑룡단주는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많은 것을 가르쳤으며, 남궁일몽은 그 재능으로 흑룡단주의 많은 것을 이어받았다. 지금은 해남도로 가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단목장룡과 마주하니…….
‘이놈… 대체 뭐지?’
남궁일몽은 그에게서 나오는 묘한 내음에 긴장했다.
과거 천룡각에서 화산의 대제자인 무연하와 자주 부딪쳤으니 향을 활용하는 무공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검강(劍罡)은 매화 향이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의 중 오의였다. 내력의 소모는 물론이고 정신력 또한 대단히 많이 소모한다.
‘평시에도 저런 기운을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두르고 다녀? 말이 안 되잖아?’
남궁일몽은 그것이 무공의 일종이 아니라 천향옥로단의 기운을 모두 갈무리하지 못해 생긴 부작용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씁쓸한 패배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말 필요는 없다. 남궁일몽은 흑룡단에 오는 걸 결심했을 때부터, 노력하기로 했다. 그의 다짐은 고작 첫 만남에 깨어질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애써 냉정함을 되찾고.
동시에 반가움을 담아 말한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남궁일몽?”
혹여나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다. 자신은 단목장룡을 평생의 호적수로 결정했는데, 그의 입장에선 그냥 지나가는 잔챙이에 불과했다면? 남궁일몽 스스로가 그런 행동으로 많은 후기지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겁이 났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그를 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단목 소협. 아니, 오 조장님.”
그러고 보니 남궁일몽이 흑룡단의 무복을 갖춰 입고 있다. 더군다나 가슴엔 육이라는 숫자가 수놓여 있었다. 단목장룡이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흑룡단은 오 조가 끝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흑룡단에 들어온 겁니까?”
“맞습니다. 저도 흑룡단의 단원이 되었지요.”
남궁일몽이 흑룡단에 들어왔다?
확실히 의외였다. 그를 보고 있으면 과거의 단목장룡, 그러니까 사공천이 떠올랐다. 재능만을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때가 말이다. 그런 남궁일몽은 패배를 딛고 성장했다. 사공천이 그렇게 살았다면, 아마 그때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단목장룡에게 남궁일몽이라는 존재는 말이다.
“그렇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일몽이 단목장룡을 목표로 삼고, 평생의 호적수로 여기고 있지만… 단목장룡은 그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고 할까?
단목장룡의 가장 큰 목표는 천마신교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의 목을 자른 것에.
그의 옆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목숨값을 받아 내야 한다.
“설 조장님, 갑시다.”
“예.”
“……?”
남궁일몽을 지나치는 단목장룡.
그 모습을 보니 당황했다. 그가 바란 재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호적수의 재등장에 단목장룡은 입꼬리를 올린다. 남궁일몽은 그에 맞춰 검을 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적수. 남궁일몽은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목장룡과의 멋진 승부를 기대했다.
오늘 패배하더라도, 그 승부의 갈림길에서 그는 또 하나를 배울 것이기에.
긴장되긴 했지만 즐겁기도 했다. 그가 점창파의 장로를 가볍게 때려눕혔다는 말을 듣고선 더더욱 기대했다. 단목장룡의 저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아니……? 잠시만! 단목 조장님!”
“……?”
남궁일몽의 목소리에 몸을 돌린다.
“비무 하지 않으십니까?”
뚱딴지같은 질문에 단목장룡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요?”
“예?”
왜라는 말에 남궁일몽이 입을 벌린다.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여기서 “당신도 저와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까?”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게…….”
“저와 비무 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오 조의 전각에 찾아오시면 됩니다. 저도 오랜만에 남궁세가의 무공을 보고 싶군요. 그럼 이만.”
“…….”
단호하게 말한 단목장룡과 설비연이 흑룡전 안으로 들어간다.
남궁일몽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패배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