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36)

* * *

퉤엣.

침을 뱉는다.

성교가 아닌,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흡수해보았다.

당연히 그 결과는···.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군.’

치미는 구토감.

역겨움.

‘역시 구결에 적힌 방법으로 내력을 쌓아야 이 내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작심하고 연구하면 이 역겨운 내력을 해우심법의 내력으로 바꿀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아.’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자연의 기운을 인간의 욕심으로 단전에 쌓는 것과 인간의 진원진기를 빼앗는 것은 차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인간이었다.

이런 방법에 빠져든다면.

내가 신교에 복수하겠다는 의미가 있을까? 나도 그들과 똑같아지는 것인데?

또한, 이 방법은 훗날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의 혼이라는 것은 한 육체에 두 개 이상이 존재할 수 없다. 진원진기는 그 혼을 붙잡아두는 기운. 당장의 육신이 아니라, 혼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마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하리라.

‘그래도···.’

오늘의 일로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다.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 후천적으로 쌓는 내공이 아닌··· 선천적으로 인간이 품은 기운에 대해서.

‘영령과 제갈교아는 영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혹시 그게 영혼이 아니라··· 진원진기였다면?’

그럴듯하다.

아직 추측에 불과했지만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떤 무공이든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달랐다.

산 아래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설비연이 도착한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아니에요. 산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여인은 내가 다 묻어주었다. 사내들은 한데 모아 불에 태웠고.”

“그렇군요. 그 사내는 심문했나요?”

설비연에게 내가 알아낸 것들을 알려준다.

그녀의 눈빛이 분노로 일렁거린다.

“암천회에 가면 나찰마궁과 마주할 수도 있다. 아니, 그전에도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지.”

“마주치면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무시한다.”

“···.”

설비연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우리의 임무는 나찰마궁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표면적으론 말이지.”

“그 말씀은···?”

“요즘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더군.”

난 신강성 주위의 정보만 받아본 것이 아니다. 무림 전체의 정세를 읽으려고도 노력했다. 만약 천마신교와 정파가 싸운다면, 가장 큰 문제는 신교보단 후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마련이리라.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대체 어떻게···?”

“혈세귀막 무공의 특징이 뭔지 아나?”

“그들의 강기에 당하면 마치 독에 당한 것처럼 피부에 혈관이 도드라진다고 하더군요.”

“색마 놈들을 만나면 그렇게 해주면 된다.”

설비연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낸다.

뭐 그녀가 바로 믿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내 명령을 따르기로 한 것과 별개로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믿기 힘들 테니까.

“한번 믿어보라고.”

만약 수하들의 내기만으로 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이 순간 설비연이 발끈하며 내 말에 토를 달았으리라.

하지만 무림맹을 나서는 순간.

실력의 차이를 제대로 알려줬다. 무림인에겐 그것만 한 방법이 없었다. 뭐 그것만으로 서로의 신뢰가 확보된 것은 아니긴 했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네. 알겠어요.”

“그리고 가는 길에 이번 일은 맹의 정보원에게 서신으로 전달하도록 하지.”

이곳이 아무리 사파의 권역이라도, 무림맹에 서신 정도도 전하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

* * *

“하핫! 이번 암천회는 정말 기대가 되는군. 원하는 상품이 있으면 뭐든 본좌에게 말하라? 암천회주께서 단단히 준비하신 모양이야. 갈유화의 몸이라도 받아볼까? 크하핫!”

화창한 낮.

뜨거운 태양 빛이 대지를 달군다. 그리고 그 강렬한 빛이 달구는 것은 대지만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매끈하게 밀린 머리가 번쩍인다. 몇몇 이들은 그 찬란한 머리통에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지만, 절대 그것을 보고 비웃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더라도 그의 복장은 특이했다. 마치 소림사의 고승들이 입을 법한 법복이었지만, 묘하게 그 생김새가 달랐다.

사파의 권역에서 저런 옷을 입는 이들이라곤···.

‘나찰마궁이야! 절대 시선을 마주치지 마!’

‘거리를 벌려!’

그들의 포악함은 이미 사파인들에게 유명하다. 하물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은 오죽하랴? 모두 그들과 거리를 벌리기 바빴다. 나찰마궁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소궁주님께서 직접 암천회에 참가하시니 모든 마두들이 그 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도 하지요.”

“크크, 백광 존자가 내 곁에 있으니 든든하군!”

해남도의 암천제.

그것은 확실히 정파의 용봉지회와 달랐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 말도 틀리지 않았지만,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게 정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강함이란··· 단순히 무공의 실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 그리고···.”

백광 존자가 느닷없이 전음을 보냈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혹여나 새어나갈 수 있기에 이렇듯 전음으로 보내곤 한다. 소궁주라 불린 인물은 그의 전음을 들으며 표정이 구겨진다. 즐거움이 가득했던 얼굴이 삽시간에 악귀처럼 변해갔다.

“감히···.”

- 이번 암천제에선 귀막의 행태를 잘 살펴보아야 할 듯합니다. 궁에도 지원 세력을 요청한 상황입니다.

- 전면 전쟁을 바라는 게 아니니 이상 본 소궁주를 공격하진 못하겠지.

- 예, 그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러지 않을 겁니다.

“됐어! 그런 잔챙이들은 신경 쓰지 말게! 피에 미친 버러지들! 감히 내 눈에 보이면···.”

소궁주가 악담을 퍼부으려 할 때.

그의 시선에 무언가가 걸린다.

“으응?”

죽립을 깊게 눌러썼지만, 턱만 보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녀 또한 소궁주의 시선이 닿을 때, 잠시 죽립을 올렸는데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구보다 시력이 좋은 소궁주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에 머릿속에 담았다.

‘안대를 찼어?’

한기가 뚝뚝 흐르는 눈빛.

거기에다 안대까지?

‘재밌는 년이로고.’

꼿꼿하게 해남도로 향하는 배로 올라타는 여인을 보고, 옆에 있던 백광 존자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소궁주에게 말한다.

“해남도로 향하는 배에서 그리 심심하진 않겠군요.”

“그래. 재밌겠어.”

소궁주와 백광 존자가 그녀의 뒤를 따라 배로 오른다.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그 뒤를 따르는 죽립 사내 또한···.

배 안에서 생긴 일

광동성 뢰주현.

수많은 사람이 배에 올라탔다. 그 대부분이 사파의 권역 출신이었지만, 이따금 섬서성이나 하남성 출신도 보인다. 암천제는 정파의 용봉지회와 비견될 잔치라 할 수 있었다. 어떤 부분에선 더 볼거리가 풍성하고, 즐길 것이 많았다.

암천회가 있는 해남도는 예전부터 쾌락과 환락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해남도로 손님으로 온 이들은, 암천회에서 직접 보호하기에 오히려 내륙보다 덜 위험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리라.

해남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도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찰마궁의 소궁주 뢰극찰이 탔기 때문이다.

모두 뢰극찰의 눈치를 본다. 그의 성격은 더럽기로 유명했다. 또한, 끈질기고 잔인했다. 나찰마궁은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진 사상은 전혀 달랐다.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과 욕구를 앞세우는 수련.

취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취하고, 행하려고 하는 바를 위해 나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특히 뢰극찰은 그러했다.

나찰마궁의 후계자 중 하나에서 소궁주가 되기까지 모든 경쟁에서 승리해왔다. 형제자매끼리 서로를 견제하고, 심할 때는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민다. 형제까지 죽일 수 있는 자에게 자비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그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 대부분 승객은 갑판 위로 나오지도 못햇다.

넓은 갑판 위에 뢰극찰과 그를 섬기는 백광 존자가 있었다.

“쯧쯧, 배 위에서 적당히 즐기려 했더니 모두 겁을 먹었군.”

“소궁주님의 위엄에 모두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나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뢰극찰의 단순한 혼잣말. 하지만 백광 존자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두 갑판 위로 올라오라고 하겠습니다.”

해남도로 가는 갑판 위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잔치를 벌이는 것은 해남도로 가는 배 위에서는 일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해남도는 사파의 권역이지만, 볼 것과 즐길 거리가 많아 멀리서 찾아오는 객들도 많았으니까.

나찰마궁의 무인 두 명이 선실로 들어가 손님들을 갑판 위로 올려보낸다. 뢰극찰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들은 혹여나 보복을 받을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위로 올라왔다.

“뢰 대협을 뵙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 그래. 해남도로 가는데 즐겨야지. 내 술이나 한잔 받으시게.”

사내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뢰극찰에게 다가가 인사하자 그가 너그러이 웃으며 술을 따라준다. 그 모습에 조금은 분위기가 변했다. 사실 모두 뢰극찰을 아는 것은 아니다. 소문으로만 그를 판단했다. 기분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목을 베어버린다든지,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인다든지··· 뢰극찰과 관련된 소문은 모두 끔찍했다.

하지만 뢰극찰은 평범하게 행동했다.

‘역시 암천회가 있는 해남도로 가는 것이니까 소문처럼 행동하지 않는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뢰극찰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화했다. 일 각 정도가 지날 때까지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게 한 시진, 두 시진을 넘어서자 슬슬 사람들도 긴장을 풀었다.

“뢰 소궁주님! 옛날부터 소궁주님을 존경했습니다! 제 술을 받아주십시오!”

“그래, 그래. 한 번 따라보거라.”

이제야 해남도로 가는 배다워졌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혹시나 하는 공포로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이들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갑판 위를 거닌다. 뢰극찰은 더 진한 웃음을 지으며 갑판을 둘러본다.

‘으음, 그 여자는 나오지 않았나?’

뢰극찰이 누구를 찾는지 알고 있던 백광 존자가 말한다.

“선미에서 바다를 보고 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

뢰극찰이 천천히 그곳으로 이동한다. 아무리 그가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대했다고 해도, 모두 그의 앞을 비켜선다. 술을 먹은 김에 용기를 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그렇게 취한 이들도 없었기도 했고.

늘씬하게 쭉 뻗은 한 인영이 선미 쪽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소저시오?”

“···.”

죽립을 푹 눌러 쓴 여인.

흑룡단의 3조 조장인 설비연이 신형을 돌린다. 그녀의 눈은 죽립에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에 올라타기 전 나와 눈을 마주한 적이 있지 않소? 다시 그 눈을 보고 싶구려.”

뢰극찰은 그녀가 거절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비연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싫은데요.”

“···뭐라고 하셨소?”

“싫다고 했어요.”

뢰극찰의 어깨가 들썩인다.

점점 그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주위에 있던 이들의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본다.

“하하하하하! 정말 재밌군! 정말 재밌어!”

“···.”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여자는 소저가 처음이오.”

“···.”

“그러니 더 흥미가 동하는군. 좋소. 내 한번 기다려 보지.”

그는 설비연의 곁에 서서 여유롭게 술잔을 들이킨다. 그녀는 당연히 이 상황이 불편했다. 단목장룡과 여기까지 오며 나찰마궁이 뿌린 더러운 씨앗들을 짓밟아왔다. 그런데 나찰마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소궁주가 곁에 있으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자중해야 할 때였다.

해남도에서 사고를 일으킨다면 사마련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또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방중술을 익힌 이들보다 월등히 강하다. 직접 병기를 맞대보지 않아도, 설비연은 뢰극찰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뒤에 선 백광 존자라는 인물도 마찬가지.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단목장룡은 그녀의 옆에 없었다.

갑자기 배에 탈 때, 자신은 몸을 숨기겠다며 사라졌다. 그의 기척을 숨기는 기술을 기가 막혀서 설비연조차도 어딨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설비연은 흑룡단의 3조 조장.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벌써 들어가시려고?”

“···.”

설비연은 뢰극찰의 말을 무시하고 객실로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광 존자가 뢰극찰에게 다가온다.

“저 여인이 잘 때, 약을 탈까요?”

그 말에 뢰극찰이 고개를 젓는다.

“너무 쉽지 않은가? 오랜만에 보는 강단이 있는 여인이야.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있으니 저리 행동하겠지. 그래도 아직 해남도로 가기까진 많이 남았으니 말이야.”

“예, 소궁주님의 뜻대로.”

“그래도··· 너무 애를 태우면 또 재미없기도 하지.”

그 말의 속뜻은 알아차린 백광 존자.

그가 희미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래야 나찰마궁의 소궁주라 할 수 있었다. 명문 정파라 자부하는 놈들처럼 자존심을 내세우다 일을 그르치는 것은 나찰마궁이 아니다.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시기에 맞춰 무조건 얻어야 한다.

그리고 갑판의 인파 속.

뢰극찰이나 백광 존자에게도 기척을 들키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좋은 기회가 되겠어.’

단목장룡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단목장룡이 아니었다. 설비연이 그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 지금 그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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