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조장이라면 내게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나? 아니면 혹시 이게 날 시험하는 건가? 나찰마궁의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려고?’
설비연은 단목장룡의 실력을 인정했다.
처음 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계기는 조원끼리의 비무. 그다음은 무림맹을 나선 후 직접 그의 실력을 보았을 때였다. 단목장룡은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직접 맞붙어본 설비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 패배로 좌절했다.
고작 이런 실력으로 마교를 상대하려 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었다. 지금은 그 좌절을 거의 잊고, 그의 실력과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난 매번 그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비만 걸었으니까.’
당연히 자면서 몇 번 이불을 걷어찬 적이 있었다. 이럴 거였으면 처음 젓가락을 던졌을 때부터 따져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설비연은 상대의 실력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설마?’
단목장룡의 의도가 나찰마궁 두 사람의 실력을 알아보게끔 유도하는 거라면?
설비연은 잘못이 있다면 같은 무림맹 식구에게도 들이박는 성향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자신을 판단했다면 오산이다. 설비연은 적을 상대할 땐,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것이 조장의 덕목이었으니까.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 보여줘야겠군.’
나찰마궁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욕구에 미친 이들이다. 욕구를 채우기 위해선 뭐든 한다. 설비연은 객실에 침입한 흔적이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하고, 물병에 혹여나 미약 같은 것이 타져 있는지 점검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이제부터 밤잠도 줄여야겠어.’
분명히 뢰극찰과 눈을 마주쳤었다.
설비연은 자신의 외모가 사내들이 혹할 만한 수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나찰마궁의 소궁주라면, 분명히 흑심을 품고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오는군.’
그녀는 방 곳곳에 함정을 설치했다. 봇짐에는 일회성 기관으로 쓸 수 있는 병기들이 꽤 있었다. 흑룡단 4조에서 만든 기물들이다. 그곳으로 유인하여 터트리기만 하면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하는 건가···?’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만약을 위해 대비하는 것은 절대 나쁜 게 아니다.
하지 않고 불안해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낫다.
설비연이 방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고, 검을 뽑은 채로 침상에 앉았다.
그리고···.
‘온다.’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설비연이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눈빛으로 방문을 바라본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다.
“누구시죠?”
“아, 아직 주무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슬슬 약효가 돌 때라고 생각했는데.”
“약효가 돌아?”
삐이이이-.
순간 설비연의 몸이 휘청인다. 대체 이런? 배 위에서 무엇을 먹을 땐 몇 번이고 미리 점검했다. 작은 물까지 말이다. 그런데 중독됐···.
‘아니야. 이건 중독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기의 흐름.
이것은 진법이었다.
‘이 미친놈들···!’
설비연이 검을 쥐고 그 기운에 대항한다. 하지만 사방에서 밀려오는 그 거대한 힘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다. 대체 이런 무공이 있나? 그리고 난데없이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나찰마궁의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미친놈들이 맞구나···.’
설비연은 입술을 깨문다. 이 방에 계속 버티고 있다간 정신을 잃을 것이다.
그녀가 방을 나서려고 할 때.
방문으로 백광 존자가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아미타불···! 소저가 소궁주님의 마음을 미리 받아줬다면 이런 불상사까진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대체 왜 이런 짓까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이제 곧 배는 해남도에 도착할 터인데 그곳에서까지 소궁주께서 당신을 신경 쓰리라 생각한 것이오? 당신은 하룻밤 장난에 불과하오. 자신을 너무 값지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소.”
설비연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린다.
대체 무슨 착각과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걸까? 무림맹에 있을 때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만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파의 축이라는 나찰마궁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미쳐있다.
“그래도 너무 고깝게 생각하진 마시오. 소궁주의 수청을 드는 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니. 아마 소저께서도 극락을 맛보실 것이오.”
설비연이 자신의 진산절기를 펼치려 한다.
북해빙궁의 빅뱅신검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이다. 단목장룡만을 믿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백광존자와 승부를 봐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 그만. 그 무공은 지금 사용할 때가 아니다.
“···?”
단목장룡의 전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하고 있었냐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백광 존자가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설비연의 기세가 확 줄은 걸 확인한 백광 존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나찰마궁의 무인 한 명이 헐레벌떡 이곳에 달려온다. 소궁주를 모시는 호위 중 한 명이다.
“조, 존자님! 소궁주께서 피습당하셨습니다!”
“···?”
난데없는 상황에.
백광 존자가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남도
백광 존자가 깜짝 놀랐다.
나찰마궁의 소궁주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존재. 물론, 그가 보호를 받을 만큼 나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나찰마궁의 절기를 모두 익히고, 어릴 때부터 후계자 수련을 받아왔다. 더군다나 나이도 어린 편이 아니다. 명문 정파의 후계자들이 꽤 어린 시절부터 후계로 정해지는 것에 비해서 나찰마궁의 경쟁은 길고도 길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백광 존자는 설비연을 소궁주인 뢰극찰에게 바치려던 계획을 모두 내팽개치고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달려간다. 나찰마궁 소중주 뢰극찰을 지키기 위해서.
‘대체 어떻게?’
배 내에서 뢰극찰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비연이라는 여인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백광 존자가 맡고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겁을 상실한 놈이 배에 숨어들었단 말인가?
헐레벌떡 달려간 뢰극찰의 방.
백광 존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뢰극찰의 상의는 볼품없이 찢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맨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중독이라도 된 듯이 혈관이 솟아나 있었다.
당연히 한 문파가 떠오른다.
나찰마궁의 최대 숙적 중 하나이자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파.
혈세귀막이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저런 효과를 내는 무공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뢰극찰에게 저리 상처를 입힐 사람은 그놈들뿐이다. 혈세귀막은 최근 무슨 생각인지 나찰마궁이 뿌려놓은 씨앗을 자꾸만 거둬드리고 있었다. 그 문제로 암천제에서 충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피에 미친 놈들이 소궁주를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광 존자가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간다.
“소궁주님! 괜찮으십니까···.”
“아, 백광 존자인가.”
소궁주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뢰극찰의 분노가 가장 극에 달한 순간이라는 걸 백광 존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혈세귀막 그 핏덩이 놈들이···!”
“나를 제대로 없애려 했다면 한 명만 보냈을 리 없어.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아봐야겠어. 우리 계획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날 공격하다니··· 정녕 전쟁이라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뢰극찰이 몸을 움직인다.
“크윽···.”
몸 내부에 도는 그놈들의 역겨운 기운이 혈관을 잠식한다. 혈교의 후예라 자칭하며 해괴한 짓을 벌이는 혈세귀막. 나찰마궁의 입장에서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배에 오르기 전엔 혈세귀막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었지만,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이 전면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두 집단 모두가 세력이 크게 약화될 것이다.
“혈기를 몰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백광 존자가 뢰극찰에게 다가간다.
소궁주는 가만히 등을 내어주었다. 존자의 존재 의미는 나찰마궁을 지키는 것. 그리고 뢰극찰은 나찰마궁의 미래였다. 저 혈기로 인해 죽을 리는 없겠지만, 빨리 치유해야 한다. 가만히 두다간 암천제에서 위험할 수도 있었다.
세력으로는 단연코 나찰마궁이 밀릴 리는 없겠지만, 사파의 마두 중에선 혼자서 활동하는 강자들이 많았다. 그런 놈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역시 혈세귀막의 무공이 확실해···.’
뢰극찰의 내부를 살펴보던 백광 존자는 확신했다.
혈세귀막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들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운과 거의 똑같다고 봐야 했다.
‘이번 암천제는 그리 쉽지 않겠어.’
백광 존자의 눈빛이 깊어진다.
* * *
“지금껏 어디에 계셨던 거죠? 그리고 뢰극찰이 습격당했다니 설마···?”
“내가 그랬어.”
단목장룡이 방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설비연은 묻고 싶은 게 태산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것도 그렇고, 뢰극찰까지 습격하다니? 굳이 자신과 따로 행동한 이유가 저것이었나?
“뢰극찰은 어떻게 됐나요?”
“적당히 내상을 입었어. 아마 혈세귀막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겠지.”
설비연의 입이 벌려진다.
그에겐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사실 방중술을 익힌 마두들을 사로잡으며, 그는 혈세귀막이 행한 것과 같은 상처를 그들에게 선사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의문은 해소할 길이 없었다. 단목장룡은 단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무공과 사천당문에서 배운 독 제조법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데···.
사실 그녀는 그것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단목세가··· 무서운 가문이야. 난 중원에 있으면서 오대세가 정도만 되어야 강하다고 생각했어. 드러나지 않은 힘. 그게 무서운 거야. 흑룡단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파 무림을 모두 몰랐구나, 난.’
설비연은 당연히.
단목세가라는 가문 자체가 엄청난 저력을 지녔다고 착각했다. 사실 단목세가는 설비연이 생각하는 대로 오대세가에 오르지 못한, 적당히 역사가 깊은 중원의 가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목장룡을 보고 있자니 절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괜찮으신가요?”
설비연이 묻는다.
혈세귀막의 무공을 흉내내면 단목장룡도 본 실력을 내보이지 못한다. 그건 설비연의 예상이 맞았다. 본래 단목장룡의 육신에 맞게 만들어진 유성환상검을 활용했다면, 오늘 배 위에서 나찰마궁의 소궁주가 황천길로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혈세귀막의 강기를 구현하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뢰극찰도 결코 약한 것이 아니었으니.
“괜찮아.”
그도 약간의 내상을 입었지만, 이미 천마신공의 묘리로 녹아들었던 내력들이 그것을 치유하고 있었다. 천마의 육신. 그 어떤 강철보다 단단하고,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다. 뼈과 근육에 녹아있는 내력은 이럴 때 사용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효과가 좋긴 하군.’
과거에는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았다.
천마신공의 묘리가 효과가 좋은 것인지, 해우심법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 묘리가 단목장룡에게 잘 맞는 것인지···.
‘둘 다겠지.’
설비연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연다.
“죄송했어요.”
“···?”
뜬금없는 사과에 단목장룡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다.
“처음 색마 놈을 젓가락으로 잡았을 때, 실수하면 어쩌려고 했냐고 했잖아요. 제가 잘못 알았어요. 당신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제가 잘못했던 거예요.”
지금 그녀가 사과하는 이유?
그것은 그의 재능과 실력에 놀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려는 것도, 그에게 뜯어낼 것이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때의 일을 상기해보니 실수한 것은 단목장룡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과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녀는 남에게도 그렇듯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남에게 엄격하려면 자신부터 실천해야 한다.
그녀는 단목장룡에게 패배로 좌절하지 않았고, 더 성숙해졌으며 지금도 성장중이었다.
뭐 단목장룡의 입장에선 이제껏 여행할 땐 가만히 있다가 지금 사과하니 조금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뭐 괜찮아. 수하의 잘못은 주군이 덮어주는 법이니까.”
“그··· 렇군요···.”
떨떠름한 설비연의 얼굴.
단목장룡 딴에는 가볍게 장난을 친 것이다.
“아무튼, 이틀 뒤엔 해남도에 도착한다. 난 배 아래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배에서 못보던 인물이 등장하여 너와 있으면 나찰마궁에선 당연히 의심하겠지.”
“계속 몸을 숨기고 계실 건가요?”
“걱정하지 마.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설비연이 답지 않게 당황한다.
단목장룡 또한 자신의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네 근처에 머물며 혹시나 있을 비상사태를 대비할 거야. 최대한 몸을 드러내지 않을 테지만, 나찰마궁 놈들이 또 미친 짓을 하면 그땐 어쩔 수 없지.”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흑룡단의 조장이에요.”
“내가 없었으면 백광 존자에게 당했지 않을까?”
“그건··· 해봐야 알았겠죠.”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녀의 무공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특히 실전에서 말이다. 하지만 배에 탄 나찰마궁의 궁도는 백광 존자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튼, 조심하라고. 그리고 배 아래에서부턴 맹에서 계획한 대로 당신이라 부르지 말고.”
이미 무림맹에서부터 계획을 세워놓았다.
흑룡단주인 조백은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지고자 남매로 신분을 설정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설비연은 기를 쓰고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단목장룡을 주공이라 부르기로 했다. 남매보단 훨씬 자연스럽다고 말이다.
단목장룡이 문 밖으로 사라진다.
설비연은 두 눈을 딱 감고.
“예, 주공.”
이라고 말했지만, 단목장룡의 대답은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그대로 선 채로 부들부들 떨어댔다. 과거처럼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