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암천회의 분타.
그곳에서 온갖 진귀한 약재를 쏟아부은 탕에서 피부 가꾸기에 여념이 없는 한 여인. 뽀얀 살결을 만족스러운 듯 내려다보는 갈유화였다.
중요한 날을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했기에 그녀는 최근 목욕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웬만한 사안이 아니고선 분타의 누구도 갈유화를 방해할 수 없었다.
“소회주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목욕하는데 무슨 보고?”
밖에서 곡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곡위는 그녀가 아끼는 수하이긴 했지만, 중요한 목욕을 방해한 죄는 크다. 오랜만에 성격을 보여줘야 하나 싶은 갈유화였지만···.
“칠교공자가 나찰마궁과 연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장천의 객잔에···.”
“뭐얏!”
갈유화가 탕에서 벌떡 일어섰다.
평소라면 몸을 말리는데도 퍽 긴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대충 물기만 닦고 옷을 입은 후에 밖으로 나왔다.
곡위는 그 속도에 감탄하여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분타주를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갈유화의 눈빛에 분노가 일렁였다.
“감히 비겁하게 낭군님을 합공하려 해? 뢰극찰 병신 같은 놈이···!”
진심
나찰마궁의 자미소.
자줏빛의 기운이 그의 몸에서 일렁거린다. 어찌나 거대한 기운인지 관전하던 군중들이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원초적인 두려움. 가까이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나찰마궁이 내공을 모으는 방식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특별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괴한 수준이다.
그런 방식으로 내공을 모은 뢰극찰.
무려 5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나찰마궁 뿐 아니라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 정도 내공은 절대 흔한 것이 아니다. 나찰마궁의 전폭적인 지원과 타고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사실 나찰마궁의 직계들은 그 괴이한 내공을 모으는 방식에 단명하곤 하는데, 뢰극찰은 그러한 방식이 체질에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생명을 갉아먹고 성장한 뢰극찰은, 또래에 비해 내공만으로는 최강이라 칭할 만했다.
그렇기에 뢰극찰은 자신이 있었다.
‘혈발악존? 그딴 놈도 내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면 끝이지.’
그는 나찰마궁주의 뒤를 이어 궁의 지배자가 될 사람이다.
혈발악존이 사파 내에서 유명한 마두이긴 했다. 하지만 급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온갖 진귀한 영약을 접하고, 다섯 살이 되는 해에는 벌모세수를 받았다.
최근 들어서는 5갑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 내공으로 눈앞의 장천이라는 버릇없는 놈을 교육하기엔 충분했다. 뇌전이라는 특별한 기운을 사용하긴 했지만, 나찰마궁의 자미소는 상성이 없었다. 어떤 기운이든 받아낼 수 있었다.
자줏빛 강기.
혈세귀막의 소막주인 화무기와 부딪쳤던 것보다 더 진한 빛이 일렁인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갈래의 채찍처럼 주변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나찰마궁의 절기가 바로 나오자 군중들은 그 위력에 경악의 시선을 보낸다.
“···정말 미쳤군. 나찰마궁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은 들었지만··· 대체···.”
“무공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진법을 몸에 달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군···!”
“저 자줏빛의 강기를 보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통 무의 극한에 오르면 미(美) 또한 그러한다더니!”
저마다 자신의 무공이론에 따라 뢰극찰의 자미소를 해석한다.
모두 그의 무공이 아름답다거나 가까이하기엔 무서운 꽃이라며 감탄하고 있었다. 당연히 뢰극찰의 어깨는 올라갔다.
‘어디···.’
뢰극찰의 시선이 장천에게로 향한다.
그는 어떤 눈빛을 보여주고 있을까? 두려움? 경악? 감탄? 아니면 절망?
그런 기대감을 품고 장천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뢰극찰이 예상한 표정이 아니다. 장천은 전혀 절망하긴커녕 두려움과 감탄의 눈빛도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혐오···?’
뢰극찰은 상대의 표정이나 눈빛을 잘 읽는 편이다.
그는 자라오며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다. 개중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득바득 대드는 놈들도 있었으며, 포기했지만 혐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놈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장천의 표정은 이제껏 경험해왔던 어떠한 시선과도 달랐다.
단지 혐오감만 가득했다. 자미소의 그 압도적인 위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순간 뢰극찰의 이마가 꿈틀했다.
‘실제로 마주하면 그딴 건방진 표정을 유지할 순 없을 것이다.’
고오오···!
자미소의 기운이 더 강해진다. 자줏빛 기운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파밧!뢰극찰이 참지 않고 앞으로 돌진한다. 비무를 보는 대부분 군중이 뢰극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저 강대한 기운을 어찌 막아내리? 저것은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저것을 막아낼 수 없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줏빛의 강기를 휘감고 있는 뢰극찰과는 달리 장천은 초라했다.
검에 뇌전이 맺혀있긴 했지만, 자미소가 보여주는 위용 앞에서는 참으로 작아 보일 뿐이다.
당연히 뢰극찰이 장천을 압도하겠지라는 생각이 팽배해진 순간.
뢰극찰의 자미소와 장천의 뇌전이 부딪쳤다.
쿠우웅!
“···!”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히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준 뢰극찰. 장천이 밀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전의 격돌에서 밀려난 것은···.
뢰극찰.
나찰마궁의 소궁주였다.
‘이게 무슨···?’
그의 몸 전체에 맺힌 자줏빛 강기는 호신강기였다. 혈발악존이 단목장룡의 뇌전에 당해 감전당한 듯이 제대로 육신을 움직이지 못한 것을 보았다. 단순히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나름 실리적인 계산도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비는 전혀 소용없다는 듯이.
파지지직···!
자미소의 그 거대한 기운 속을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장천의 뇌전이다. 뢰극찰이 단전에서 더 많은 내력을 끌어낸다. 이 빌어먹을 뇌전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같잖은 재주를 가지고 있군!”
장천의 뇌전이 서서히 흩어져간다.
처음엔 연기처럼 일렁이던 자줏빛의 기운이었지만, 이제는 더욱 구체화되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몸을 침범하려 했던 장천의 뇌전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이딴 걸로 본궁의 자미소를 뚫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그 쓰레기 무공이 자미소인가?”
“뭐라···?”
나찰마궁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자미소는 나찰마궁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걸 쓰레기 무공이라 칭한다고? 나찰마궁 쪽에선 대존자만 표정의 변화가 없었을 뿐이었다.
“감히··· 네가 정신 줄을 놓았나 보구나!”
뢰극찰이 소리쳤다.
그리고 이제는 더욱 진한 자미소가 맺힌 상태로 장천에게 돌진한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자미소에 닿기만 해도 살점이 찢겨나갈 정도로 유형화되어 있었다.
후우우웅!후욱!
자미소를 기반으로 한 연옥권(煉獄拳).
그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자미소의 기운이 상대를 압박한다. 주먹을 방어한다 할지라도 종국에는 자줏빛 기운의 연옥에 갇혀 절명하고 마는 나찰마궁의 절기.
뢰극찰이 굶주린 맹수와 같이 장천을 인정사정없이 압박했다.
구웅!
쿠우우웅!
자주색이 공간을 수놓는다. 어찌나 많은 양의 내력이 순간적으로 나온 것인지 공간 자체가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그 속에 있는 장천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단목장룡을 철저히 믿고 있는 설비연조차 심장이 뛸 정도로 강력한 무공이다. 사실 그가 사용하는 뇌전검법도 강했지만, 그의 진짜 절기는 따로 있었다. 뢰극찰을 상대하려면 용봉지회 결승에서 보여주었다던 유성환상검을 꺼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라면 분명히 이겨낼 거야···.’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주색으로 물든 공간을 지켜보고 있을 때.
쿠르응!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벼락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장천의 검에서 한줄기 섬광이 자줏빛 공간을 꿰뚫고 나왔다. 분명히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시야에서 보이는 광경이 너무 대단했기에 그 소리조차 큰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크허억!”
계속해서 장천을 압박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뢰극찰.
그는 입가에 피를 토하고 물러섰다. 몸 전체를 감싸던 자줏빛 기운이었지만, 지금은 어깨 부근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어떻게 연옥을 뚫고···?”
뢰극찰의 5갑자의 내력으로 유지되던 연옥이 서서히 흩어져간다. 단목장룡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넝마가 된 옷과는 달리···.
‘상처가 없어?’
그 모습에 처음으로 나찰마궁 대존자의 눈빛이 꿈틀한다.
여유롭게 비무를 지켜보던 칠교공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각한 눈으로 장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5갑자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것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보통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평균적으로 백 년의 내력을 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뢰극찰은 그에 세 배였다. 그가 작정하고 펼쳐낸 연옥권에서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수 있나?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네놈 분명히··· 내가 네놈이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거늘···!”
지금 뢰극찰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군중들이 의아한 눈을 한다.
하지만 뢰극찰의 말은 사실이었다. 분명히 그는 연옥에 갇혀 허우적대는 장천의 모습을 보았다. 살려달라며 부르짖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자미소의 기운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분명히 그러했을 터인데···.
장천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기회를 보아서 놈에게 감각의 혼동을 심어줬을 뿐이다. 유성환상검은 쾌검을 펼치긴 하지만, 결국 환(幻)을 추구한다. 아직 유성환상검의 극의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감각 정도는 혼동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더럽고 추잡한 자미소라는 무공을 익힌 놈은, 약간의 혼동을 주었을 뿐인데 환상까지 사로잡힌 듯했다.
‘무식하게 내력만 많은 놈.’
장천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저 거대한 자줏빛 내공을 어디서 얻은 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강제로 강탈해서 모은 내공이다.
강호 무림은 아니, 이 세계는 양육강식이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짐승들도 동족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 자미소라는 무공이 뭘 추구하는지 모르겠지만···.’
단목장룡의 눈빛이 낮아진다.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선사해주마.’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찰마궁의 소궁주가 죽는다면, 나찰마궁과의 혈전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아니다.
장천이 흐르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뢰극찰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 속도는 절대 느리지 않았다.
“크읏!”
뢰극찰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일까? 그의 몸에서 자줏빛의 기운이 폭발했다. 사방에 퍼져나가는 지독한 악의. 그의 내공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 내력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흡수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고 단목장룡의 검은 그 지독한 악의를 뚫어냈다.
‘분명히 뢰극찰의 내력은 많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내력만 많이 늘렸지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뢰극찰의 수준으로 이 거대한 기운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그가 장천을 몰아세웠으리라.
뇌왕의 뇌공검법.
그것은 무언가를 꿰뚫기 위해 태어난 무공이었다.
그 무공이 의도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한 단목장룡의 검에서 찬란한 뇌전이 맺힌다.
그것은 자미소의 거대한 악의를 꿰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끝이다.’
장천의 검이 뢰극찰의 하복부에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찌릿!
거대한 살기.
뢰극찰의 자미소와 그 느낌은 비슷했지만···.
비슷한 것은 느낌뿐이었다.
장천은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며 등골이 서늘하다. 이대로 검을 찔러넣는다면 뢰극찰은 분명히 큰 내상을 입게 된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장천이 황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거대한 살기가 그의 옆을 지나쳐갔다.
“···.”
장천이 고개를 든다. 황급히 검로를 수정하느라 역류한 내력이 세맥에 마구 들끓는다. 그는 그 내력을 낭비하기보다 최대한 잠재우려 애썼다. 그의 검에 맺혀있던 뇌전의 기운이 서서히 흩어진다.
“뢰극찰 혼자 싸운다고 하지 않았나?”
나찰마궁의 대존자.
그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손짓할 뿐.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어줘야겠군.”
거대한 살기.
대존자의 지시에 나찰마궁의 무인들이 포위망을 형성한다. 황급히 설비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미 그녀의 몸에서는 냉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 또한 상황이 심각함을 감지한 것이다.
‘대존자라···.’
장천 아니, 이제는 단목장룡의 이름을 사용할 때이다.
뇌전검법이 최상승의 무공은 확실했다. 하지만 유성환상검은 단목장룡의 육신으로 펼칠 수 있는 최적의 무공. 그것을 사용해야지만 저 대존자와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목장룡의 마지막 일수에 놀라 뒤로 넘어졌던 뢰극찰.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단목장룡을 노려보고 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뢰극찰은 그 말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아니. 네놈만 죽이면 된다.”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단지 비무를 구경하려고 모였던 군중들이 조금씩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미 멀찍이 도망친 자들도 존재했다.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쾌락이 중요하더라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 설비연, 너는 도주하는 척하고 객잔 내부로 들어가라. 진법의 힘을 받아 싸워.
- 주공! 저도 같이 옆에서!
- 아니다. 네가 나찰마궁의 병력을 분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날 도와주는 거다.
설비연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단목장룡이 천천히 해우심법을 일깨운다. 그의 눈빛에서 귀기(鬼氣)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뢰극찰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운에.
대존자의 눈빛이 더 깊어진다.
‘이런 놈이 있었다니. 여기서 필히 죽여놓아야 한다.’
대존자가 그리 마음먹고 있을 때.
“그만 멈춰라!”
암천(暗天)이라는 글자가 가슴팍에 수놓아진 흑의의 무인들이 장내에 진입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 곳은.
단목장룡의 옆이었다.
“공자님, 늦어서 정말 죄송해··· 욧···!”
물기도 제대로 빼지 않아 축 젖은 머리카락.
갈유화는 허겁지겁 달려와 단목장룡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소강
“유화! 너 지금 뭣 하는 거냐!”
뢰극찰이 분노가 깃든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갈유화는 마치 단목장룡의 편에 서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황당했으며, 분노했다. 갈유화가 대체 왜? 설마 두 사람의 사이가 벌써? 색욕에 미친 사내답게 뢰극찰의 머릿속엔 더러운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한 상상 속으로 추락하던 뢰극찰.
그의 몸에서 더욱 진한 농도의 살기가 흘러나왔다.
“소궁주님.”
대존자가 뢰극찰을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 덕분에 뢰극찰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갈유화를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네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느냐? 갈유화!”
뢰극찰의 그런 분노에도.
지금 갈유화는 정신이 없었다. 그때 보았던 눈빛. 사파 내에서 압도적인 배경으로 자라났던 그녀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눈빛. 지금 단목장룡의 눈빛이 그러했다. 귀기가 깃들었다. 무공을 익힌 인간이라면 눈에 살기를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뭔가 다르다.
원초적인 두려움. 그것을 바라보면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는 느낌이랄까? 보통 사람들은 단지 등골이 오싹하다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원체 감각이 예민한 갈유화는 단목장룡의 눈빛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만물을 발아래 두는 눈동자.
어떠한 것도 침범하게 두지 않겠다는 그 강인함이.
갈유화의 육신을 당황하게 했다.
“히끅!”
“···.”
단목장룡은 모든 것을 내보일 생각이었다.
나찰마궁의 대존자는 절대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뢰극찰만 하더라도 단목장룡에게 쉽게 밀리는 듯했지만, 아직 내력이 충만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백광 존자와 다른 나찰마궁의 무인들.
벅찬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는데···.
‘갈유화.’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단목장룡은 그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뽑아낼 것은 뽑아내고, 만약 일이 틀어지면 그녀를 고문이라도 해서 정보를 뜯어내려 했었다.
‘근데 도와주러 와서 왜 저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단목장룡이 의아해할 때.
갈유화가 홱 시선을 돌린다. 이 이상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릴 듯하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그녀 자신도 몸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극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갈유화가 뢰극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뢰끅··· 차알···!”
“···.”
딸꾹질하는 모습.
매번 여유가 가득한 행동으로 뭇 사내들을 설레게 했던 갈유화. 머리카락이 마르지 않아 묘하게 빈틈이 보였는데, 딸꾹질까지 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린다. 갈유화는 이 딸꾹질을 멈춰보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갈유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나? 우리와 싸울 셈이냐?”
“암천제를··· 재미없게··· 만들었으니까···!”
갈유화는 최대한 말을 느리게 하여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뢰극찰은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다.
암천제를 재미없게 만들었다?
“무슨 헛소리를! 암천제를 내가 재미없게 만들었다고?”
순간 뢰극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간다.
혈세귀막과 모종의 합의를 보고 승부를 봤었다. 해남도 사람들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니다. 갈유화가 그것 때문에 나찰마궁과 이리 맞설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갈유화는 암천회 해구분타주까지 데려왔다. 가장 많은 이들이 출입하는 해남도의 항구. 과거부터 그곳은 해남도를 점령하기 위한 전초기지라 할 수 있었다.
암천회도 해구현부터 시작하여 여모봉을 장악했다.
과거 해남도의 패자였던 해남파는 암천회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데, 그것을 대비하여 해구현에는 암천회에서 서열 5위 안에 드는 장로가 분타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왔다는 것은··· 갈유화가 진심이라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 설마 그 장천이라는 놈과 끝까지 간 것이냐! 정녕!”
사내의 분노.
뢰극찰은 이런 감정이 생소했다. 무엇이든 다른 자의 것을 빼앗기만 하던 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심장이 콕콕 쑤시고, 호흡이 가빠진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저놈만 죽이면 내게 돌아오겠지.’
애초에 갈유화는 뢰극찰에게 간 적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갈유화는 그의 말에 움찔했다.
뢰극찰의 말에 겁을 먹었다기보단 장천의 이야기가 나오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갈유화가 슬쩍 뒤를 돌아본다. 단목장룡은 처음 귀기가 눈빛 그대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단목장룡도 그녀를 마주한다.
“히끅···!”
갈유화가 다시금 딸꾹질한다. 그것을 본 단목장룡이 천천히 갈유화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 멀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 도망가지 마라.
그의 전음에 갈유화의 움직임이 굳어진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단목장룡.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아···!”
갈유화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묘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 스며든다. 아직 단목장룡의 눈빛은 귀기로 일렁거렸지만, 심신은 더없이 안정되고 있었다.
‘딸꾹질이 멈췄어···.’
갈유화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뢰극찰의 표정이 더 사납게 일그러진다. 마치 보란 듯이 신체를 접촉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조차 갈유화의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거늘! 그것을 시도해본 적은 많았지만, 갈유화는 매번 여우처럼 여지를 주고 빠져나갔었다.
그런데 지금 갈유화는 새색시처럼 그에게 몸을 내주고 있었다.
“대존자, 안 되겠습니다! 저놈을 지금 당장···!”
뢰극찰이 소리쳤지만, 대존자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무심하게 그를 바라볼 뿐. 그의 눈빛에 뢰극찰이 움찔한다. 대존자는 소궁주인 뢰극찰도 어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와 마주한 느낌이 든다.
잠시 뢰극찰을 바라보던 대존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뢰극찰은 자연스레 대존자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흑면패왕···.’
암천회의 장로 중 하나이며 해구분타의 분타주.
그가 검은 가면을 쓰고, 대존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존자가 강하냐 흑면패왕이 강하냐. 뢰극찰은 대존자가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했지만, 결코 쉽게 승부가 나진 않으리라. 더군다나 여기서 두 사람이 싸운다면···.
‘혈세귀막 그 피에 미친 놈들이 좋아하겠지.’
뢰극찰이 가끔 무식하고 단순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후계자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온 인물이었다. 현재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난 이번 일을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암천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재미에요. 나찰마궁은 혈세귀막과 제대로 된 싸움을 보여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칠교공자와 연합하여 한 사람을 합공하고 있지요. 이번 암천제를 주관하는 입장으로서 더 지켜볼 수는 없었답니다. 양해를 부탁드려요.”
이제는 완전이 안정을 되찾은 갈유화.
그녀의 말에 뢰극찰의 이마가 꿈틀한다. 처음엔 딸꾹질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장천이라는 놈이 어깨에 손을 얹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저리 얄밉게 외친다.
“정말 그 이유뿐이냐? 암천회가 장천을 지원하는 게?”
뢰극찰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 않소.”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대존자였다.
그의 낮은 외침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너무도 자연스레 목소리에 내력을 담았다. 보통 목소리에 내력을 담으면 소리가 찢어지거나 너무 커지기도 하는데, 적당한 목소리로 가까운 거리에서 말하는 듯했다.
주변까지 똑같이 그 목소리가 들렸으니 대존자의 내력 제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극마···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아마 그에 가까운 경지에 올라 있으리라.
단목장룡의 눈빛이 깊어진다.
“암천제엔 누구와 연합하지 말라는 규칙이 없소. 그렇기에 암천회가 장천과 연합을 맺는다고 하여 이의를 제기할 순 없을 것이오.”
“네, 정확하세요.”
갈유화가 미소를 지으며 대존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뭔가요?”
“그를 감당할 수 있겠소?”
묘한 질문이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당연히···.
‘내가 감당할 수 없기에 더욱···.’
하지만 갈유화는 그 생각을 그대로 답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대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런 일로 암천회와 싸울 수는 없지. 우리가 물러나도록 하겠소.”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대존자!”
하지만 이내 대존자가 발하는 깊은 눈빛에···.
뢰극찰은 결국 그것을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싸우면 나찰마궁만 손해라는 것을.
뢰극찰이 분노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단목장룡을 노려본다.
그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진심으로 싸우려고 준비하던 단목장룡은 일이 싱겁게 끝날 분위기가 되자 조금 허탈했다. 사실 기대감도 있었다. 지금 자신의 경지는 무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일까? 아직 육왕이니 오성이니 하는 자들에겐 닿을 수 없었지만, 대존자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단목장룡이 제대로 무공은 익힌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수십 년을 무공에 매진한 무인이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기회는 또 오겠지.’
단목장룡은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뢰극찰의 눈빛으로 보면 언젠간 저놈과 다시 부딪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단목장룡은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으리라.
“그럼 우린 패배를 시인하고 떠나도록 하겠소.”
대존자가 그리 말하자 나찰마궁의 무인들이 포위망을 풀었다. 그러자 당혹스러운 것은 칠교공자였다. 그는 원래 혼자서 싸우려 했었다. 무력으로 강제로 연합을 맺더니, 지금도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거 참···.’
그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어쩔 수 없나.’
칠교공자 또한 이 자리에서 패배를 시인한다.
“저도 그럼 패배를 시인하지요. 싸우지도 못했지만, 장 소협의 무위에는 감탄했습니다.”
칠교공자의 말에 뢰극찰의 이마가 꿈틀했지만, 뭐라 따지진 못했다. 사실 따져보면 그는 장천에게 보기 좋게 패배했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제기랄. 장천···!’
뢰극찰이 몸을 돌리자 나찰마궁의 무인들 또한 그를 뒤따른다.
그들이 떠나가고, 단목장룡이 칠교공자에게 다가간다.
“칠교공자.”
“예, 장 소협.”
단목장룡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칠교공자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주는 그 미소에 흠칫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기세를 끌어올리지도 않았으며, 살기 또한 없었다.
“다음에 보도록 합시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할 듯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외로 가벼운 인사다. 칠교공자는 안심했다. 이대로 암천회와 같이 자신을 합공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예,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목장룡은 이제껏 본선에서 만난 모든 마두들의 목을 베어냈다.
패배를 시인하더라도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일이 잘 풀렸다.
그렇게 칠교공자까지 자리를 떠나가고 갈유화가 단목장룡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눈동자엔 기대가 잔뜩 담겨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군.”
갈유화가 아니었으면 위험한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아니에요. 저도 좋았답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단목장룡이 갈유화를 빤히 바라본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는 칠교공자에 대해서 모두 말하지 않았다. 그와 싸우고 싶다고 했을 때, 위험할 수도 있다며 단목장룡을 만류했었다. 암천회의 소회주. 그녀는 칠교공자가 신교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오늘 밤 모든 것을 알아내야겠군.’
칠교공자는 천마신교의 사람이 분명했다.
오늘 밤 장천은 그를 찾아갈 것이다. 단목장룡이 아닌 사공천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다음은 갈유화. 널 찾아가지.’
슬슬 천마신교의 꼬리가 잡히고 있었다.
세맥 고문
밤이 깊었다.
칠교공자가 어디서 묵고 있는지는 이미 알아놓은 상태. 혹여나 그놈이 도망치진 않을까 걱정되어 나찰마궁과의 싸움이 끝난 후, 그 주변을 맴돌며 감시했다. 혹시 칠교공자의 조력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감각에 걸려드는 것은 없었다. 그는 지금 혼자였다.
땅에 어둠이 깔리고, 밤에도 시끌벅적한 해남도의 소란이 잦아들 무렵.
나는 칠교공자가 머무는 곳으로 잠입했다.
이번에는 설비연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칠교공자에겐 알아낼 것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설비연이 지금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명문 정파의 자제가 알면 이상한 것들을 난 알고 있었다. 뭐 칠교공자에게도 그것을 다 드러내 보이진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은소 객잔과 마찬가지로 칠교공자가 머무는 객잔은 상당한 고급 객잔이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방 안에서 놈을 심문해도 되겠군.’
주의를 기울인다.
천유보를 극성으로 펼쳐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다. 숨소리마저 조절하여 기척을 최대한 줄인다. 이미 낮에 칠교공자가 머무는 방을 알아냈다. 아주 천천히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는다. 오늘 지하에서 얻은 칠교공자 방의 여분 열쇠. 그것으로 문을 열면 소리가 크지만, 난 기막을 활용하여 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최대한으로 줄였다.
이미 검강을 활용할 단계가 지난 후부터는 적당한 범위의 기막을 펼쳐낼 수가 있었다.
이것도 언제 활용할지 몰랐기에 꾸준히 수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아주 천천히.
문이 열렸다. 내가 어떤 소리도 내지 않게 주의를 한 것도 있겠지만, 칠교공자는 암천제에서 탈락하여 이제 공격받을 일이 없기에 긴장을 놓은 것이 주효한 듯했다.
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뛴다.
드디어 신교의 인물을 만난다.
‘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수십 가지의 생각이 떠오른다.
4공자였던 사공천이 죽음 뒤에 천마신교는 어떻게 변했나? 지금 소교주는 아직 사도명인가? 신교가 인물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수라마검은 왜?
그리고···.
‘영령은 어떻게 됐을까?’
십만대산에 들어가지 않고도 신교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칠교공자는 무공의 수위를 보면 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으리라.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알아낼 순 없긴 하겠지만···.
천천히 칠교공자에게 다가갔다.
놈이 깨어나기 전에 점혈하여 움직임을 봉할 생각이었다.
“···!”
그렇게 일정 거리를 다가간 순간.
칠교공자가 번쩍 눈을 떴다. 문을 열고 진입할 때까지만 해도 놈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자 드디어 눈치를 챈 듯했다. 무공의 수위가 높은 이들은 감각이 매우 예민하다. 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은 청각만이 아니었으니까.
칠교공자의 행동은 재빨랐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놈은 침상에서 번쩍 튀어 올라 내게 손을 뻗는다.
쉬이익-!
‘빠르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을 참인데도 움직임이 빠르면서도 정확하다. 내 급소를 정확히 노려온다. 놈이 어떤 수련을 해왔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일 뿐이다.
난 이미 객잔에 들어선 순간부터 단전의 내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칠교공자가 반격을 한다면 바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관자놀이를 향하던 놈의 두 손가락을 피해내고, 나 또한 손가락을 뻗었다.
순간적인 내 움직임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찰나의 순간.
칠교공자의 아혈과 마혈을 점했다.
이제 그놈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꺼풀뿐이었다.
‘점혈이 실패할 뻔했군.’
점혈은 만능이 아니다. 점혈이라는 것은 상대의 혈도에 기를 불어넣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일정 수준의 고수라면 혈도 부근에 기의 막을 만들어 다른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이리 쉽게 점혈되지 않았으리라.
작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달빛. 언뜻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짐승의 그것처럼 번쩍였다.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
“···.”
당연히 대답하지 못한다.
아혈을 점한 상태였으니까. 놈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강제로 점혈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내공을 이용하여 점혈을 풀 방법도 있었지만··· 나는 다시금 제대로 점혈하여 놈이 쉽사리 그것을 풀지 못하도록 했다.
칠교공자의 눈동자가 더욱 사나워진다.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내 얼굴을 보자 놈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 눈이 말하는 의미는 명확했다.
왜?
아마 그것이 궁금하리라.
“난 네가 천마신교의 교도라는 걸 알고 있다.”
“···!”
“그러니 숨기지 않아도 된다. 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거든.”
“···!”
놈은 눈동자로 말한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것이 부정인지 놀람인지 말이다. 지금은 그놈의 생각을 알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놈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작은 것 하나라도 말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조금 아플 거다.”
칠교공자의 손목을 잡는다.
직접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시각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교도라면 그런 고문쯤은 쉬이 견뎌낼 것이다. 오히려 고문하는 사람이 지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부를 침식하는 고통이라면?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고문을 꼽아보자면, 분근착골이 있다. 상대의 근골을 튀들리게 하여 막대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지.’
난 수많은 무공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내공이 놈의 세맥에 침투한다. 그리고 그 기운은 상대의 세맥을 조금씩 찢어놓는다. 세맥은 무인의 육신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전에 기를 쌓고, 단련하는 무인들에게 가장 예민한 곳이 어딘지 물어보라면 단연코 세맥이리라. 난 그곳에 고통을 가할 최적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난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칠교공자의 몸속에 내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표현할 수단이라곤 눈동자밖에 없는 칠교공자.
놈의 눈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