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36)

* * *

설비연과 이야기를 나눈 지 5일이 지났다.

우리는 평소대로 무공을 수련하며, 정보를 모아나갔다. 이번 암천제에서 어떻게 수라마검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오늘 암천회의 무사가 우리를 찾아왔다.

“장천 공자, 본선의 첫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종이에 내 상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혈해마검객(血海魔劍客) 초운락.

그가 내 본선 첫 상대였다.

* * *

암천회의 본선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은 크게 없었다.

사실 방식은 예선과 비슷하다. 강철패를 가진 인물끼리 어떤 수를 써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다른 본선 진출자들과 합공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상대방도 분명히 연합을 맺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잠시 연합을 맺어 상대를 합공하더라도 문제는 존재한다. 암천회에서도 암천제의 ‘재미’를 고려하여 연합을 맺은 이들끼리 다음 본선을 치르게 한다.

그렇기에 합공이 규칙을 위반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정해진 상대가 대단한 강자가 아니라면 암천제에선 연합을 맺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초운락이 그 어린놈에게 죽었다는군. 암습을 당해서 말이지.”

혈해마검객 초운락.

그는 복건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대마두였다. 정사대전에서도 정파 무림인을 수없이 베어나갔으며, 지금은 무이산에 터를 잡고 혈해파(血海派)를 만들었다. 이번 암천제에 그가 직접 참가했다는 것은 당연히 해남도에선 화제가 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고,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초운락이 당했다.

변변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암습을 당해서 말이다.

“장천? 대체 그 꼬맹이가 누구지? 어디 출신이야?”

“그걸 아무도 모른다더군. 어떤 소문엔 정파인이 아닐까라는 의심도 있고 말이야.”

“그 무지렁이 같은 정파 놈들이 암습을 했다고? 암천제에 와서도 정면 대결을 외치다가 뒈진 화산파의 병신 하나가 생각나는군.”

“그건 그렇지만··· 하오문에 알아봐도 그의 정체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군. 하늘에 뚝 떨어진 느낌이야.”

“후우우우···.”

마치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입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창을 열지도 않고 약을 태우는 혈발악존. 그리고 그의 앞에는 군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한 사내가 미소를 지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천하의 흉면수라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리 찾아왔냐?”

“알지 않은가?”

“힘을 빌려달라고?”

“그렇다네.”

혈발악존이 다시금 연기를 내뿜는다. 그 연기가 흉면수라의 얼굴에 직접 닿는다. 암천회가 만든 연기로 들이마시는 미혼약. 당연히 불쾌했지만, 흉면수라는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그가 수라의 얼굴로 변할 때는 싸울 때뿐이다.

“연합을 맺는 것은 그리 재미없는데 말이야.”

“이번 상대가 쉽다고 그리 생각하지 말게. 자네의 다음 상대는 분명히 삼대 문파 중 하나야. 그들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보나? 그때 내 도움을 주지.”

이미 한 차례 승리를 거둔 혈발악존.

분명히 그다음 상대는 암천회, 나찰마궁, 혈세귀막 중 하나였다.

“···.”

그의 말에 혈발악존이 입을 다문다.

장천이라는 그 애송이는 겁나지 않았다. 혈해마검객이 암습을 당해 죽었다? 그놈은 실전에서 멀어져 너무 방심했다. 어떠한 일에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생존의 원칙 중 첫 번째였다. 해남도에 와서 만나본 그놈은 과거의 예리함이 사라진 상태. 자신이라면 절대 그리 쉽게 뒈지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런 혈발악존도 사파의 세 기둥이라 불리는 놈들은 버겁긴 하다.

아무리 그들이 적당한 전력으로 참가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지금 연합을 맺었다고 치고. 그다음은?”

당연히.

어찌 상황을 모두 극복했다면 두 사람은 결국 싸워야 한다. 암천회에서 가만히 연합을 두고 보진 않으리라. 암천제는 그러했다. 참가자 모두를 압도할 실력과 세력이 아니곤 우승하기 버거웠다.

“그렇게 되면 삼대 문파는 서로 싸워야 할 것인데, 암천회가 과연 그렇게 둘까? 난 아니라고 본다네. 이렇게 삼대 문파가 전부 참가한 암천제는 처음이 아닌가? 그땐 칠교공자까지 포섭한다면··· 오히려 우승 확률은 우리가 더 높아지겠지.”

혈발악존을 비롯한 노괴들은 충분한 자신감이 있기에 암천제에 참가했다.

물론, 혈세귀막의 총대주 같은 놈들이 참가할 것은 예상하지 못하긴 했지만··· 그들이 연합을 맺는다면 분명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삼대 문파를 모두 치워버리고 나면 그나마 경쟁이 쉬워진다고 할 수 있었다.

혈발악존과 흉면수라 그리고 칠교공자까지.

그때가 되면 적당히 상품을 나누고 합의를 봐도 상관없었다.

대부분 수라마검에 눈독을 들이고 있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암천제의 상품은 하나만 얻어도 참가할 가치가 있었다.

“좋아. 그럼 어떻게 싸울 거지?”

“굳이 머리 쓰며 암습할 필요가 있나? 나와 자네라면 장천과 그놈이 달고 다니는 여인 하나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우리가 연합했다는 걸 확실히 보여줘야 하네.”

“그럼 시간 버리지 말고. 바로 가자고. 오랜만에 머리에 피를 묻힐 수 있겠군.”

혈발악존이 자리에 일어선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른 사람의 피로 붉어진 것이다. 암천제의 예선에서도 많은 사람의 피가 묻은 상태였다.

“그러지.”

흉면수라의 얼굴이 조금씩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 * *

“흉면수라와 혈발악존이 연합을 맺은 듯합니다.”

“그들도 장천을 겁내고 있는 모양이네. 하기야 혈해마검객을 그리 시시하게 끝장낼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갈유화가 콧소리를 내며 머리를 매만진다.

그녀 사실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의 인물을 불러 모임을 하긴 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누가 우승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암천제는 단지 유흥과 쾌락일 뿐이다. 더 재밌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상품의 가치가 높다지만···.

이번 암천제를 개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이번 암천제로 중원에선 수많은 사람이 해남도로 넘어왔다.

“혈발악존과 흉면수라가 장천이 머무는 은소 객잔으로 향하고 있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 행동력 하나는 빠르네?”

갈유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가 튀는 싸움을 구경하는 것은 그녀의 취미 중 하나였다. 누가 이기든 참 재밌겠지. 그리고 이번엔 장천이라는 인물의 진짜 실력을 알 수 있으리라.

“가보자.”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갈유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몰려든 군중

암천제의 소문은 빠르다.

해남도에 있는 이들은 소문이 빠르다. 그들은 새로운 자극과 유흥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혈발악존과 흉면수라의 연합은 그들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소재였다. 출신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고수 장천. 대체 그가 누구길래 대마두 두 명이 연합한단 말인가?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이는 암천회의 갈유화였지만, 그 소문은 어느샌가 해남도로 쭉쭉 퍼져나갔다. 암천회가 입수한 정보를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장천이 반로환동한 고수라고 했지? 반로환동했다는 건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닌가?”

“예끼. 반로환동의 고수가 암천제에 참가한 적이 있었나? 설마 정말 반로환동의 고수려고?”

두 무인이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산속에 파묻혀 무공만 수련했다가 깨달음을 얻어 내려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번 암천제는 새로이 시작할 좋은 기회고. 난 반로환동의 고수가 맞다고 보네.”

“극마의 경지라면 혈발악존과 흉면수라 두 명에서 상대가 되겠나? 지금 두 사람이 장천에게 가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이 없다면 먼저 찾아가겠나? 암습을 하던가 했겠지. 그리고 장천이라는 인물은 혈해마검객을 암습으로 이겼지 않은가? 정말 극마에 올랐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크흠흠! 그래도 난 믿고 있다네!”

말싸움은 호리호리한 사내의 승리로 끝났다.

통통한 사내는 슬쩍 시선을 회피한 채로 말을 이어나간다.

“직접 가서 보면 되겠지! 얼른 가세!”

“그러지. 내기라도 하겠나?”

내기라는 말에 통통한 사내가 발걸음을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천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기대감을 주긴 한다. 조금은 뻔한 암천제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였다. 더군다나 혈발악존과 흉면수라가 제대로 싸운다면···.

‘오늘의 암천제는 정말 재밌겠군!’

사실 누가 이기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해남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된다. 피가 튀기는 강자들의 싸움.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유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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