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처는 괜찮나?”
“예. 이 정도 상처는 일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설비연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마 그녀의 몸엔 흉터가 가득하리라. 흑룡단에서 지옥 수련이라며 단원들을 굴리곤 한다. 그것의 신봉자였던 설비연은 단원들보다 심하게 수련하면 했지 덜하진 않았으리라.
뭐 그리 깊은 상처도 아니었기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으면 금방 나으리라.
“그런데 갈유화가 찾아온다고 했단 말씀인가요?”
“그래.”
“그 여자가 또 왜···? 무언가 알아챈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단목장룡은 고민했다.
갈유화는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가 해남도에 찾아온 이유는 수라마검이 진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암천회와 천마신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단순히 천마신교만을 상대하는 것도 벅차다.
그런데 그들이 사파와 연합을 맺는다?
정파 무림에 속해 그들을 상대하려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런데 사마련주의 아들이라고 물었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는 설비연에게 사마련에 관해 물었다. 그가 알기로 현 사마련주 사마굉은 아들은커녕 자식조차 없었다. 보통 무림에서 거대한 세를 가진 무인들이 삼처사첩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 그런데도 자식이 없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긴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갈유화는 사마련주의 아들이나며 날 의심했다.
“혹시 사마련주의 아들을 알고 있나?”
혹시 몰라 설비연에게도 묻는다.
그녀는 오랫동안 흑룡단에 머물렀다. 그녀가 신교를 원수로 여긴다지만, 사파의 정보도 빠삭한 편이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사마련주는 자식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림맹과 마찬가지로 다음 사마련주가 누가 될 것인지 논란이 많다더군요. 사마련주가 언제 그 자리에서 내려갈지는 몰라도요.”
임기 기간이 존재하는 무림맹주와는 또 다른 게 사마련주의 자리였다.
무소불위의 권력. 천마신교와 비교하자면 교주와 같은 자리였다. 사마세가는 과거 제갈세가와 마찬가지로 진법과 군사적인 지식을 가진 가문이었지만, 어느샌가 정통 무가(武家)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너도 사마련주의 아들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지?”
“예.”
그렇다면 갈유화가 그냥 날 떠본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사마련주의 아들을 언급하여 내 반응을 보려 했던 걸까? 갈유화라면 그 순간에 그런 기지를 발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설비연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 주공?”
“음?”
설비연이 쭈뼛쭈뼛한다. 저런 모습의 그녀는 보기 힘들었다. 마치 무림맹을 나서고 내게 완패했던 날의 그녀를 보는 듯하다.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 그런데 차마 내게 묻지는 못하는 그런 표정. 당시에는 그녀가 그러든 말든 무시하고 해남도로 나아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 설비연은 어느 샌가 평범함을 되찾았다.
그래도 이제는 그녀와의 관계가 달라졌다. 해남도에서 만큼은 둘 도 없는 전우라 할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 거야?”
“주공께서 혈발악존을 상대할 때 사용한 무공··· 혹, 뇌왕 대협의 뇌공검법이 아닌지요?”
의외였다.
뇌전검법에서 뇌공검법을 찾아낸 것인가? 애초에 그녀가 뇌공검법을 본 적이 있나?
“어릴 적 뇌왕 대협께선 돌아가신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셨지요. 아주 어릴 적에 봤지만 그분의 검법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공의 검을 보며··· 뇌왕 대협이 떠오르더군요.”
사실 뇌전을 활용하는 무공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뇌전하면, 과거의 뇌왕을 떠올리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실제로도 뇌공검법을 본 적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녀에게 말해준다.
“비슷하다고만 알아둬라. 지금 뇌공검법은 사천당문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이미 당옥정이 뇌공검법의 후계자가 됐다는 건 전 무림이 아는 사실이다. 이 정도만 말해도 설비연은 대충 알아들을 것이다. 내가 그 무공을 하나하나 뜯어 수정한 것이 뇌전검법이라 말하면 그녀가 믿지도 못할 것이고, 굳이 설득시킬 필요도 없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설비연은 날 의심하긴커녕···.
“역시 주공께선···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굳은 결의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상을 하며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너만 알아둬라.”
“예···! 이 비밀은 죽을 때까지···.”
엄청난 비밀도 아니다. 어차피 난 무림에 활동하며 여러 무공을 선보일 생각이다. 처음엔 유성환상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무공을 익히고, 사용하다보니 더 나아갈 길이 보이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포기했을 테지만, 이제는 무력에 대한 갈증이 존재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다.
“이야기는 내일 알아서 하지. 갈유화가 찾아온 듯하군.”
“예, 주공.”
그렇게 설비연이 떠나갔고.
미약한 여인의 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아직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 냄새라니···. 갈유화의 익힌 무공에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갈유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내공을 끌어 올려 감각을 일깨운다. 같이 온 이들이 있는지 점검하려 했지만, 갈유화 외에는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온 것일까? 그녀는 암천회의 소회주이긴 했지만, 암천제의 참가자이기도 했다.
뭐 그러니까 더 자신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들어오십시오.”
갈유화가 들어온다.
그녀는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면서도 짧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되어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저렴해 보이진 않았다. 무공을 익힌 탓인지 갈유화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배여 있었다.
“반가워요, 장 공자. 이런 밀실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그녀의 몸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렇군요. 앉으십시오.”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그녀가 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 얼굴을 그리 뚫어지게 보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 여러 고민을 했다. 갈유화는 지금 내가 만날 수 있는 암천회의 인물 중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다. 그녀에겐 많은 것을 뜯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사마련주의 아들이라느니 허무맹랑한 말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절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군요. 암천제에서 연합이라도 제의할 생각입니까?”
“아뇨.”
갈유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낮에 물었던 답을 듣고 싶어서에요. 얼굴을 보면서 말이에요.”
“제가 사마련주님의 아들이라는 것 말입니까?”
“네.”
갈유화의 눈빛이 깊어진다. 질척이는 늪처럼 쉬이 벗어날 수 없는 시선이었지만, 난 태연하게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전 사마련주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분께 자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혹, 무슨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갈유화가 잠시 침묵한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여인의 감각이란 말이죠··· 아주아주 예민하답니다. 특히 탕백환희소를 익힌 제 육신은 너무도 민감해요.”
탕백환희소?
그게 그녀가 익힌 무공이었나 보다. 그 이름을 머릿속에 박아넣으며, 갈유화의 눈을 바라본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처음엔 말이에요.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했어요.”
사람도 아니고 사랑?
“사실 저 같은 여자가 한 사내만 바라본다는 게, 조금은 서글프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지금 확신했어요. 당신의 눈빛. 그리고 그 목소리. 내공으로 변조하여 다른 고수들은 숨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한텐 숨길 수 없어요.”
내 심장 박동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정체를 알게되면 암천회의 우승은 물건너간다. 하지만 우승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암천회를 더 잘 아는 여인이 내 앞에 있었다. 그녀를 심문하여 정보를 뜯어낼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극단적인 선택이다.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일단은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단목 공자님, 다시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순수하고 환한 미소의 갈유화.
뇌쇄적인 그녀의 외모와는 전혀 다른 그 미소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뻔한 말은 믿지 않는다
갈유화. 사천성의 성도에서 볼 때만 해도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다가와서는 내가 나보다 강한 여자랑 혼인하겠다는 걸 들먹이며 말을 걸었었다. 심지어는 내 손목에 손을 대서 화나게 했었다. 당시에는 참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갈유화는 내가 단목장룡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감은 대단했다. 대체 무엇으로 내가 단목장룡인 것을 파악했을까? 아니면 지금은 단지 떠보는 것일 뿐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슬기롭게 넘어갈 수 있을까?
내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갈유화가 싱긋 웃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단목 공자님의 정체를 발설할 생각이 절대 없으니까요. 이곳에서 그 정체가 드러난다면··· 조오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부정해야 할까?
아니면 속 시원히 인정해야 할까? 내 감각은 더 넓고 촘촘하게 퍼져나간다. 어쩌면 내가 그걸 인정하는 순간 암천회의 무인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 상황에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다. 단지 이곳에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체를 떠보고 날 위협할 생각이었다면 홀로 오지 않았겠지. 더군다나 옥 팔찌로 만든 진법도 가동할 수 있으니.’
온갖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었다. 솔직히 그녀가 날 사랑하니 마니 하는 걸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이제 갈유화와는 두 번째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도 반갑군.”
“후후후···!”
약간 붉어진 볼. 갈유화가 수줍은 듯한 웃음을 내뱉는다. 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에 시선을 주었다. 허튼 행동을 한다면 바로 조치할 수 있도록. 그럴수록 갈유화의 미소는 더욱 진해진다.
“너무 뚫어지게 보시는 것 아닌가요?”
“난 널 믿지 못하거든.”
“어머, 섭섭한 말씀이세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했는데요···.”
내가 보기엔 갈유화는 여우 중 여우였다. 과거 서녕지부에 있을 적에도 사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여인들을 보았다. 사내가 기루에 계속 찾아오게끔 여지를 주면서도, 정작 사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사내는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었다. 무림에서 가장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 노인과 아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아름다운 여인도 포함되어야 한다. 사내의 외모가 무기이듯이 그것은 여인도 마찬가지다. 소위 얼굴값을 한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갈유화는 그중 정점에 올라와 있는 여인. 더군다나 그녀는 암천회의 소회주였다.
“그런데 정말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인피면구네요. 저조차도 속일 수 있다니 말이에요.”
그녀는 내 얼굴이 바뀐 것이 인피면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야 중원 무림에서도 얼굴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축골공은 아주 희귀한 축에 속했다. 더군다나 익히면 익힐수록 얼굴의 뼈가 무너질 가능성이 커지기에, 웬만한 무인들은 그것을 익히지 않는다.
“갈유화,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 짜릿한 눈빛을 다시 한번 가까이서 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공자님의 손목을 잡았을 때 보다 조금 약하긴 하지만··· 지금 그 눈빛도 정말 좋아요.”
묘한 냄새가 흐른다.
갈유화의 몸에서 나오는 듯한 냄새. 살 냄새라고 할까. 보통의 사내였다면 방 안에서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정욕이 폭발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외모도 외모였지만, 익힌 무공에 무언가 특별함이 있는 듯하다. 탱백환희소라 했던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지금 갈유화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나를 연모하는 듯하다.
그것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난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갈 소저, 거짓말하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제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내가 존대를 하자 갈유화가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그것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연기라면 대단한 여인이다. 정말 삐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서 내게 언급하진 않았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전 말이에요. 절대자의 딸로 태어났어요. 보통 딸은 아버지를 닮은 남편을 찾는다고 하잖아요? 아마 그런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전 여러 사내를 봐왔지만··· 사실 마음이 동한 적은 없었어요. 뢰극찰이나 화무기를 봐도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뿐이죠.”
그녀는 잠시 쉬더니 말을 이어나간다.
“제게 원하는 게 뭔지 물으셨나요? 대답하면 제가 너무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실까 겁나긴 하지만, 말할게요. 전 낭군님을 원한답니다.”
“···.”
절대자라면 암천회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절대자 중 하나로 본다는 말인가?
“날 절대자로 본다는 말입니까?”
“당시 절 죽이려 했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그 냉혹하고 잔인한 눈빛에 전 옴짝달싹할 수 없었어요. 정말이지 그때를 생각하면···.”
파르르.
“어릴 때 아버지가 예뻐하시던 흑응을 죽인 적이 있었죠. 어린아이의 치기랄까요? 딸의 마음이랄까요. 전 아버지의 관심을 받고 싶어 흑응을 죽여버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절 바라보는 눈빛이 그러했어요. 참으로 무서웠죠.”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녀는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암천회의 갈유화는 그 신분에 맞게 자라왔을 것이다. 그녀의 배경은 웬만한 이들은 말조차 걸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당연하게도 그녀에게 살기를 내뿜은 사람은 없으리라. 암천회주 다음으로 그녀에게 살기를 쏘아낸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정말 사천성의 객잔에서 그녀가 내 진짜 모습을 봤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갈유화의 말이 진심이라면?
‘이용할 가치가 있군.’
소회주라 함은, 훗날 암천회의 회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니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 하오문에서 얻어내는 정보와는 질이 다른, 진짜 암천회에 관한 정보. 천마신교와 소통하고 있는지, 어떤 경위로 수라마검을 얻게 되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에게 허겁지겁 그것을 물어보는 것은 하책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다. 갈유화는 분명 이용가치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아직 그녀를 믿긴 힘들다.
“저기, 단목 공자님?”
“말씀하시죠.”
“굳이 제겐 말을 높이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
갈유화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진다.
이 말에 저리 당황할 줄은 몰랐다. 기다란 손가락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아랫입술을 깨문다.
난 그냥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원한다면 말을 놓도록 하지.”
“아···!”
그녀의 감정 변화는 너무도 격하다.
이제는 황홀감에 젖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 약간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솔직히 말하면 그런 말을 해도 신뢰가 가지 않는 게 사실이다. 난 뻔한 말을 믿지는 않거든.”
“당연히 그러시겠죠. 제가 더 노력할게요.”
“어떻게?”
내 질문에 갈유화가 잠시 입을 다문다.
당장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암천제를 하며 차근차근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제 순결을···.”
나는 황당함에 손을 휘저었다.
갈유화가 저런 말을 내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순결이라고? 그것 또한 믿기가 힘들다. 갈유화를 믿지 못한다기보단, 해남도에 관습처럼 뿌리내려진 문화를 보면 당연히 믿지 못하리라. 이곳은 남녀가 정을 통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난 암천제에 우승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나? 그럼 조금은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갈유화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정파의 인물이라고 암천제에 우승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알겠다. 그럼 오늘은 일단 가도록 해라.”
내 말에 갈유화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뭔가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알겠어요. 다음에 또 찾아오도록 할게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갈유화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내게 꾸벅 인사하고 떠나갔다. 난 창밖으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나의 선택지가 또 생겼군.’
내가 계획했던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방금 생긴 선택지는 그나마 손쉬운 길이라 할 수 있었다. 갈유화가 떠나갈 때까지도 은소 객잔엔 어떠한 감시의 시선도 없었다.
‘옥 팔찌의 기운을 더 강하게 해야겠어.’
나는 찬찬히 옥 팔찌가 놓인 탁상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