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36)

* * *

“대체 무슨 일이냐!”

“아버지···.”

염병춘이 반야문의 문주인 아버지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한다.

물론, 그들이 유리한 쪽으로 말이다.

“감히···! 서평에서 내 아들을 건드려···?”

반야문의 문주가 분노하고 있을 때.

점창파의 장로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주서호가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맞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분노한 상태였다.

“염 문주. 감히 서호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무림맹원까지 사칭했다고 하오.”

“사칭까지 했단 말이오? 그냥 넘어간다면 강호 동도들이 반야문과 점창파를 손가락질할 것이오.”

문주의 말에 점창의 장로 문인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강호의 쓴맛을 보여줘야겠구려.”

베다

반야문주 일검분혼(一劍焚魂) 염운경.

그는 하남성 서평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절정의 검객이다. 더군다나 그는 백여 명에 달하는 문도를 거느린 문파의 문주였다. 강호 무림 전체로 따지자면 절대적으로 갑의 위치는 아니었지만, 이곳 서평현에서 만큼은 염운경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아들인 염병춘이 외지인. 거기에 여인에게 당하고 왔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호인들에게 명성이라는 것은 때로는 목숨보다도 소중했다. 언젠간 반야문의 문주가 될 사내는 흠이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염병춘은 곧 무림맹에 입맹할 예정이었다.

무림 역사상 후기지수의 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지금 오늘 일은 염병춘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번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서호도 그 여자한테 당했다는 사실이지.’

그는 점창파 장로 고검야(孤劍爺) 거연창의 제자였다.

점창파는 운남성 점창산에 터를 잡은 문파로 구파일방 중 하나다. 염운경은 무림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명문 거파는 절대 자비롭지 않다. 넓디넓은 중원. 패권을 잡으려는 문파와 가문이 매 순간 생겨나는 곳이 바로 강호라는 곳이다.

그런 강호 무림에서 정점에 올라 있는 것이 바로 구파일방이라는 괴물이다.

반야문주 염운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절정의 실력으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었던 것은, 서평현에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번 기회에 점창파와 확실히 연을 맺어두는 것이 좋겠지.’

저수호와 염병춘이 친우 사이라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점창파와 반야문이 끈끈한 정으로 묶여있는 것은 아니다. 점창파라는 거대한 세력은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며 점창의 장로인 거연창과 확실한 연을 맺는다면?

자신은 서평현에 만족했지만, 그의 아들인 염병춘은 더 넓은 세상을 품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아들을 무림맹으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허나··· 조금 이상하긴 하군.’

하남성은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는 무림맹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서 무림맹원을 사칭한다? 더군다나 설비연이라는 여인은 꽤 유명했다. 북해빙궁이 마교에 의해 멸문당했다곤 하지만 결코 부족한 문파는 아니었다. 그들의 무공은 구파일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도 있었다.

더군다나 설비연은 그 북해빙궁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은 빙궁주의 딸.

무림맹에 처음 왔을 때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북해빙궁의 무공, 타고난 재능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

그녀는 어린 나이에 흑룡단의 조장이 되었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여인이다. 거기에다 그녀의 더러운 성격은 하남성에서도 꽤 유명했다.

누군가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성격상 바로 찾아와 검으로 사칭범을 심판하리라. 제정신이 박힌 이라면 하남성에서 흑룡단 조장을 사칭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반야문주는 한 번 더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병춘아.”

그들이 묵고 있다는 자미 객잔으로 향하던 네 사람.

반야문주의 말에 모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예, 아버지.”

“설비연을 사칭했다던 여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느냐? 정말 두 눈이 멀쩡히 있었느냐?”

“예,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방심한 틈에 기습한 여인의 얼굴을요.”

사실 염병춘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변호할 말을 하며, 사칭범을 깎아내렸다. 방심과 기습은 참으로 오묘한 단어다. 실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도 당당할 수 있었으니까. 더 문제인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문주님, 저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 여인은 안대를 차지 않았고, 두 눈이 멀쩡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주서호가 말을 보탠다.

반야문주는 두 사람의 확신에 찬 얼굴을 보고 꺼림칙한 감정을 씻어낼 수 있었다. 약에 취하여 착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이 안대를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 여자는 분명히 설비연이 아니다.

거연창은 그런 반야문주를 보며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 여인이 설비연이라도 전혀 상관없소.”

거연창의 말에 반야문주의 마음이 더 든든해진다.

그가 있다면 사실 어떤 이들이 와도 두렵지 않았다. 정말 설비연이라 해도 그녀에겐 북해빙궁이라는 배경 따위는 없었으니까.

“감히 본파의 제자에게 함부로 손을 쓴 것은 내가 직접 단죄할 것이오. 반야문주께선 걱정할 필요 없으시오.”

“하하하! 걱정이라니요! 단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려고 물었을 뿐이오! 나 또한 그 여인이 설비연이라 해도 전혀 봐줄 생각이 없으니 말이오.”

점창파의 장로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을 보고 염병춘이 눈을 빛냈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연창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반야문주께선 나와 뜻이 잘 통하는 듯하군. 그럼 얼른 갑시다.”

“좋소이다.”

점창파의 장로 거연창을 필두로.

진짜 설비연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네 사람이었다.

* * *

자미 객잔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한다.

해남도에서 극에 치달았던 욕구는 잠재웠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가끔 머릿속을 관통하는 생각에 이번 여정에서 고생을 좀 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설비연이 알몸으로 눈앞에서 자고 있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모르게 설비연에게 시선을 둔다.

사내가 아닌 수컷의 본능이라 할까? 아마 설비연도 그 시선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나는 설비연에게 어떠한 몰상식한 부탁은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천향옥로단을 취한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분명히 몸의 감각이 극대화되어 생긴 부작용은 있지만, 반대로 얻은 것도 많았다. 특히 ‘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컸다.

섬서성에서 화산파의 대제자인 무연하와 맞붙은 적이 있었다.

만화천검(萬花天劍).

매화향을 흩뿌려 적을 미혹시키고, 환상 속에서 죽어가게 하는 무공. 내공의 소모가 컸지만, 직접 맞붙어보니 확실히 괜찮은 무공이라 느꼈었다. 무연하가 아닌 화산의 장문인이 펼치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그런데 천향옥로단을 취한 후, 나는 그와 비슷한 무공을 내력의 소모가 거의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마치 갈유화가 펼치는 탕백환희소와 유사하게 말이다. 그녀가 무공 구결을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내 옆에서 살 내음을 마구 퍼트린 적이 있다.

난 그때 어떤 방식으로 이 향을 활용해야 할지 깨달았다.

‘만화천검과 탕백환희소는 다른 듯하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다.’

내공의 거의 소모하지 않고 향을 다룰 수 있다면 사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존재했다. 그런 식으로 향을 활용하면 나 또한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즉, 욕구의 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진다. 해남도로 떠나온 이후 줄곧 그것을 제어할 방법을 연구하여 발정난 짐승처럼 행동하진 않았지만··· 이 문제는 언젠간 꼭 극복해야 했다.

사람인 이상 쾌락을 추구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선은 지키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상상을 뒤로하고, 해우심법으로 내공을 운용한다.

‘집중.’

방 내부에 퍼진 자연의 기운을 느낀다.

몰입이 강해지며, 잡념을 잊어간다. 이런 과정이 반복하여 수련한다면···.

쿠웅-!

그때 내 몰입과 집중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소음이 바깥에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선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고, 몰입에 빠지려는 순간 그것이 깨졌으니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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