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 뺨을 후려친 놈의 이름이 장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출신은?”
“벽안문(碧眼門)이라는 문파의 출신이라 합니다.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정말 그의 말대로 깊은 산중에 무공만 수련하다 이제 막 강호행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감히 그딴 쓰레기 같은 놈이··· 나 뢰극찰의 뺨을···.”
으드득.
뢰극찰이 이를 간다. 백광 존자는 그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그 사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그도 똑같다. 하지만 문제는 혈세귀막이다. 그들은 혈기를 숨기지 않고, 나찰마궁의 씨앗들을 죽여 없앴다. 당최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리고 소궁주까지 암습했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그들이 습격한다.
더군다나 이번 암천회에선 혈세귀막의 소막주뿐 아니라···.
‘총대주까지 왔지.’
혈세귀막의 총대주.
초절정의 상급에 올라가 있으며, 곧 극마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암천회에 오면서 그런 호위를 데려오는 것은 반칙이었다.
세 존자 중 하나인 백광 존자라도 혈세귀막의 총대주는 버겁다.
‘이번에 암천회의 암고양이도 암천제에 참가했다고 했지? 우승을 노리지 않고, 즐기기 위해서 참가한 것이라니 소궁주님께서 우승하는 것엔 상관없겠지만···.’
백광 존자는 외관과는 달리 두뇌파 쪽에 속했다.
‘그 도도한 계집은··· 여인의 외모에 집착하는 편이지.’
나찰마궁은 현재 혈세귀막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장천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 또한 고려한 것이다. 만약 해남도에 흔히 보이는 마두 수준이라면, 당장 나찰마궁의 궁도들이 그놈과 애꾸 여인을 납치해왔으리라.
백광 존자가 그것을 소궁주에게 말했다.
“뭐? 갈유화를 이용하자고?”
“예, 장천의 옆에 있던 냉기가 철철 흐르는 여인의 소문을 널리 퍼트리면 됩니다. 그 암천회의 갈유화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말이지요. 그럼···.”
“하하하!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하겠어. 유화가 그런 것에 집착이 많긴 하지. 크크크크.”
두 사람의 미소가 짙어진다.
암천회의 소궁주
절정에 오른 혈살마조를 장천이라는 사람이 단번에 꺾었다는 소식은 단번에 퍼져나갔다. 본래 새로운 인물은 관심을 받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그에게 악의를 품은 나찰마궁에서 그에 대한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트리고 있었다.
사파에 새로이 등장한 의문의 고수.
과거 은퇴한 사파의 대마두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극마의 경지에 이르러 반로환동한 고수가 다시금 무림에 발을 디뎠다는 말도 있었다. 당연히 해남도에 있는 세력들은 그의 정체를 수소문했고, 가장 많이 애용되는 곳은 하오문.
정파의 권역에선 하오문의 정보력을 얕잡아보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무력도 강하지 않고, 하오문을 구성하는 인원들 대부분 강호에서 약자의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파는 다르다. 하오문의 정보력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닿아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하오문에서 장천에 대한 답을 내놓기를···.
‘그분은 저희가 감히 언급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러한 답을 들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장천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려던 나찰마궁의 뢰극찰도 약간 당황시키는 말이었다. 이미 하오문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력도 약한 하오문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면 되지 않겠느냐?
말로는 쉬웠다.
해남도 하오문지부를 습격하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장천의 정보를 얻고자 사파의 최대 정보 조직과 척을 지는 것은 옳지 못한 생각이다. 하오문이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걸고 있지만, 복수는 꼭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찰마궁 같이 적이 많은 문파라면···.
더군다나 암천회의 권역에 자리를 잡은 하오문은, 다른 지역의 하오문들보다 무사의 질이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끔 들리는 이야기로는 해남도지부가 하오문의 본타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유화는 여모봉에서 내려왔나?”
“예, 암천회의 무인들을 대거 이끌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혈세귀막의 동태는?”
“여전히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더 주의해야겠지요.”
혈세귀막은 드러난 살수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중원 무림에 존재했던 살수 집단들은 자신들의 본체는 꼭꼭 숨기고, 의뢰를 받아 몰래몰래 규모를 키워나간다. 하지만 혈세귀막은 대놓고 살수 집단을 운영한다. 그들은 다른 강호인들의 의뢰를 받아 암살을 하기도 한다.
그들이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살수들은 자신보다 몇 수 위의 고수를 죽일 수도 있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 최적의 순간 칼을 들이민다.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이 오래전 전면 전쟁을 했을 때도, 나찰마궁은 살수들에게 많이 당했었다.
물론, 나찰마궁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지만··· 살수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지 나찰마궁의 궁도라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왔다.
‘이번 암천회의 결과에 따라 네놈들은 멸망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감히 살수를 보내 나 뢰극찰을 공격해?’
배 안에서 급작스레 공격당했던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솜털이 쭈뼛 선다.
“본성에서 누가 나온다고 했나?”
“아마··· 대존자께서 나오실 것 같습니다.”
나찰마궁의 대존자.
사실 암천제에 움직일 인물은 아니다. 암천제는 엄밀히 따지면 나찰마궁의 경쟁 문파인 암천회가 개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의 여력을 쏟아내지 않았던 게 암천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혈세귀막과는 전쟁이다. 백광 존자는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 그리고 장천이라는 놈은···.”
“갈유화 소회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분은 정말···.”
갈유화의 성격은 사파 내에서도 알아준다.
사파인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잔혹함. 그녀의 눈에 띄면 어떤 누구라도 살아남기 힘들다. 더군다나 이곳은 암천회가 펼쳐지는 해남도. 정말 여차하면 그 암천회주까지 등장할 수도 있었다.
‘사파의 다섯별 중 하나라는 암천회주··· 과연 궁주님과 싸우면 어찌 될까.’
정파에 육왕이 있다면.
사파엔 오성(五星)이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그들은 평범한 무인이 악을 써도 손을 댈 수 없다. 정파가 인간들의 왕(王)이라는 호를 써서 자신들을 띄운다면, 사파는 그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다.
오성의 존재 하나하나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감히 이곳에서 암천회의 심기를 건드리는 놈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암천회주가 이곳에 있기에.
소회주인 갈유화가 더욱 빛이 나는 것이리라.
‘갈유화, 그 여우 같은 계집이 뭘 보여줄지 기대되는군.’
뢰극찰은 소소한 기대를 품으며, 혈세귀막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 * *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주공께서 반로환동한 사파의 고수라는 말도 있더군요.”
“그래?”
소문이라는 것은 으레 그렇다. 퍼지면 퍼질수록 과장되고, 그 파급력이 강해진다. 그래도 반로환동한 고수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소문이 있다면 귀찮게 하는 이들이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날파리가 사라지고 진짜들이 나타난다는 거지.’
먹을 것이 없나 기웃거리는 놈들.
며칠 전 강철패를 받고 나오자마자 나를 집어삼키려 했었다. 그런 놈들은 귀찮긴 하지만 전혀 위협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진짜들은 다르다.
“그런데 암천회와 마교가 관련이 있는지는 알아내기가 힘들 듯하군요. 이런 식으로 이목이 쏠린다면 정보를 수집하기도 어려울 텐데···.”
난 설비연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배 위에서처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엔 서로 작전을 수행하는데 문제점이 많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축골공(縮骨功).”
“예?”
신교의 서고는 방대하다.
축골공은 그 위험성이 과해 중원 무림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무공이다. 얼굴의 뼈를 조작해서 생김새를 확 바꿀 수 있는 무공이다. 물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화하지는 못하지만, 코의 높이 광대의 높이 등을 적절히 바꾸면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는 있다.
간자들에게 확실히 좋은 무공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당연히 컸다.
내공을 이용해 뼈를 변환시키는 무공이기에··· 계속 사용하다간 얼굴이 주저앉는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문제가 아니다. 간자들이 외모에 신경 쓰는 것처럼 우스운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굴이 무너지면 얼굴에 있는 맥이 다친다. 심한 경우 부서진 뼛조각이 뇌에 닿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간자들은 그 수명이 다한다.
심할 때는 실성하여 자신들이 간자인 것을 털어내는 경우도 존재했다.
축골공은 한 번 사용할 때마다 그 여파가 커진다. 이래저래 위험 부담이 큰 무공이라는 소리였다. 정파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축골공을 아로 있었다.
“설마? 축골공을···?”
“그래.”
나 또한 마찬가지.
축골공을 사용할 때마다 얼굴의 뼈가 상한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천마신공의 묘리로 얼굴에도 내력이 담겨 있었다. 그 강인한 내력은 얼굴의 뼈가 무너지지 않게끔 지속적으로 치료하고 있었다. 내력의 소모가 있긴 했지만··· 해남도에선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는 경지에 오른다면.’
난 새로운 육신을 가지게 된다.
살짝 상한 뼈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얼굴을 바꾸어서 어찌하실 생각이신가요?”
“혼란을 만들어야지.”
“혼란이요?”
“난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이 전쟁을 하길 바란다. 여차하면 암천회까지 합세하면 더할 나위 없겠군.”
“그렇게 되면 도리어 경계가 심해지지 않을까요?”
“서로를 보느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여유는 줄어들겠지.”
당연히 난 암천제에서 우승이 목표가 아니다.
서로 견제하며 싸우고 있을 때, 난 내 목표만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더군다나 암천회는 나나 설비연 두 명에서 우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높은 성적을 낼 순 있겠지만··· 아마 우승에 가까워질수록 내게 전해지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리라.
그렇게 주목받을 순 없었다.
용봉지회와는 참가한 목적이 다르다.
“가장 중요할 때, 난 장천이 아닌 다른 얼굴로 움직일 거다. 너에게만 그 얼굴을 보여주지.”
우지직.
내력을 이용해서 얼굴의 뼈를 조절한다. 뼈가 부서지는 고통에 손발이 떨려왔지만, 신음을 내뱉진 않았다. 설비연이 변한 내 얼굴을 보며 살짝 입을 벌렸다.
“저, 정말 축골공이군요.”
“뭐 자주 활용할 순 없으며. 얼굴을 변화하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지.”
“이곳에 와서 정말 많은 걸 보여주시네요.”
“이곳은 서로를 경계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애초에 내 비밀은 이것보다 더 많았다.
사실 설비연과 비무한 후에 빙백신검의 묘리까지도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원본을 보지 않아 완벽하진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무공의 구결을 조합하면 빙백신검의 냉기를 재현할 수 있다.
설비연이 잠시 침묵하며 고민한다.
난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저도 제 마지막 비밀을 알려드리죠. 저만 주공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손해니까요. 이것은 흑룡단주께서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그녀가 천천히.
안대를 벗었다.
“···?”
그녀의 한쪽 눈은 안대로 항상 가리고 있었다. 마교에서 탈출하며 시력을 잃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 속에는 눈동자가 아닌···.
‘빙정···?’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피부에 솜털이 선다. 빙정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주변의 온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그녀는 바로 다시 안대를 썼다.
“이것은 북해빙궁의 보물이에요. 빙궁의 역사가 온전히 담겨 있는 신물이라 봐도 무방해요.”
“그걸 눈에 박았다고?”
“빙백신검을 익혔기 때문이죠. 평범한 이들은 손에 대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거예요. 빙정은 빛을 받는 순간 지독한 냉기를 내뿜어요. 그때 빙정에서 나온 냉기를 이용하면 전··· 몇 배의 힘을 낼 수 있죠. 아마 그 힘을 사용한 직후 죽겠지만.”
“흑룡단주만 알고 있다고?”
“예. 이제는 알고 있는 사람이 두 명이군요.”
아마 설비연은 내가 진법을 만드는 것을 보여줬던 것이나 축골공을 익혔다는 걸 알려준 걸 내 전부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지막 비밀을 알려준 것이겠지. 받는 대로 준다. 설비연은 그 논리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확실히 무림맹 내에서 시비를 걸어댈 때의 그녀와는 달랐다.
그녀가 선하고 착한 여인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이런 모습을 보니 조금씩 신뢰가 쌓인다.
“그걸 사용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비연의 한계를 가늠했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다.
“그래도 본선은 진출해야겠지?”
강철패 10개를 채울 시간이다.
* * *
객잔을 나서 이제는 꼭꼭 숨어버린 암천제의 참가자들을 추적한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설비연의 추적술은 상당했다. 흑룡단에선 전쟁을 대비한 수련을 한다. 숨어 있는 적을 찾는 수단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나와 설비연은 호흡을 맞춰 순식간에 강철패를 획득했다.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
그렇게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십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적당히 무공을 익힌 삼류 따위가 아니다. 착실하게 무공을 익혀온 진짜들. 우리가 이곳까지 들어설 때까지 기다린 것이 틀림없었다.
- 어떡할까요?
- 오랜만에 몸 좀 풀 수 있겠군.
피하지 않았다.
어떤 세력에서 보냈는진 모르겠으나 도전을 했다면 받아준다. 다시는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만약 나를 잡기 위해선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나는 설비연보다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당혹스러운 음성을 내뱉곤 내 뒤를 따른다.
슈걱.
스걱.
그들의 목숨까진 빼앗진 않았다. 적당히 치료하면 목숨엔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벤다. 팔과 다리에 검상이 새겨진 이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를 습격한 이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꿋꿋이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조금 긴장해야 하겠어.’
드러난 이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내 피부를 찌르는 강렬한 살기에, 설비연에게 전음을 보낸다.
- 조심해라.
- 예.
우리를 습격하는 복면인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리고 나를 긴장시키는 살기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할 때.
뭔가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멈춰 봐.”
그녀의 한 마디에.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춘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소문으로 들어 믿지 못했는데, 정말 강하네요? 더군다나 우리 귀여운 아이들을 죽이지도 않고 적당히 상대해주시는 걸 보니 마음씨도 착하시고 말이에요?”
“···.”
출렁.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대한 것이 움직인다.
“반가워요, 전 암천회의 소회주인 갈유화라 해요.”
그때와 같이 속살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있다.
더군다나···.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군.’
갈유화의 다짐
갈유화.
과거 사천 성도의 객잔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심장에 손을 대보라니 뭐니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해남도에서 그런 것은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라는 걸 직접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암천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해남도에 오면 그녀와 마주치리라는 걸 느꼈다. 어쩌면 하오문 해남도지부에서 말한 높으신 분이라는 게 그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그녀가 내게 보여준 태도는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다. 마치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추측 중 하나일 뿐.
아직 확실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난 가만히 죽립을 눌러 쓴 채로 갈유화를 바라본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설비연을 바라본다.
“장천과 비라고 했던가요? 두 사람의 소문이 워낙 대단하여 이리 직접 찾아왔답니다. 직접 보니 확실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시네요. 의외로 자비롭기까지··· 약간 흥미가 생기네요.”
“그래서 이제 실력 확인은 끝났습니까?”
“응?”
갈유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네요? 저와 안면이 있으신 분인가요?”
“전 소저를 처음 봅니다만.”
“그래요? 이상하네요. 전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사실 내공을 이용해 목소리를 살짝 변조했다. 만약 하오문에서 말한 높으신 분이 갈유화가 맞다면, 이렇게 반응하진 않았으리라. 지금 또 생각해보니 애초에 암천회의 소회주가 내게 그런 특별 대우를 해줄 이유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분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말이에요. 죽립을 벗어주실 수 있으신 가요?”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소문이 워낙 강렬해서 말이에요. 듣자 하니 장 대협께선 천하에 둘도 없는 미공자에 옆에 계신 비 소저는, 저보다 아름답다고 하더라고요? 무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전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성격이라서··· 이렇게 여모봉에서 내려오고 바로 찾아왔답니다.”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으음, 아마 생각하시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그녀가 팔짱을 낀다.
묘한 웃음. 딱히 살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갈유화를 자극하면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녀와 지금 싸울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아니지.’
난 해남도에 올 때도 갈유화를 고려했다.
그녀는 천마신공의 기운에 기가 눌린 상태였다. 암천회의 소회주라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그녀에게 정보를 뜯어낼 생각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충돌할 순 없었다. 이제 막 해남도에 온 참인데, 암천회와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설비연에게 갈유화의 시선을 끌라고 전음을 보냈다.
“암천제의 소회주께선 우리랑 싸우고 싶은 건가요?”
“싸우고 싶다기보단···.”
두 여인이 대화하고 있을 때.
난 재빨리 축골공을 펼쳤다. 설비연의 목소리에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묻힌다. 최대한 조용히 그것을 펼쳐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얼굴이 모두 변환된 것을 확인했다.
“전 이런 시시한 대화를 하자고 찾아온 게 아니랍니다. 죽립을 벗어 얼굴을 보여주시든··· 아니면··· 응?”
갈유화의 동공이 커진다.
죽립의 작은 틈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죽립을 벗어던지니 갈유화의 전신이 보인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는 여인들만 입을 법한 의상. 중요 부위는 모두 가리긴 했지만, 굴곡이 훤히 보이기에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다.
사내의 본능으론 자꾸만 시선이 간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축골공으로 변화된 얼굴로.
“···.”
갈유화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 얼굴의 원형에서 변화시켰으니 눈썰미가 좋다면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갈유화는 그것 때문에 당황한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마치 조금 실망했다고 해야 할까?
“···당신이 둘도 없는 미남?”
“난 미남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죽립을 쓰고 있으니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소문이 생겨났을 줄은 몰랐군요.”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나 보군요. 그렇다면···.”
그녀는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비연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설비연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비 소저도 똑같겠군요.”
“외모가 중요한 겁니까?”
“상황에 따라 중요하기도 하죠. 소문이 과장됐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요. 물론, 두 분의 실력은 진짜였긴 하지만요.”
“갈 소저께선 저희에게 볼일은 모두 끝난 겁니까?”
“뭐 그렇다고 봐야겠죠?”
갈유화가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무인.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진 그 사내가 갈유화를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의복이 더 부담스러운 느낌이다. 억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하는데, 갈유화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 피할 필요는 없답니다. 손을 대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는 건 죄가 아니니까요. 대신, 이성을 잃고 달려든다면 뭐 그것대로 대가를 치러야 하긴 할 거예요. 전 임자가 있으니까요.”
“···.”
“너무 사설이 길었죠?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어요. 공격에 대한 사죄라고 해야 할까? 받아주세요.”
그녀가 내민 것은 강철패였다.
내가 딱 하나 모자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해남도는 암천회의 권역. 내가 강철패를 몇 개나 모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본선에 진출하셨네요. 제가 강철패를 주지 않았어도 알아서 예선은 통과하셨을 테지만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강철패를 놓치 않았다.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눈빛.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내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우리 만난 적 없어요?”
“예.”
나와 갈유화의 시선이 오랫동안 교차한다.
당연히 사천성에서처럼 눈에 내력을 불어넣진 않는다. 그렇다면 단번에 갈유화가 알아볼 것이 분명하기에.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던 갈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수하들의 죽이지 않고 제압한 것에도 감사를 표해요.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혈세귀막을 조심하세요. 그들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답니다.”
혈세귀막이?
나를?
혈세귀막과는 아무런 연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긴 하다. 혈세귀막를 사칭하여 나찰마궁의 무공을 익히고 있던 잡놈들의 목을 잘라버렸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것을 벌써 알아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혈세귀막보다 나찰마궁이 먼저 내 숙소에 들이닥쳤어야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 가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갈유화가 턱을 살짝 치켜들자 암천회의 무인들이 일사분란하게 길을 튼다. 확실히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쾌락과 흥분이 가득한 해남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달까.
- 주공, 그래도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 글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어찌 될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계속 바라보는군.’
슬쩍 뒤를 돌아보자 갈유화가 가만히 서서 무뚝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