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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조장께선 칼 같은 분이라 할까요? 한번은 저의 대원이 작은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종일 불러다 놓고 설교를 하셨지요. 지금도 그 대원은 설 조장님이라면 학을 뗍니다. 처음엔 그 미모를 보고 연모하는 대원들도 많았지만, 하하··· 웬만한 사내들은 그분의 기에 입도 떼지 못하지요. 되려 지금은 그 차가운 얼굴만 봐도 무서워하는 대원들이 많습니다.”
정주로 향하며 금창대의 대주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설 조장, 설비연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녀는 흑룡단의 3조 조장이라 했다.
당시에 보았던 외모와는 달리 실제로는 30대 중반이라나. 뭐 무림인들이 범인들과 달리 노화가 느리다는 걸 감안하면 특별한 일은 아니다. 사천당문에서 보았던 당용아를 보면 당옥정의 친언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설비연이라는 여인. 설 씨는 중원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성이었다. 그리고 그 성 씨를 사용하는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그녀가 북해빙궁 출신이었을 줄이야.’
과거 북해빙궁은 새외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단일 문파였다.
하지만 그들의 영광은 약 12년 전 완전히 부서진다. 다름 아닌 천마신교에 의해서.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던 설비연. 사도명이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결국 도주했다고 했었지.’
신교는 언제나 정벌의 야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중원은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기엔 위험한 곳이었고, 그나마 덜 위험한 북해빙궁의 정벌에 나섰었다. 당연히 북해빙궁은 신교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고, 지금 북해빙궁은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북해빙궁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신교에 끌려와 노예가 되었다고 했지만, 소궁주였던 설비연은 지금 무림맹의 흑룡단의 조장으로 있었다. 그녀 또한 신교의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흑룡단엔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
참혹한 전쟁은 30년의 세월에 덧없이 부서졌고, 대부분 평화가 지속되리라 생각한다. 아마 설비연은 북해빙궁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계속 흑룡단에 있으리라.
‘솔직히 첫인상은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 정도 사연이 있다면··· 믿을 만하겠어.’
사람을 믿는 게 아니다.
사연을 믿는 것이다. 영웅 행세를 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그런 이들이 더 뒤를 맡기기에 좋았다.
“그건 그렇고, 단목 소협께선 흑룡단에 입단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마침내 편무강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은근슬쩍 흑룡단보다는 다른 곳이 낫다고 피력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순찰당은 어떠십니까? 단목 소협이라면 원하는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단목 소협께서 순찰당에 들어오신다면, 바로 부대주급의 직위를 보장해줄 수도 있습니다. 용봉지회의 우승자는 그 정도 혜택은 혜택도 아니지요. 제가 당주님과 담판을 지어···.”
“죄송합니다. 대주님, 광풍개 대협과 이미 약조한 내용이라서요. 여기서 번복한다면···.”
꿀꺽.
광풍개라는 말에 편무강이 몹시 당황한다.
“과, 광풍개··· 하, 하하하! 그, 그랬군요!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설비연도 그랬지만, 광풍개도 맹에선 꽤 입지가 있는 듯했다. 뭐 만월 내에서도 행패를 피운다니 뭐니 소리쳤던 걸 상기해보면···.
“순찰당에 들어오시지 않더라도 전 단목 소협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군요. 언제든 금창대의 힘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십시오. 마두 놈을 젓가락으로 잡아버린 행동력! 그 의협심! 저 편무강은 그걸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저 마두 놈들은···.”
“맹으로 가서 제대로 심문할 예정입니다. 배후 세력이 있는지, 무공은 어디서 배웠는지 말입니다. 심문 결과가 궁금하시면 한 번 순찰당을 찾아주십시오! 하하!”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를 빡빡 민 두 사내.
아니, 반들반들한 것을 보면 밀었다기보단··· 자연스레 빠진 듯하다. 정주로 오면서 두놈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날이 갈수록 불안증세가 심해지고 있다. 마치 금단현상처럼 말이다.
‘색마라고 했던가?’
뭐 중원 무림에 방중술은 그 종류가 많다. 하지만 남의 정기를 탐한다는 점에서 그런 무공들은 결말이 그리 좋지 않았다.
‘후에 순찰당에 한 번 들려야겠군.’
편무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나아간다.
슬슬 할 이야기도 떨어져 갈 즈음.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성이 웅장함을 뽐내고 있다.
무림맹.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
이곳은 더 이상 후기지수들의 공간이 아니다. 내가 용봉지회에서 우승했다고 인재로 불리고 있지만, 무림맹에선 그런 배려를 기대하면 안 된다.
무림맹의 요직에 앉아 있는 이들은, 지금의 나처럼 후기지수 시절을 거쳐왔을 것이다.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용봉지회. 이곳엔 나 같이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이들도 있으리라. 용봉지회의 우승을 자랑으로 삼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결의를 다졌다.
‘이제 시작이다.’
마음을 다잡고 무림맹의 성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밝은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단목 공자님, 안녕하세요. 저는 황룡단의 상관일랑이라 해요. 단목 공자님과 이야기를···.”
상관일랑의 앞을 30대의 사내가 가로막았다.
“황룡단과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단목세가는 거의 오대세가의 반열에 오른 가문이 아닌가? 당연히 청룡단과 이야기를 해야 해야지!”
그리고 또 한 사내가 등장해서 소리친다.
“오대세가가 무슨 상관이지? 요즈음 시대가 어떤 시댄데 출신을 따지고 있는가? 적룡단은 그런 것에 구태의연하게 매달리지 않는다네! 장룡 군! 자네의 꿈을 펼치려면 적룡단이 제격일 것 같군!”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적룡단이 가장 잘 따지는 게 출신 아닌가요?”
“뭔가 잘못 알고 있군! 적룡단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네!”
“선배님들, 황룡단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슬쩍 옆을 돌아본다.
편무강은 무림맹에 가면 바쁠 수도 있다고 조언했었다. 그게 이런 의미였던가.
‘무림맹 내부의 경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더니···.’
흑룡단
내 앞에서 적룡단, 청룡단, 황룡단에서 나온 이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저들마다 이유를 들며 내가 각 당에 입당해야 하는 이유를 따지고 있었다. 나와 같이 왔던 편무강은 대머리 색마 놈들을 뇌옥에 가두기 위해 먼저 떠나갔다. 난 혼자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있다.
바로 흑룡각으로 간다고 해도 되겠지만, 무림맹에 왔으니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음알음 알게 된 정보나 개방을 통해 구매한 정보보단 직접 보고 들은 게 확실했으니까.
“혈연 위주로 당을 운영해온 청룡단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허 형, 말이 이상하시오. 혈연 위주? 그렇게 따지면 구파일방의 제자들만 쭉쭉 밀어주는 적룡단은···.”
“허 형? 지금 감히 부대주 주제에 대주인 내게 형이라 부른 건가?”
“그럼 아우라고 불러야 하겠소?”
그렇게 두 사람이 싸우고 있으니 상관일랑이 슬그머니 내게 다가온다.
“단목 공자님, 저어어기 조용한 곳에 가서 대화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내가 그녀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지금 위아래도 없이 뭣 하는 것이냐?”
청룡단의 모용구가 끼어들었다.
“전 단지 단목 공자님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을 뿐이에요.”
“됐네. 단목 공자, 나와 사내 대 사내로 이야기하지. 청룡단에 들어오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 모두 알려주겠네.”
“청룡단보다는 적룡단이 훨씬 낫지. 이번에 부맹주로 승격하는 것은 적룡단주님이 확실시됐는데, 장룡 군. 그걸 생각해보게. 어떤 것이 자네의 무림맹 생활에서 더 이득일지. 더군다나 자네는 화산파가 개최한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지 않았는가?”
“잠시 허 형, 그게 무슨 소리요? 적룡단주님이 적룡단주님께서 부맹주로 승격하신다는 말씀이오?”
“저도 그건 좀···.”
“···.”
부맹주 승격.
무림맹에선 부맹주에 오른 이들이 무림맹의 맹주가 될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세가로 따지만, 소가주가 언젠간 가주가 될 것이 내정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경쟁을 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도 꽤 중요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크게 와닿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줄을 잘 서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하나하나 재보고, 따져본 뒤 내가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다.
“선배님들, 죄송하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희 황룡단에선 단목 공자님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나도 마찬가지! 자네 생각을 속 시원히 말해주게!”
“그래, 난 장룡 군을 믿네!”
세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날 향한다.
그리고 난.
“전 흑룡단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네? 흑룡단? 정말 흑룡단에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허허!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네. 지금 흑룡단의 상황을 말해주면···.”
“듣자 하니 옥면빙심과 마두 놈을 잡다가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생각을 존중한다던 이들이 다시 나를 설득하려 말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때.
“지금 뭣들 하는 것이오!”
쿠우웅!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한 사내가 달려와 기세를 잔뜩 뿜으며 외쳤다. 그 기세가 워낙 흉흉하여 각 단에서 나온 세 사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공 대협···.”
“광풍개···.”
“당신들 지금 미치셨소? 감히 우리 흑룡단에 들어올 후배를 가로채려 들어? 나랑 해보자는 것이지?”
“크, 크흠··· 공 조장, 내 말 좀 들어보게.”
“듣긴 뭘 들어! 아무리 무림맹이 개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개판인 줄은 꿈에도 몰랐소! 언제 무림맹을 대표하는 각 단에서 사람이 외성의 입구까지 기어 나와 후기지수를 영입하려 이리 마중 나왔소? 부끄럽지도 않소?”
“그게··· 장룡 군은···.”
“장룡 군이 뭐라고 했소? 허 선배, 말해 보시오.”
꿀꺽.
적룡단에서 나온 사내가 광풍개의 광기 어린 눈빛에 침을 삼킨다.
광풍개 공야패.
사파의 권역이었던 절강성.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무공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흑도 방파의 마두들을 죽여나갔다. 타고난 싸움꾼. 그가 절강성에서 죽인 사파인만 족히 백은 넘는다고 한다. 물론, 정면 대결로 그들을 죽였다기보다 기습을 하거나 함정을 파놓고 싸운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분명히 한계는 존재했다.
그 또한 단단히 화가 난 사파인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위기가 있었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당대 개방 방주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광풍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많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도 확실히 드러나는 건.
그는 광풍개라는 별호와 딱 맞는 사내였다.
지금도 세 단에서 나온 사람들과 수틀리면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미래를 보면 악수일지 묘수일진 모르겠으나 세 사람은 찔끔하며 물러난다.
“호, 호호··· 공 대협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일단 물러나도록 할게요. 단목 공자님, 다음에 다시···.”
“무슨 다시야! 만약 다시 장룡에게 허튼수작을 부리면 나 광풍개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끄응, 네에에··· 그럼 나중에···.”
꾸벅, 황룡단에서 나온 상관일랑이 가장 먼저 도망치듯 떠나갔다.
그다음엔 청룡단의 모용구.
하지만 적룡단의 허정웅은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면 긴장한 것이 역력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놓는다.
“크흠! 공 조장! 설 조장과 단목 장룡이 다퉜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설 조장이 아랫것들을 얼마나 굴리는지 알고 있지? 난 그게 걱정되어 이리 장룡 군을 마중나온 거라네.”
광풍개의 눈썹이 꿈틀한다.
“설 조장과 싸웠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그건 옆에 있는 장룡 군에게 듣게. 장룡 군, 난 열려있는 사람이니 적룡각에 언제든 찾아오게. 크으으음! 나중에 보세!”
허정웅은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표정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았다.
세 사람이 떠나가자 광풍개가 미안하다는 듯이 날 바라본다.
흉악한 얼굴이다 보니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표정이 읽히는 듯하다.
“미안하구나. 무림맹의 더러움을 오자마자 보게 하다니.”
“아닙니다. 오히려 무림맹의 현 상황이 어떤지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구나.”
광풍개와 함게 외성에서 내성으로 향한다.
흑룡단의 전각인 흑룡각은 그곳에 있었다. 광풍개와 함께 무림맹 내부를 거닐고 있으니 대부분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은근히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설비연 조장과 다툼이 있었다고?”
그걸 다툼이라 해야 할까.
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외부인에 불과했기에 사과했을 뿐이다. 좋은 의도로 행동한 것은 맞지만, 마두를 쫓던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표적을 쫓다가 엄한 사람이 나서서 일을 망쳐버린다면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설비연이 내 실력을 믿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설비연을 믿고 있지 않았으니.
“다툼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내게 모두 말해줄 수 있겠느냐?”
광풍개는 확실히 날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이런 사람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난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광풍개에게 전해주었다.
광풍개는 화도 내지 않고,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왠지 그의 눈빛이 깊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