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36)

* * *

“오랜만이군, 유화.”

“그러게요. 3년 만인가요?”

갈유화가 미소를 머금는다. 나찰마궁의 소궁주인 뢰극찰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그녀의 미모가 극에 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사내의 가슴을 뒤흔드는 그 색기에 아랫도리가 얼얼해진다.

갈유화는 그런 뢰극찰에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런 사내의 시선은 매번 받아온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랄까? 그녀는 누군가의 위에 서 있는 걸 좋아했다. 뢰극찰이 저리 발정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손하나 대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쭉 찢어진 눈을 한 젊은 사내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화 공자님도 정말 오랜만에 뵙군요.”

“그렇군.”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갈유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내가 똑같다. 분명히 두 사람은 강하고, 자신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말 애 같다니깐.’

전혀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예전에는 그래도 남자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이제는 뭔가 애 같다는 느낌이다. 저 두 사람이 절대자의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다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지.’

갈유화가 입을 다물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뢰극찰이었다.

그는 사실 갈유화와 단독으로 만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혈세귀막의 화무기까지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화무기, 감히 네가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얼굴을 들이민 거지?”

“넌 아직도 내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나?”

“자격지심? 내가 너 따위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5년 전의 암천회에서 내게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나?”

빠지직.

뢰극찰의 이마에 거대한 일자 주름이 생겨난다. 우습다기보단 기괴하게 보인다.

“그 개소리는 아직 달고 다니는군. 그게 다 네놈을 방심시키기 위한···.”

“진짜 강자는 그런 작은 수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비열하게 살수를 보낸 거냐?”

“···또 헛소리로군. 네놈 따위에게 굳이 살수를 보낼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다.

그 무시무시한 살기에 갈유화는···.

‘정말 애 같아. 그분이었다면···.’

눈빛으로 상대의 오금을 지리게 했겠지. 저렇게 유치하게 말 싸움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절대자의···!

- 소회주님.

멀리서 곡위의 전음이 들려온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음기를 방출했다. 뢰극찰과 화무기의 무공이 수준에 달해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녀의 기운에 매료되어 허튼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뭐 그 덕분에 두 사람의 싸움이 멈췄다.

“크으으음!”

“···.”

두 사내의 시선이 갈유화에게 향한다.

현 사마련주는 세 문파 출신이 아닌, 사파에서도 가장 정통성이 깊다는 사마세가의 사람이었다. 다음 사마련의 주인이 되려면 갈유화를 차지해야 한다. 혈세귀막과 나찰마궁의 힘은 거의 비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암천회의 조력을 받는다면, 전력의 손실 없이도 사마련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었다.

당연히 갈유화는 그걸 알고 있었고.

“참, 당신이 퍼트린 소문 거짓이던데요?”

그녀의 말에 뢰극찰이 당황한다.

그냥 은근히 해남도에 소문을 퍼트렸을 뿐이다. 비라는 여자가 갈유화를 능가할 외모와 무공을 가지고 있고, 그의 곁의 있는 사내는 반로환동한 고수로 추정된다고. 당연히 호기심이 많은 갈유화가 직접 움직이리라 예상했지만···.

“나찰마궁은 음흉한 짓을 많이 하는군.”

화무기가 덩달아서 뢰극찰을 압박한다.

“무슨 소리냐? 분명히 비라는 여인은 엄청 아름다웠다.”

뢰극찰은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놈은···.”

“네놈의 뺨을 후려쳤다더군. 후후.”

화무기가 웃는다. 그의 웃음은 보기 드물다. 그런 만큼 참으로 얄미웠다. 뢰극찰이 놈의 내력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

“이번 암천제는 우리 세 문파가 독식해야 해요. 걸린 상품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이번 암천회에선 수라마검과 더불어 각종 영약과 신병이기에 준하는 무구들이 걸려 있었다. 암천회가 자선 사업을 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모두 사업의 일환이었다. 커다란 미끼로 해남도에 사람을 모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암천회의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된다.

세 문파 중 가장 역사가 짧은 암천회지만, 지금은 혈세귀막이나 나찰마궁보다 반 수 높다는 평가가 많았다. 뭐 실제로 전쟁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갈유화를 탐하는 것이다.

“근데 수라마검은 어떻게···.”

“그건 직접 우승해서 받아보고 생각하세요. 상품의 출처는 밝히지 않는답니다.”

뢰극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혈세귀막의 화무기를 바라본다.

지금은 암천회의 사람들이 있어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만약 둘이서 이곳에서 봤다면 당장에 장법을 펼쳤을 것이다.

‘암천회의 중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혈세귀막 놈들은 믿을 수 없지. 감히 내가 탄 배에 암살자를 보내? 까딱하면 정말···.’

수준급의 살수였다.

자신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이고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화무기는 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 그와 같이 온 이는 혈세귀막의 총대주. 혈세귀막이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총 서열이 10위 안에 드는 인물이다. 애초에 서열에는 막주를 포함하여 원로들까지 포함하기에 혈세귀막에서 직접 활동하는 고수 중엔 그보다 순위가 높다고 봐야 한다.

“어차피 우승은 정해져 있지 않나?”

그렇기에 자신이 있었다.

이번 우승은 혈세귀막이 차지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자만하긴 일러요. 여러분들은 이번 참가자들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나요?”

암천회의 소회주인 갈유화보단 정보력이 뒤떨어진다.

애초에 그들은 소수 정예로 해남도에 들어왔으니까.

“혈발악존(血髮惡尊).”

그 이름이 나오자 화무기와 뢰극찰의 표정이 굳어진다.

“칠교공자(七巧公子), 혈해마검객(血海魔劍客), 흉면수라(凶面修羅).”

“그들이 암천제에 참가했다고? 음지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놈들이 대체 왜···?”

뢰극찰의 의문에 답한 것은 화무기다.

“수라마검. 마교의 무공이 탐나나 보군. 연구할 가치가 있지. 마교는 역시 마교니까.”

마교.

그들은 자신들은 천마신교라 칭한다.

단일 세력 중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들이 발호하면 중원 문파의 반절이 날아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파라도.

사파라도.

그들에겐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이 선조들이 전해준 지혜였다. 마교를 경계하라. 만약 그들이 내려온다면 연합하여 막아라.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어요. 장천. 그와 직접 만나보니 강자라는 걸 알겠더군요.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적당히 나누지. 난 장천이라는 놈을···.”

화무기에 말에 뢰극찰이 발끈한다.

“무슨 개소리냐! 장천은 나와 악연이 있다. 그놈은 내 거다!”

가장 약해보이는 사내를 선점하려는 두 사내의 기 싸움에.

갈유화의 실망감은 깊어졌다.

시작

암천회, 혈세귀막 그리고 나찰마궁.

저들이 모임을 한 걸 모두 보았다. 은소 객잔의 가장 높은 층의 창문을 통해 말이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내가 해남도까지 오며 작업을 벌였던 것이 헛되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해남도로 오며 나찰마궁의 방중술을 익힌 마두들을 처단했다. 또한, 그들의 무공서까지 모두 회수하여 불태웠다. 마지막으로는 해남도로 향하는 선박 위에서 혈세귀막의 무공을 흉내 내어 나찰마궁의 소궁주 뢰극찰을 암습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오히려 성공보다 실패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 저들의 모임을 본 것은 아니지만, 혈세귀막과 나찰마궁은 결코 섞일 수 없었다.

아마 언젠간 저들끼리 싸울 일이 생기리라.

가장 큰 문제는 암천회라 할 수 있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내 행동이 달라질 터이다.

‘이럴 때, 각 문파에 심어 놓은 간자라도 있으면 편해질 텐데.’

정보력의 중요성.

아직은 모든 것을 확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무공 실력이 가장 중요했다.

난 객잔 내부에 머물며 설비연에겐 정보의 탐색을 명한 후에 줄곧 무공에 수련에만 빠져 있었다. 용봉지회가 끝났을 때, 나찰마궁의 방중술을 보았을 때 얻었던 깨달음을 통해 본신의 무공을 더 강화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유성일락을 연속으로 펼쳐낼 수도 있다.’

유성일락은 검강의 묘리를 활용하는 기술.

닿는 순간 최대의 화력을 보여주며 상대를 으스러트린다.

그리고 다음 오의는···.

‘사용할 때가 있겠지.’

은소 객잔은 넓었으므로 적당하게 초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무공 수련에 넓은 연무장만 고집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떤 장소에서나 수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내가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어느덧 암천제의 예선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설비연은 해구현에서 오늘도 정보를 모아왔다.

“오늘은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홀로 하오문까지 찾아갔다. 정파인이라고 하오문에서 정보를 얻는 것에 꺼림칙한 티를 내던 처음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뭐지?”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그녀의 앞에 섰다.

설비연이 오늘 모은 정보를 정리하여 내게 보고한다.

“혈발악존과 칠교공자가 이번 암천제에 참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혈발악존과 칠교공자라···.”

“그리고 이건 확실하지 않지만, 혈해마검객과 흉면수라 또한 이번 암천제에 참가한 듯합니다. 저들은 정파에서도 유명한 대마두로 흑룡단에선 언젠간 그들을 꼭 잡아야 한다고 벼르고 있던 놈들입니다.”

설비연의 표정에서 냉기가 풀풀 날린다.

마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녀는 저리 증오심을 내보였다. 그것이 이해가 된다. 그녀의 원수는 비단 마교뿐만이 아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악랄한 인간들이었다.

“별호 정도는 들은 적이 있군. 그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모두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닿아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칠교공자를 제외하곤 모두 강호에서의 경험이 쌓인 노괴들입니다.”

사실 일류냐 절정이냐 그리고 초절정이냐.

그것을 나누는 것은 확실한 기준점이 존재했다.

몸에 기를 둘러 활용할 수 있으면 일류.

기를 유형화하여 검기나 권기 등으로 사용하면 절정.

그리고 검강을 발현할 수 있으면 초절정.

과거 무림의 경지는 이렇게 구분되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이 자기네들끼리 아랫것들의 경지를 정해주곤 했었다. 하지만 중원 전역에서 무공을 익히고, 그들의 발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니 어느샌가 저런 기준점이 생겼다.

그렇다면 초절정에 오른 이들은, 절정의 검객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까?

과거였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검강을 다룬다고 해도,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절정의 검객에겐 쉽게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지금은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라곤 하지만, 그 지역마다 조금씩 분위기가 다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사파의 권역을 돌면서 느낀 것인데, 이곳은 실전 경험을 쌓기에 너무도 좋은 곳이었다. 사파의 고수들은 상대의 배경을 보지 않고 죽자 살자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암천회의 시작도 처음은 그러했다고 하니··· 사파의 무인들은 같은 경지의 정파인들보다 더 실전 경험이 많았다.

실전 경험은 중요하다.

비무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 실전에서의 감각. 한순간 방심하면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에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싸웠던 감각은 두고두고 쌓인다. 그리고 ‘노괴’라 불릴 수준이 되면, 그들은 위험의 순간을 탈출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활용하여 싸울 줄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설비연이 마지막에 노괴라 강조한 이유는, 그녀도 실전 경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아마 정파 내에서도 그 중요성을 가장 잘 알기에 ‘지옥수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단원들을 단련시키고 있으리라.

설비연은 그 노괴들의 특징을 내게 설명했다.

확실히 흑룡단의 조장이라 그런지 이런 정보는 빠삭했다.

“역시 사파의 마두들이라 그런지 잔혹함이 도를 넘어서는 놈들이군.”

“예, 주의해야 합니다. 저들은 정파인의 자존심 따위는 없습니다. 합공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으며, 불리하면 도주하여 암습의 기회를 엿봅니다. 물론, 전쟁에선 그것이 당연시되지만 요즘 무인들은 그걸 잘 모르지요.”

“나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내 말에 설비연이 움찔한다.

“당연히··· 아니죠.”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신뢰를 쌓았다. 이젠 그녀에 관한 악감정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이런 가벼운 장난을 할 수준은 되었다.

“우리가 암천제의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우승하면 수라마검에 더 다가갈 수 있으니 좋지. 그리고 그 노괴놈들은 기회가 있을 때, 잡아 죽이는 것이 좋겠지? 암천제는 상대를 죽여도 전혀 문제가 없는 대회니까.”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들을 추적해서 잡으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가깝다.

하지만 암천제라는 기회를 통해 대마두들이 한 장소에 모인 상태.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내 복수의 종착지는 천마신교가 맞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단목세가의 차남이었고, 흑룡단의 조장이었다.

난 내 자리에 일정 부분 책임을 다할 것이다.

내 목표가 천마신교라고 그것만 보고 달려간다면 분명히 부작용이 생겨난다. 최소한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그럼 본선 상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예선과는 달리 본선은 암천회에서 직접 상대를 정해준다.

암천회를 비롯한 거대 문파의 주요 인물들이 회담을 가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 유력한 참가자들끼리 묶어 탈락을 유도할 듯했다.

갈유화는 직접 내 실력을 보았으니 아마도 강자를 배정해줄 것이다. 설비연이 말한 노괴들일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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