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흑룡각.
전각의 규모로 따지자면··· 단목세가의 장원보다 넓었다. 얼핏 보이는 대형 연무장이 다섯 개. 크고 작은 전각들이 촘촘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과거 흑룡단의 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하지만···.
흑룡각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몇몇 연무장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고작해야 다섯 정도.
무인들보다 하인이나 시비가 더 많은 듯한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그런데 옆에 아이는 시종이더냐?”
“저, 저는 이새붕이라 합니다!”
이새붕이 꾸벅 인사하고 광풍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난 그를 보며 말했다.
“제 수하입니다. 그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 아이도 같이 흑룡단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의창현에서 저와 함께 쭉···.”
“당연히 되지.”
“예?”
내가 알기론 흑룡단은 아무나 받지 않는다.
상당히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설득하려면 조금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리 쉽게 승낙하다니.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넌 너만의 조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나만의 조라고?
그 말은···.
‘조장?’
“난 너를 정말 좋게 보고 있거든.”
씨익.
흉악한 얼굴로 미소짓는 광풍개. 내 옆에 있는 이새붕이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할 정도였다.
“방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거라. 내일 흑룡전으로 오면 된다. 시간을 맞추어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를 따라와라.”
“예, 조장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조장님이란 말에 광풍개가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가 조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 *
조장 회의.
흑룡단의 인원은 다른 단에 비해서 그 수가 현저히 적다.
단 내부 조직을 대(隊)가 아니라 조(組)로 구성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수정예라는 측면에서 흑룡단을 바라보면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긴 했다. 각 조장은 다른 세 개의 단의 대주급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대단한 조장급의 인재들이 있는 이유에도 흑룡단의 인원이 적은 이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 반대한다.”
3조 조장 옥면빙심 설비연이 말한다.
그녀의 말엔 냉기가 풀풀 흐르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2조 조장 광풍개가 인상을 찌푸린다.
“설비연, 상황을 들어보니 단목장룡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금창대의 대주가 말하기를 정확히 마혈을 짚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뭐가 불만이지?”
“흥, 운이 좋았을지 어떻게 알아? 난 그런 놈들을 많이 봐왔어.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안일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그 결과는 모두 뻔했지. 그런 놈이 조장? 차라리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해서 정신교육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광풍개가 서서히 기세를 일으킨다.
그는 흑룡단에서 가장 열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는 흑룡단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장의 신분으로 직접 단원들을 구하러 다녔다. 뭐 대부분 영입에 실패했지만, 단목장룡이라는 최고의 대어를 낚아 왔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단목장룡을 영입했더니 뭐?
난 반대한다?
“설비연,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네가 뻔하다고 했던 결과는 혹시 ‘그날’의 일을 말하는 건가?”
설비연의 고개가 뚝뚝 끊어지듯 돌아간다.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야. 몸 안쪽부터 얼어붙는 고통을 느끼기 싫다면.”
“날 얼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 광풍개를?”
두 사람이 서로 노려보고 있을 때.
너무도 인자한 표정의 사내가 둘을 말린다.
“워워, 그만하게. 단주님이 오셔도 이렇게 싸울 텐가?”
그는 무상검귀(無常劍鬼) 첨필선.
흑룡단의 1조 조장이다. 평소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순한 면모를 보이지만, 검을 잡으면 자비를 모르는 검귀가 되는 인물. 화산파 출신으로 연인과 친우를 사파의 마두들에게 잃고, 흑룡단에 들어온 인물이다.
첨필선이 단주라고 말하자 두 사람의 기세가 옅어진다.
그리고.
“허허허, 비연아 오늘은 왜 그리 뿔이 났느냐?”
“단주님···!”
설비연이 벌떡 일어선다.
“단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전혀 뿔이 나지 않았어요.”
“껄껄, 그거참 다행이구나. 편히 앉아라.”
흑룡단의 단주 조백.
개방의 전대 방주로서 현 조장들을 흑룡단에 들어오게끔 한 장본인이다.
그는 40년 전 마지막으로 치러진 정사대전에서 수많은 마두의 육신을 두 주먹으로 짓눌러버리던 전장의 악귀. 사파를 지탱하는 3개의 축 중 하나인 혈세귀막(血世鬼幕)과의 싸움에서 두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그의 존재감은 아직도 뚜렷했다.
“그래, 야패가 새로운 아이를 데려왔다고?”
“예, 단주님. 제 목숨을 걸고 자부하는데, 단목장룡은 정파 무림의 대영웅이 될 아이입니다. 조원으로 굴리기보다는 조장직을 주어 일을 맡겨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용봉지회 내내 지켜보았지만, 자질은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조장이라는 말에 설비연이 발끈한다.
“헛소리! 이제 막 약관을 넘은 아이가 조장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광풍개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년이 자꾸 내 말에 딴지를 걸면···!”
“그만.”
히죽.
첨필선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에 담긴 기운은 전혀 딴판이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기세.
“단주님 앞이다.”
조백이 손뼉을 딱 친다.
모두의 시선이 흑룡단주에게로 모인다.
“지방이는 외부 임무로 자리를 비웠지만, 새로운 조장의 임명에 단주인 나와 세 조장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설비연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단주에겐 어떠한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직접 보고 결정하자꾸나.”
“예, 단주님.”
광풍개의 손짓에 조원 하나가 밖으로 향한다.
대기하는 단목장룡을 부르려는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력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조백.
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간다.
‘무슨 이런 기운이···?’
조장이 되다
조백.
일흔이 넘은 노장. 그가 겪어본 실전은 매번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진짜 전장이었으며, 그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상대의 기세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한지 판단할 수 있었다. 하물며 이제는 시력을 잃어 감각은 더 예민해진 상태.
조백의 눈이 가늘게 뜨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굴곡의 흐릿함 뿐이었지만, 기(氣)의 형상만은 명확히 보인다.
‘수라(修羅)···?’
조백이 마주했던 적중 가장 강하고 무서웠던 이를 꼽자면 당연히 혈세귀막주였다. 혈세귀막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혈교의 후예라 불리는 문파. 혈세귀막주 또한 수라의 상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이든 가로막는 것을 파괴하는 그 강대한 기운.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분명히 수라의 기운이 서려 있긴 했지만, 그의 주위로는···.
‘음양오행의 기운이 조화로이 흩날리고 있다. 귀기와 동시에 음양오행의 순수한 기운이 동시에 존재한다? 내 감각이 무뎌진 것인가··· 아니면 정말 저 아이는···.’
조백은 침을 꿀꺽 삼켰다.
흑룡전에 들어선 단목장룡은···.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어찌 이런 일이···.’
조백이 인상을 찌푸리자, 설비연이 미소를 짓는다.
흑룡단주가 얼마나 사람을 잘 보는지 알고 있는 그녀였다. 단목장룡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흑룡단에 오자마자 조장직에 오르다니··· 말도 안 되지.’
설비연도 단목장룡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아무리 운이 있었다고 해도, 암기로 제작되지 않은 젓가락으로 마혈을 정확하게 맞춘 것은 운만으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녀는 단목장룡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능을 과신하여 행동하면 어떤 불행을 초래하는지 설비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약관을 넘었는데, 조장이라고? 말도 안 되지. 내 밑으로 들어오면 기본기부터 착실하게 알려주마.’
설비연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가만히 단목장룡을 지켜보던 흑룡단주가 입을 연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께서 손주를 아주 잘 키웠구먼··· 끌끌.”
조백의 그 말에 설비연과 광풍개의 희비가 교차한다.
설비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으며, 광풍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상가주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더 노력하려 합니다.”
조백이 단목장룡에게 묻는다.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군. 거짓으로 고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길 바라네.”
“예, 알겠습니다.”
“자네가 흑룡단에 들어오려는 목적이 무언가? 듣자 하니 맹에 오자마자 다른 세 단에서 접촉을 해왔다고 들었네. 용봉지회의 우승자인 자네라면, 그곳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하여 무림맹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도 있지 않았나?”
조백의 말에 광풍개가 설비연을 흘끔 바라본다.
설비연은 애써 광풍개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단목장룡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한다.
이제 그의 목표를 밖으로 꺼낼 때가 된 것 같았다.
“가장 높은 마(魔)를 부수고 싶습니다.”
“가장 높은 마?”
모두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보통 마를 지칭하는 곳은, 십만대산에 자리를 잡은 마교. 하지만 현 무림에서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보통은 사파에 원한이 있으면 있었지, 마교에 직접적인 원한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니까.
“정확히 하고자 다시 물어보겠네. 자네가 말하는 가장 높은 마는, 마교를 지칭함이 맞는가?”
“예. 맞습니다.”
우뚝.
설비연이 움직임을 멈춘 채로 단목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흑룡단의 현 조장들 대부분은 마교보다는 사마련 쪽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마교라니?
설비연의 눈동자가 깊어졌고, 조백은 다시 물었다.
“단목세가가 마교와 직접적인 악연이 있었던가? 자네가 그런 생각을 품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죄송합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 이 자리에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목표라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단목장룡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다.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례적인 말로서, 마교는 정파 무림의 오랜 숙적이라느니 같은 뻔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광풍개는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흑룡단주는 계속 질문을 이어나갔다.
“자네는 한 조를 맡아 이끌 자신이 있는가? 조장이란 조원의 생명을 책임지는 자리일세.”
단목장룡 또한 그 부분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것이 몸은 힘들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으론 편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막중한 부담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부담을 느끼기 두려워한다면 평생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결코, 과거처럼 살아가지 않으리라.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단목장룡은 어제 광풍개에게 조장 직을 맡을 수도 있다고 들었을 때부터 이제껏 그려왔던 계획을 더 세분화했다. 언젠간 단목장룡 그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기회가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단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제가 조장이 되면 제 조원들은 흑룡단의 전통 수련 방식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설비연이 단목장룡을 노려본다.
하지만 조백이 손을 들어 제지했기에 단목장룡에게 따지지 못한다.
“전통의 수련방식을 따르지 않겠다···. 흑룡단은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지. 흑룡단에서 왜 그런 험한 수련방식을 택하는지 알고 있는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단순히 규칙에 맞게 비무를 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상대의 목숨을 빼앗고, 언제든 자신의 숨통이 끊길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단목세가 성도지부 부지부장으로 있으며 지부원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습니다. 저만의 방식을 더 발전시켜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
기껏 조장이 되었는데 자신만의 길로 나아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흑룡단주는 곰곰이 생각한다.
흑룡단의 수련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변하긴 했지.’
흑룡단의 위세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부정적인 부분이 바로 전쟁을 준비한다는 그 악독한 수련방식이다. 포부를 갖고 흑룡단에 들어온 이들은 그 수련에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전 찬성합니다. 단목장룡이 성도지부의 부지부장으로 다녀간 뒤, 지부원들의 무공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더군요. 이제 우리 흑룡단도 조금씩 바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광풍개는 찬성했으며.
“난 반대에요. 최소한 반년은 지켜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비연은 반대했다.
그리고 1조장 무상검귀 첨필선은···.
“현 화산의 대제자인 무연하. 그 아이는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지요. 참으로 밝고 굳센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꺾고 올라온 단목장룡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비연이 부들부들 떤다.
대체 뭘 믿고 덜컥 조장에 앉히겠다는 말인가? 다만 상석에 앉은 흑룡단주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 결정권자인 흑룡단주의 선택이 남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흑룡단주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단목장룡을 새로운 조장으로 임명하네. 다만, 기존의 조원이 재배치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네의 조원은 직접 영입해야 하네. 괜찮겠는가?”
“예, 감사합니다.”
조백이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뜬다.
단목장룡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귀기와 음양오행의 기운이 조화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네가 품은 이상이 어떤 것인지 이 늙은이에게 보여주게.’
흑룡단주의 흐릿한 눈동자가 단목장룡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