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도 용봉지회 우승자라 이건가 호락호락···.’
‘잠시만 왜···.’
‘어떻게? 왜···? 내 움직임이 다 읽히는 것 같지?’
‘빙백신검이 통하지 않아? 화공계의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어찌···?’
‘공간이··· 공간이 흔들리는 것 같아···.’
‘이게 무슨 무공···!’
비무가 이어지며 설비연의 생각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신교의 잔혹함을 직접 겪은 그녀였기에. 하루도 검을 놓은 적 없었다. 그렇기에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비무가 진행될수록 설비연의 확신은 불안감으로 바뀌었으며, 그 불안감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아악···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설비연이 주저앉아 있었다.
단목장룡 또한 그녀와의 비무에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처럼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빙백신공이라···. 극에 이르면 만물을 얼려버린다고 하더니 허언은 아니군. 괜찮은 무공이었어.’
격렬한 싸움의 흔적.
단목장룡의 옷은 얼었다가 부서지기를 반복해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었다. 또 군데군데 피부가 얼얼했다. 검에 직접 닿지 않아도 내부에 피해를 준다. 검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확 덮쳐왔었다.
설비연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과거 남궁일몽을 무릎 꿇게 했던 유성일락. 그녀 또한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지금 단목장룡은 용봉지회에서 남궁일몽을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진 상태였다. 화산의 보물이라는 자령단을 취했으며, 조원들에게 무공을 알려주면서도 자신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설비연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목장룡이 더 강했을 뿐이다.
그녀는 지친 몸 상태도 문제였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다.
‘내가 왜···?’
천마신교에 복수하겠다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또, 그 잣대는 남에게도 적용됐다. 천마신교를 직접 겪은 그녀는 웬만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 현재의 정파 무림은 그들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리라.
조금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했던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의 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래서···.
‘이제 막 강호에 나선··· 후기지수에게 졌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천마신교에 복수를 꿈꾼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래턱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잠시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어떤 마음일지 이해되었기에.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다 쉬지 않았나? 이제 출발하지.”
움찔.
설비연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거칠어진 호흡이 꽤 진정되어 있었다.
“명을 듣지 않을 거냐?”
설비연이 일어서지 않자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단목장룡.
지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면 데려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설비연의 마음에선 번뇌가 일어났지만···.
자연스레 몸을 일으켰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단목장룡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부끄러움과 좌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녀에게 익숙했다. 신교의 장로가 한쪽 눈을 생으로 파버릴 때도, 빙궁의 가족들을 포기하고 홀로 도주할 때도. 정신적으론 피폐해졌지만, 몸은 움직였다.
그녀에겐 쉴 권리 따윈 없었다.
“가자.”
단목장룡이 앞장섰으며, 설비연은 그를 뒤따랐다.
* * *
‘그래도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줄 만하군.’
사실 난 설비연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자신의 방법만이 정답인 듯이 날 지적했었다. 흑룡단에 들어가서도 나를 의심하고, 조장부터 시작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반대 의견만 내세웠다.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같은 흑룡단이 되었으니 크게 분란을 만들지 않는 선에서 그녀와 거리를 뒀었다.
어쩌면 그녀가 비무가 끝나더라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보통 저런 사람은 실질적으로 보여줘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해왔던 노력이 모두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설비연은 묵묵히 날 따라왔다.
매 순간 심각한 얼굴로.
‘가족과 친우가 모두 죽었겠지.’
그녀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모른다.
그렇기에 괜한 위로 따위는 하지 않는다. 가령 신교의 복수를 해주겠다거나 입에 발린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난 그녀를 위해 복수해줄 생각은 없었다. 난 나대로 천마신교에 복수할 뿐이었다.
우리는 호북성을 지나 호남성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사파의 권역이었기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물론, 설비연은 이새붕처럼 내 지적이 필요하진 않았다. 또 내게 비무한 이후에 무엇을 하든 먼저 보고했다. 조장이 아닌 조원처럼.
“자기 전에 검을 수련하고 오겠습니다.”
작고 낮은 목소리.
설비연은 내게 패배한 날에도 검을 들어 수련했다.
“그래.”
설비연이 수련하러 거리를 벌린다.
나 또한 가만히 앉아 명상을 시작한다.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비무를 떠올린다. 무연하, 남궁일몽, 설비연. 내가 이기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당시의 비무를 복기하며 순간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을지 연구한다.
그렇게 오늘도 변함없이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도중.
설비연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뜨고 그녀를 마주한다.
“왜?”
설비연의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날 향한 것은 아니다.
“괴한이 여인을 납치하여 끌고 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괴한?”
“네.”
정파의 권역에서도 사건 사고는 끊이질 않았다.
호남성은 사파가 패권을 잡은 지역.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이상하지 않으리라.
“추격해도 되겠습니까?”
이번 임무는 내가 결정권자다.
비무에서 패배한 이후, 그녀는 중요한 것은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잠깐이었다.
“같이 가지.”
난 협의심에 불타오르는 사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악을 처단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알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고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난 서녕지부에서 하오문의 기녀들의 기구한 사연들을 듣고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강제로 납치되어, 기녀가 되어버린 여인들.
평범하게 살았다면 적당한 상대와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을 여인들이었다.
“추적할 수 있나?”
설비연이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흑룡단이라면 추적술은 기본입니다.”
“앞장서.”
설비연이 은밀하게 경공을 펼쳤고, 나 또한 그녀를 바짝 뒤쫓는다.
그녀의 추적술을 신속하고 정확했다.
우리는 금방 여인을 납치한 자들을 거의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여인을 어깨에 들쳐 멘 상태여서 속도가 느린 것도 있겠지만, 나와 설비연이 따라잡을 수 없다면 아예 추적을 포기하는 게 낫다.
‘산으로 올라가는군. 저 위에 본거지가 있는 모양이야.’
멀지 않은 곳에 인신매매단의 거처가 있었다.
지금 인신매매단을 쫓는 이유는 여인들을 구해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설비연의 다른 실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그녀는 앞장서라는 내 명령에 거침없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야산의 중턱에 마련된 인신매매단의 거처에 도착했다.
순간 짜증이 치솟는다.
간간이 들려오는 여인의 신음.
미묘한 냄새.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한 가지였다.
‘짐승 같은 놈들.’
설비연의 시선이 느껴진다.
- 어떻게 할까요?
- 괴한들을 모두 죽인다.
모두 죽인다는 말에 설비연이 멈칫한다. 아마 내가 그런 명령을 내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보통 이런 경우엔 먼저 제압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으니까. 만약 이곳이 정파의 권역이라면 그들을 제압하여 인근 문파나 관아에 넘기면 된다. 그것이 인신매매한 이들에게 더 큰 형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사파의 권역이었다.
뒤처리하지 못하니 모두 죽이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 시작하겠습니다.
설비연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난 여인의 신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놈들의 목을 하나하나 끊는다.
순식간에 다섯 명을 베어버리고, 신음이 들려오는 목재로 만들어진 집 앞에 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집 내부에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다.
더러운 광경이 보인다. 알몸의 사내가 연신 몸을 움직이고 있다.
‘이건···.’
사내의 밑에 깔린 여인.
그런데···.
작은 등불에 비추어진 잔혹한 풍경. 여인의 피부는 시시각각 주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또한, 눈빛은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방중술이다.’
난 바로 허리를 움직이는 사내의 사지 근맥을 잘라내 버렸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힘줄이 끊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흉한 몰골을 드러낸 채로 바닥에서 뒤뚱거리는 사내. 그 밑의 여인은 이미 목숨을 거둔 후였다. 난 옆에 있는 천으로 여인의 몸을 가린 후, 사내의 어깨를 밟아 그의 눈을 바라본다.
번들거리는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