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흘 후.
또 다른 결승전이 있는 날이다.
사천당문의 당옥정과 모용세가의 모용란. 오대세가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단목장룡과 남궁일몽의 비무 만큼은 아니었지만, 관중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두 여인이 비무장에 오르자 모두 함성을 터트린다.
특히 사내들의 목청이 대단히 컸다. 어떤 무리는 당옥정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모용란의 이름을 외친다. 두 여인은 무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름다운 외모로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단목장룡은 당연히 당옥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옥정이의 눈빛이 정말 진지하군.’
비무장에 오른 당옥정.
그녀의 눈빛엔 독기가 가득했다.
사실 이제까지 비무를 보며 느꼈던 모용란의 약점을 그녀에게 모두 알려줄 수 있었지만, 당옥정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런 만큼 그녀가 이 비무에 얼마나 진중하게 임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그녀가 꼭 이겼으면 했다.
비무가 시작되고, 당옥정의 검과 모용란의 쌍검이 부딪친다.
둘의 실력은 거의 엇비슷했다.
당옥정의 각오도 만만치 않았지만, 모용란 또한 절대 당옥정에 뒤지지 않았다. 두 여인은 비무가 아닌 마치 실전처럼 모든 기량을 펼쳐냈다.
당옥정은 뇌공검법뿐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혀왔던 암기까지 활용했으며, 모용란은 초장부터 검기를 활용하며 당옥정을 압박했다. 나와 남궁일몽의 비무와는 달리 두 여인의 몸엔 하나둘 생채기가 쌓여갔다.
“옥정이가 저렇게 진지한 모습은 정말 처음 보는군···!”
옆에서 팽염호가 감탄할 정도였다.
난 그 비무를 보며 감탄보다는···.
‘쓰리군.’
그녀가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리다. 남궁일몽과 비무를 마치고 내려온 당옥정이 내게 다친 곳이 없냐고 물었던 마음이 이러했을까.
두 여인은 정말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갔다.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당옥정의 비무를 계속 지켜보았다. 마음이 쓰리다고 그녀의 비무를 외면할 순 없다.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러갔을까?
눈을 깜빡이는 잊을 정도로 두 사람의 비무에 집중했다.
비무를 관전하는 군중들의 입에서 탄성이 아닌 탄식이 터져 나온다.
두 여인은 체력뿐 아니라 내공까지 모두 소진한 듯했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그럴 승부였지만.
결국,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다.
그것이 승부의 세계였다.
“후우···! 정말 대단한 승부였군! 그렇지 않은··· 어딜 가는···.”
하지만 지금의 내겐 승부의 결과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비무가 끝나자마자 비무장으로 달려나갔다.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당옥정.
그녀의 맥을 잡고 기운을 불어넣는다. 힘없이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기 싫었다.
천천히 당옥정의 눈이 뜨여진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당옥정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진 거야···?”
당옥정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마지막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인 듯했다.
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우승 축하해.”
살아야 하는 이유
두 여인의 비무는 마지막 순간까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용호상박. 언제 둘 중 하나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비무. 육체가 한계에 도달하고, 의지력이 가른 승부. 두 여인의 승패를 가른 것은 한 끗 차이였다. 당옥정이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승리를 갈망했던 것 같았다.
그런 당옥정이 멋있었다.
또한, 안쓰러웠다.
그녀의 몸엔 크고 생사결을 방불케 하는 승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마 흉터가 되겠지. 무인에는 사내와 여인이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리다.
임시로 만들어진 천막 안에서 당옥정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조금씩.
당옥정의 눈이 뜨여진다.
“···.”
“일어났어?”
질끈!
당옥정이 다시 눈을 감는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아 아래쪽을 바라보니 그녀의 발가락이 쉴새 없이 꼼지락댄다. 뭐 하는 거지?
“왜 그래?”
“그, 그게···.”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당옥정.
“···뒤돌아주면 안 돼?”
몸을 돌린다.
뒤에서 당옥정이 벌떡 일어서는 게 느껴진다. 비무가 끝난 후 지속해서 진기를 불어넣어 세맥과 근육을 풀어주었다. 다행히 거동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는 모양. 뒤에선 부산스러움이 가득했다. 대체 뭘 하나 싶어서 궁금했지만, 그녀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됐어!”
몸을 돌린다.
당옥정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헝클어졌던 그녀의 머리가 정돈되어 있었다. 침상 구석엔 작은 동경이 반대로 놓여있다. 아마 동경을 보고 머리를 매만진 모양이다. 매번 같이 수련하며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을 보았는데, 오늘은 그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굳이 그걸 언급하진 않는다.
“몸은 괜찮아?”
“응? 아···.”
팔을 휘적거리던 그녀가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뭐지? 그렇게 아프지 않은데? 근육통이 거의 없어. 나 오래 잔 거야?”
“두 시진 정도?”
“정말? 근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이상하네···.”
때마침 당옥정을 봐준 의원이 들어온다. 무림에 흔하지 않은 무림의. 더군다나 여인이었다. 용봉지회는 여인도 참가하는 대회였기에 화산파에서 초청한 유소라는 의름의 중년 의원이다.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당옥정을 바라본다.
“옆에 계신 공자님이 계속 진기를 불어 넣으셨답니다. 어찌나 기의 제어가 세밀하던지 저도 배우고 싶었다니까요? 아픈 곳은 없으세요?”
“정말요···?”
“네, 정말요. 젊음이 정말 좋다니까요. 저도 저런 낭군님이 있었다면 의원 일은 때려치우고 현모양처가 되었을 텐데 말이에요. 자, 손을 내주시겠어요? 혹시 모르니 맥을 짚어볼게요.”
“나, 낭군님···?”
당옥정이 유 의원의 주책에 당황하며 손을 내민다.
당옥정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두 시진 전 살벌한 싸움을 벌였던 여인이 맞는지 의문일 지경이다. 뭐 저런 것이 당옥정의 매력이긴 하지만.
“어머,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요. 낭군님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 그냥 전 원래 심장이 빨리 뛰는 체질이라···!”
싱긋 미소짓는 유 의원.
그녀가 날 돌아보며 말한다.
“맥을 짚기 어려울 것 같은데,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그 말에 당옥정이 중얼거린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잠시도 헤어지기 싫나 보네요? 호호호!”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조금 그렇기도···.”
능글맞은 유 의원. 내게도 저런 장난을 계속 걸어왔었다. 그런데 당옥정의 반응이 맛깔나니 즐겁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시 나가 있을게.”
천막 입구로 나온다.
임시로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안에서 대화가 들린다.
“저런 사내는 빨리 확 잡아야 해요.”
“그런 게···.”
“저런 사내는 여인들이 가만히 두질 않아요. 어떤 고약한 아이들은 몸을 무기로 쓸 때도 있답니다. 저도 그런 여우 같은 계집애들한테 연인을 뺏겨봐서 알아요.”
“네? 몸을 쓴다는 건 설마!”
“후후훗, 그래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단목 소협께서 당 소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아마 다른 여인들에게 흔들리진 않을 거랍니다.”
“정말요? 절 보는 눈빛이 어땠는데요?”
“글쎄요··· 사랑이 넘쳐 보인 달까?”
“허···!”
한번 발동이 걸린 여인들의 수다는 멈출 수가 없었다. 뭔가 몰래 엿듣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감고, 내기를 끌어올려 귀를 막는다. 솔직히 두 여인의 대화가 궁금하긴 했지만··· 예의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유 의원이 천막에서 나온다.
“이제 들어가셔도 된답니다. 후훗.”
“옥정이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네, 단목 소협 덕분에 몸 상태가 정말 좋네요. 저도 비무를 관전했지만, 이렇게 빨리 회복될 것은 아니었는데··· 모용 소저께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후후, 모용 소저는 제가 잘 치료할 테니, 단목 소협께선 당 소저를 잘 돌봐주세요.”
유 의원이 떠나간다.
바로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당옥정의 얼굴이 목부터 귀까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그렇게 얼굴이 빨개?”
“아냐! 이상한 생각 같은 건 안 했어! 정말이야!”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른다. 비무장 위에서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니 당옥정이 고개를 푹 숙인다.
“옥정아.”
“으응···?”
“아마 폐회식이 끝나면 난 흑룡단에 갈 거야.”
“뭐? 흑룡단? 무림맹에 있는 흑룡단을 말하는 거야?”
당옥정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표정 변화가 매우 극적이었다.
“맞아. 최근에 광풍개 대협이 나보고 흑룡단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곳에 가기로 했어.”
“다시 성도지부로 가진 않을 거야?”
“아마도.”
“···.”
그녀가 슬픈 눈빛을 한다.
그리고 무언가 다짐한 듯한 눈빛으로 날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된다.
“안 돼.”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따라오겠다는 거 아니야?”
“어, 어떻게···?”
그녀가 깜짝 놀란다.
예상하지 못하면 바보겠지.
“지금 모든 걸 말해줄 순 없지만, 난 목표가 있어. 지금 현재는 그 목표에 가장 빨리 다가가는 일이 바로 흑룡단이야. 아마도 꽤 위험하겠지. 그러니까···.”
“···알겠어.”
“···.”
바로 수긍하는 당옥정.
그녀가 바로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아직 많이 약해. 남궁 소협과 비무하는 널 보며 느꼈어. 너와 나의 격차는 너무너무 크다는 걸. 운이 좋게도 모용 소저를 이기긴 했지만··· 그걸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걸. 지금 널 따라 흑룡단에 따라가도 네게 짐이 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녀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암천회의 갈유화와 만난 뒤로 그녀는 무공 수련에 빠져들었다. 처음 당옥정이 내게 비무를 패배하던 날, 그녀는 눈물을 흘렸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단지···.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난 더 노력할 거야. 지금 당장은 널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
나보다 강한 여인과 혼인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당옥정은 그런 웃기지도 않은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당옥정의 결의가, 마음이 내게 온전히 전해진다.
“나중에 더 강해지면··· 네게 방해가 되지 않을 때··· 그땐 널 따라가도 될까?”
아니다.
아마 그녀의 바람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때가 되면, 아마도···.
“아니.”
내 말에 당옥정이 몹시 당황한다.
하지만 그녀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내가 먼저 널 찾아갈게.”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어떤 이는 금은보화를 모아 부자가 되려, 어떤 이들은 무공을 익혀 최고가 되고자 한다. 지금의 나는 복수뿐이었다.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절대 간단하지 않은 그 여정에,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살고 싶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