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36)

* * *

해남도에 도착했다.

과거 이곳은 정파 무림의 핵심 중 하나였던 해남파가 패권을 잡고 있던 곳이다. 하지만 암천제의 등장 이후 해남파는 완전히 몰락해버렸고, 해남도는 쾌락과 유흥이 지배하는 섬으로 탈바꿈했다.

확실히 뢰주현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해안 인근에 지어진 호화스러운 건물들. 그곳에선 묘하게 야릇한 붉은 등불이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 항구엔 몸매를 훤히 노출한 여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이들을 유혹하려는 듯하다. 당연히 화대를 줘야 하겠지.

그리고 항구엔 기녀만 있는 게 아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작은 약병을 돈을 주고 파는 사람들도 있다. 저것은 아마도···.

‘미혼약이로군.’

해남도는 거의 모든 것이 자유라고 보면 된다.

이곳의 자유에 빠지게 되면 다시는 내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아마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길거리에서도 사고파는 저 미혼약일 것이다.

항구에 가만히 서 있으니 여인들이 들러붙는다.

솔직히 나도 사내인 이상, 그리고 오랫동안 금욕했으니 욕구가 꿈틀댄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적어도 단목장룡의 이름으로 처음은···.

‘내가 그 순진한 아이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젓는다.

저 멀리서 설비연이 탄 배가 도착한다. 난 미리 내려서 바다를 밟고 달려왔다. 잔잔한 호수보다 훨씬 어려웠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 하나하나에서 난 이제까지 몰랐던 것을 깨닫고 있었다.

‘직접 해보는 것과 상상은 다르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본 것을 상상하는 건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과거엔 나는 상상만으로 무공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실제로 직접 행하며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내 재능이 있더라도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비연이 탄 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죽립을 눌러쓴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설비연은 잠시 움찔하더니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주공을 뵙습니다.”

“그래.”

끝까지 우리의 정체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은 사마련과 암천회의 정보력을 너무 얕보는 것이리라. 다행스러운 것은 해남도는 정파라고 무조건 공격하거나 하진 않는다. 암천제는 규칙상 정파인도 참가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정보를 탐색하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바로 해남성의 성도인 해구로 향하려 했다.

그때.

“잠시만.”

뢰극찰이 신법을 펼쳐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젠 꽤 치유된 모습이다.

“이 여인의 주군이오?”

“그렇습니다만.”

“그렇군. 하나 제안할 것이 있는데, 이 여인을 내게 하룻밤만 빌려줄 수 있으시오?”

“···.”

설비연이 주먹을 꽉 쥔다.

나 또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 내가 누군지 모르시겠군. 난 나찰마궁의 소궁주인 뢰극찰이라 하오. 값은 충분히 줄 터이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뢰극찰의 목에 닿는다. 뢰극찰은 무심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검날을 세워 휘두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모양. 그의 예상은 맞긴 했지만···.

짜아악!

“크윽?”

난 검면으로 그의 뺨을 날려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설비연도 당황하여 날 지켜본다.

- 당신···! 아니, 주공! 일단 조용히 넘기는 게···.

난 설비연에게 살짝 고개를 젓고는 뢰극찰을 바라본다.

그의 뒤로 백광 존자와 나찰마궁의 궁도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흐른다.

“감히 소궁주님을!”

“그만!”

뢰극찰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선다. 그의 볼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네놈을 어떻게 죽여줄까? 네놈을 죽이면···.”

“암천제가 펼쳐지기 전까지 참가자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암첸제는 용봉지회보다 훨씬 위험하다.

하지만 진짜 암천제가 펼쳐지기 전엔 그 누구도 살인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해남도의 패자인 암천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미친놈이 먼저 뺨을 쳐놓고···!”

“내 검에 네가 얼굴을 가져다 댄 것이 아니냐?”

어찌나 분노했는지 뢰극찰이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거대한 내력이 용솟음칠 즈음.

난 몸을 돌렸다.

“가자.”

당연히 나찰마궁은 날 잡으려 했지만.

“혀, 혈세귀막이야···!”

그 소리에.

나찰마궁의 움직임이 멈췄다.

‘날 신경 쓸 틈은 없을 거다. 뭐 언젠간 내게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 있겠지만···.’

그땐 검면으로 뺨을 내려치는 것으로 끝나진 않으리라.

해남도(2)

설비연이 무언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여 물어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게···.”

설비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어나간다.

“절대로 따지려는 건 아니에요. 주공의 행동을 트집을 잡으려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주공께서 굳이 그의 뺨을 때릴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혹시 저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하셨다면···.”

피식.

설비연이 저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 검을 후려친 것은 설비연을 욕보이려 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방중술을 여러 곳에 뿌려놓은 행위가 너무 꼴보기 싫어서였다. 사실 이곳이 해남도가 아니었다면, 보는 눈만 없었다면··· 이미 저놈은 내 손에 생을 마감했으리라.

그리고 나찰마궁의 계략이 역겨운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고려한 행동이다.

일단 나는 혈세귀막의 인물들이 태운 배가 곧 도착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찰마궁의 소궁주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해준 것이다.

물론, 나찰마궁의 소궁주가 모욕을 당했으니 날 기어코 죽이려 하겠지만···.

‘아마 그놈은 날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다.’

그런 내용을 설비연에게 대충 요약해서 말해준다.

죽립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은 당황한 듯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절대 따지려고 했던 게 아니고···.”

“안다. 이제 우리는 해남도에서 모든 행동을 굳이 숨길 필요까진 없다고 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이곳으로 왔다는 것쯤은 암천회에서도 알게 될 것이다. 목적이 있어 여기 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단 당당하게 따질 것이 있으면 따지고,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면 된다. 물론, 상황을 잘 봐가면서 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하나하나 지시를 내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설비연은 흑룡단의 조장이었으며, 온갖 실전을 경험한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무공의 실력도 상당하다. 직접 싸워본 내가 잘 알았다. 그리고 내게 패배한 후로 수련에 더욱 열을 올려 실력이 더 올라간 상태였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기루.”

“예, 알겠···. 네?”

설비연이 멈칫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설비연은 정파인이었다. 나와는 생각의 폭이 다를 것이다.

“여긴 개방이 없지 않나?”

“설마 하오문에···?”

“맞아.”

하오문.

돈만 주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암천회는 개방의 정보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장소. 이곳에서 정보를 얻으려면 하오문에 가는 것이 좋았다. 더군다나 난 하오문의 은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출발하기 전 의창현의 천향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곳에서 정보를 바로 받아볼 수 있게끔 말이다.

‘적색루라 했던가.’

우리는 저 멀리 대치하고 있는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을 두고 떠나간다.

여기서 싸워주면 더 좋겠지만, 아마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이 되진 않으리라. 암천제가 시작하기 전부터 싸우면 암천회에서 개입하게 된다. 이곳은 해남도였으니 암천회의 규칙을 어기진 않으리라. 그렇다고 눈싸움만 하고 끝나진 않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해구현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해구현의 건물들은 중원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붉은 등불이 은은하게 빛을 비추고 있었고, 거의 홀딱 벗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노출이 심한 여인이 많았다. 아무리 사파의 권역이라 해도 심하다고 싶을 정도.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윗도리를 훌렁 벗고는 상체 근육을 뽐내는 자들도 많았다. 또, 몇몇 이들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거리를 배회한다.

거리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모두 얼굴을 보면 행복해 보인다. 해남도에 만들어진 낙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됐지만··· 굳이 이곳을 계몽할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이곳을 바꾸려 노력해도 저들이 과연 반길까? 저들은 저들대로 저리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저런 것도 아니니까.’

해남도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쾌락과 유흥에 취해 자신을 내던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침하게 얼굴과 온몸을 가린 채로 거리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와 설비연처럼 말이다.

적색루에 도착하여 천향에게 받은 은패를 건네준다.

내가 누구니, 어디 출신이니 밝히는 것보다 이렇게 은패만 있으면 쉽게 하오문과 접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적색루 가장 높은 층으로 안내되었다.

“내 제자 중 하나가 신경 써달라는 대협이시군요. 어서오세요.”

방 안에는 40대로 보이는 농염한 인상의 여인이 부채를 편 채로 얼굴의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가서 앉았다.

“제가 준비해달라는 것은?”

“네, 해구의 중심부에 있는 객잔의 특급 객실을 두 개 예약했습니다. 그리고 암천회의 참가자들 명단까지요.”

이들에게 암천회의 상품 중 하나인 수라마검의 존재를 물어봐도 되지 않겠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하오문을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들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내가 하오문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처럼 암천회를 비롯한 다른 사파의 세력들오 하오문의 정보를 활용한다.

“다만, 암천회는 가명으로 참가하는 경우도 많으니 어느 출신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답니다.”

“괜찮습니다.”

종이 뭉치를 받아 설비연에게 건네준다.

그녀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들었다.

“얼마나 내면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높으신 분께서 대협껜 일체 비용을 받지 말라고 명하셨거든요.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들어주라 하셨어요.”

“높으신 분? 그게 누굽니까?”

“어머, 애석하게도 그것까진 알려주라고 하진 않으셨답니다. 죄송해요.”

“···.”

간단하게 추리하자면 천향이 높으신 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건 아니리라.

내가 하오문의 높으신 분과 연을 맺은 적이 있었나? 일단 그것을 차치하고,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내가 누군지 아는 이가 이 해남도에 있다는 말이군.’

뭐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에 크게 매몰될 생각은 없었다.

만약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 이곳에 오려는 것을 막고 싶었다면, 이미 행동을 취했으리라. 그런데 하오문에겐 호의적으로 날 대하라고 명한 듯했다. 일단 내게 큰 적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래도 행동에 주의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필요하시면 신분을 만들어드릴 수도 있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흰 대협의 이름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신분패를 만들어주십시오.”

그래도 당분간은 가짜 신분들 사용하는 것이 좋으리라. 흑룡단의 조장이라는 신분은 너무 눈에 띈다. 정파도 참가할 수 있는 게 암천제라지만,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암천제 초반부터 사파인들에게 합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신분을 만드는 것이 좋다.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 이름은 장천입니다.”

단목장룡과 사공천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이런 이름이야 흔했으니 그리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뒤에 계신 대협께서는?”

그녀를 대신해서 말해준다.

“비.”

“비요? 간단해서 좋군요. 은소 객잔에서 기다려주시면 저희 문도가 방문하여 신분패를 전달해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해남도에선 그들만의 신분패가 존재했다. 암천회에선 이곳을 꿈의 낙원이라 부른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졌든 간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장소. 그런만큼 각각 사연이 있는 이들이 모인다. 암천제도 새로이 만들어진 신분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정파 출신의 무림인이 암천제에 참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찌 보면 암천회는 정사파를 막론하고 가장 열려있는 문파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외부인을 받는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적색루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높으신 분은 여자입니까?”

“으으음, 뭐 거기까진 알려드릴 수 있겠군요. 맞아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적색루에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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