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236)

* * *

용봉지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패자와 승자가 극명하게 나뉘는 용봉지회. 그곳에서 난 무난하게 승리를 쟁취해나갔다.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무연하. 그를 이기고 결승에 올라갈 때까지는 그리 긴장할 만한 상대는 없었다. 사실 무연하와도 흥미진진한 비무였을 뿐이지 긴장한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용봉지회의 본선에 진출한 이들 중, 신교에서 이미 서적으로 보았던 무공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신교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왔던 무공서들은 최소 30년 전의 무공서다. 그보다 더 오래된 무공서도 많았다.

무공은 중원 무림의 세월에 따라 점차 발전했다. 고대의 무공이 더 강하다는 인식도 있지만, 그건 무공서의 일부가 여러 이유로 소실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것이다. 무공은 계속해서 발전한다.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켰느냐를 살펴보는 것도 내게 도움이 된다.

오늘은 소림사의 정현과 남궁세가의 남궁일몽이 4강에서 맞붙는 날이다.

그리고 난 이미 결승에 진출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되는군. 소림사의 무공과 남궁일몽의 재능.’

남궁일몽이 과연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까?

정현이라면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상대였다.

관중들의 열기가 내가 있는 곳까지 전해져 후끈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비무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으니 팽염호가 다가온다.

“자네는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난···.”

팽염호는 소림사의 정현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되려 팽염호가 실망할 것이다.

“솔직히 남궁 소협이 이길 것 같군.”

“나도 그렇다네···! 그는 천룡각에서 참으로 많은 친우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지. 압도적인 재능! 천룡각에 모이는 이들은 모두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무공을 수련했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는 겸손해지곤 했지!”

그렇게 말하는 팽염호는 남궁일몽에게 기가 죽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염호, 넌 어땠는데?”

“하하하! 난 흥분됐다네! 아버지께선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하는 거라 내게 가르쳐 주셨지. 사실 천룡각에 남궁 소협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자만했을 수도 있었지. 난 자만하지 않을 것이라네! 자네도 그렇고 남궁 소협과 정현 스님까지···! 아직 내가 넘어야 할 산이 많지 않은가?”

팽염호는 팽염호였다.

정현에게 패배하여 분한 감정은 딱 하루였다. 지금은 이렇게 의욕을 불태운다. 가끔 새벽에 공동 연무장에 가보면 항상 팽염호가 있었다. 지독한 수련광. 어제의 패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도 재능이 아닐까?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는 그런 재능.

“역시 넌 대단하네.”

“뭘 그런 말을! 자네도 나 못지않은 수련광이지 않은가? 오히려 난 남궁 소협보다 자네가 더 무섭다네! 남궁 소협은 솔직히 천룡각 내에서도 유명한 뺀질이였는데 자넨 노력까지 겸비했지 않은가?”

피식.

팽염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는 귀를 울리는 저 목청도 상쾌한 느낌이랄까?

“너한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네.”

“좋네! 그런 마음가짐! 나도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하도록 하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비무에 집중해보도록 하지.”

팽염호가 비무장에 고개를 돌렸다.

정현과 남궁일몽이 비무장에 오른다.

관중들이 열띤 환호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그것을 알아채고 경악하기 시작한다.

“어?”

“맨손이잖아?”

“하하하···! 이거 참! 남궁 소협도 괴짜긴 괴짜군!”

“그러게.”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향. 아니면 정현 정도는 맨손으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남궁일몽은 이번 4강전에 검을 아닌 맨손으로 출전했다.

용봉지회에선 남궁일몽의 기행을 막을 규정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보통 용봉지회라면, 상대에게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이제껏 익히고 배워온 무공을 선보여야 한다. 남궁세가에도 권법이 있겠지만, 남궁일몽의 주 무기는 검이었다.

당연하게도 정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난 내력을 움직여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리 멀진 않았기에 정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선 빈승을 무시하는 것이오···?”

“무시하긴요? 전 권법도 충분히 익혔습니다.”

“그게 무슨···!”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권이든 검이든 도든··· 모두 끝에 가서는 하나가 된다더군요.”

“지금 남궁 시주께선 그 끝에 도달했다는 말입니까?”

“아뇨. 저도 아직 그곳에 도달하진 못했지요. 다만···.”

“다만?”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끝에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바로 비무를 시작할 자세를 취했다.

“욕을 먹지 않으려면 압도적으로 이겨야겠군.”

내 말에 팽염호가 혀를 찬다.

“그러게 말일세! 쯧!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기 싸움이 더 심해지겠군!”

솔직히 나도 남궁일몽처럼 검이 아닌 다른 병기를 잡고 비무에 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용봉지회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나뉘지만, 그 본질은 정파 후기지수들의 친목을 다지는 잔치다. 남궁일몽의 의도가 조롱이 아니라 해도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궁세가라는 배경과 그의 천재성이 저런 결과를 낳았군.’

뭐 나와는 상관없었다.

남궁일몽이 뭘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시작된 비무.

정현은 분명히 흥분했을 테지만, 막무가내로 남궁일몽에게 달려들거나 하지 않았다. 비무장을 빙빙 돌며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고, 천천히 상대를 압박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만히 방비만 하던 남궁일몽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타닷!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간발의 차이로 정현이 피해냈다. 하지만 피해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궁일몽의 몸이 기괴하게 움직인다. 그의 주먹은 뱀처럼 꺾여 방향을 선회한다. 보통 저런 식으로 주먹을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보통 권에는 체중을 실어야 한다. 하체와 상체가 균형이 잡혀야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움직임은?

‘역시 평범한 무림인들과 다르다.’

파앙!

기괴하게 꺾인 주먹이 정현의 옆구리에 꽂힌다. 그런데 그 타격음이 상당하다.

“크윽···!”

내가중수법.

주먹에 담긴 기운으로 상대의 내부를 타격한다. 육체의 힘이 아니라 주먹에 담긴 내력을 믿고 저리 움직인 것이다. 사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대단히 어렵다. 이미 20살에 검강을 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

하지만 정현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았다.

옆구리에 주먹이 꽂히는 순간에 그 기운을 발판 삼아 몸을 크게 회전한다. 소림사는 권법만 사용하는 곳이 아니다.

쿠웅!

정현의 다리엔 체중과 함께 내력이 실려 있었다.

“좋아! 서로 교환했군!”

팽염호가 외쳤지만, 난 그것을 부정했다.

“아니. 남궁 소협의 얼굴을 봐.”

남궁일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정현의 각법에 전혀 타격받지 않았다는 뜻. 그에 반해 정현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로 일격을 허용한 시점부터 비무는 더 빠르게 진행됐다.

남궁일몽이 주먹을 내지르면, 정현이 그것을 막고 반격한다. 서로 한 대씩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관중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들은 비무만 재밌으면 된다. 무연하처럼 눈요기가 될 만한 무공이 아니라면, 저리 화끈하게 맞붙는 것을 더 좋아한다.

경쾌한 타격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퍼억! 퍽! 퍼어억! 퍽퍽!

정현은 검이 아닌 주먹을 든 남궁일몽을 향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으로는 절대적인 실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일 각이 지난 후.

정현의 입과 코에선 피가 흘러나왔고,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하지만 남궁일몽은 처음 그대로 움직임이 가벼웠다.

이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인데도, 정현은 포기를 선언하지 않았다.

남궁일몽이 검이 아닌 주먹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 성격이 저러한 것일까. 용봉지회에선 승패가 확실히 갈리면 패배를 선언하는 게 미덕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힘내라! 소림사!”

“태산북두! 정파의 기둥!”

그러한 응원이 관중석 사이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남궁일몽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 그의 주먹이 공간을 가른다.

쿠우웅!

분명히 정현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의 주먹이 비무장 바닥을 때렸다. 어찌나 강렬한 일격이었는지 비무장의 바닥이 갈라져 있었다.

“무, 무슨 힘이!”

“주먹에 내공을 담으면 바위조차 부술 수 있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군!”

정현을 응원한 사람들이 남궁일몽의 신위에 깜짝 놀란다.

정현 또한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본다.

남궁일몽은 그를 배려하듯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모두가 남궁일몽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겼다. 더는 반전이 없으리라. 나 또한 정현이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정현은 포권 지례를 하며 패배를 선언하는 대신.

손바닥을 활짝 펼친 상태로 자세를 잡으며 크게 소리친다.

“빈승의 모든 걸 이 손바닥에 담겠습니다.”

“좋지요.”

정현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저건 신교의 무공서에서도 본 적이 있는 무공이다. 소림사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대성하면 바위뿐 아니라 강철까지 끊어버린다는 소림의 절기.

“하아압!”

정현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돌격한다.

그의 손바닥의 주위로 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저렇게 사용하는 무공은 아닌데.’

원래 저런 절기는 예고하면 안 된다. 상대가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육체를 타격해야 한다. 결국, 손바닥에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으니 맞부딪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하지만 이것이 비무였기 때문에 남궁일몽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정현의 의지에 답하듯 마주 달려가 주먹을 내질렀다.

정현의 대력금강장과 남궁일몽의 주먹이 충돌한다.

우우우우-!

거대한 기가 충돌하는 소리. 비무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귀를 막는다. 정현은 저것을 사용하기 위해 남은 내력을 모두 쏟아낸 듯하다. 이제까지 여유로웠던 남궁일몽 또한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역시나 반전은 없었다.

정현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두 손을 떨구었다. 다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봐선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의지 하나만으로 버텨내고 있는 듯했다.

“쿨럭···! 빈승이··· 패배했습니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 패배를 시인한 정현.

남궁일몽도 진중한 얼굴로 포권 지례를 하며 그의 패배를 받아들인다.

“우아아아!”

“둘 다 멋지다!”

두 사내의 화끈한 비무에 관중들이 열광한다.

대부분 남궁일몽이 검이 아닌 주먹을 사용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뭐 귀빈석에 앉아 있는 무림의 관계자들은 썩 표정이 좋진 않았지만, 관중들에겐 최고의 비무였으리라.

하지만 난 왠지 남궁일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한 느낌.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심한 중증을 앓고 있는 듯했다.

‘남궁일몽은···.’

한번 꺾일 때가 된 것 같았다.

유성일락

남궁일몽.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아이. 남궁세가의 형제자매들이 기(氣)를 느끼려 애를 쓰고 있을 때, 이미 단전에 내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첫째 형이 고혼일검(孤魂一劍)의 1초식을 익히고 있을 때, 이미 아버지가 시범으로 펼쳐 보였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帝王劍形)의 초식을 외워버렸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그게 당연하지 않았다.

그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많았다.

잠룡, 천재 그리고 괴물.

남다름은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시기와 질투는 기본이었고, 경외의 시선 또한 어린 나이의 남궁일몽에겐 불편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남궁일몽은 자신의 재능을 숨기기보다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일까? 타인의 시기와 질투의 시선은 줄어들었고, 경외의 시선이 늘어갔다. 그때 남궁일몽은 깨달았다.

관심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경외의 시선은 그런대로 즐길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그가 천룡각에 들어간다.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또래의 아이들. 극소수의 이들은 남궁일몽에게 처음으로 긴장감을 선사했다. 화산파와 소림사 이름만 들어도 웅장함을 느끼게 하는 문파의 제자들.

남궁일몽은 상당히 기대했다.

그들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이들일까? 그 기대감에 밤잠을 설쳤던 적도 있었다.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무연하와 첫 비무를 했던 날. 남궁일몽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고작 이 정도로 천재라고 불렸다고?’

무연하가 천재라면 자신은 뭔가?

정말 괴물인가?

그 후로도 남궁일몽은 자신과 격이 비슷한 친우를 찾았지만, 천룡각에선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루함을 느끼진 않았다.

자신의 재능이 하늘이 내려준 거라면, 그걸 잘 써먹으며 즐겨보자고 생각했다.

본가에서 생활할 때보다 천룡각에선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인다. 주제도 모르고 배경만 믿고 나대는 소인배들. 자신의 무재를 과대평가하는 멍청이들. 그런 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주고, 개안하게 하는 것이 하늘이 내려준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천룡각에서 10년의 세월을 즐겼다.

이전까지 용봉지회에 나가보라는 아버지의 서신을 여러 번 받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천룡각의 생활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생활도 끝이다.

그가 용봉지회에 나온 이유는.

같은 나이 또래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닌, 이미 무림을 이끄는 기성 무인들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육왕이나 각 지역의 패자라 불리는 고수들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의 재능이라면 금방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용봉지회는 그가 강호에 첫발을 내딛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도 결승은 조금 기대가 되는군.’

단목장룡.

그는 어느 정도의 재미를 선사해 줄 것인가?

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남궁일몽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었으니까. 이미 육왕 중 일인인 남궁세가의 가주 또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나이가 사십이 된다면 천하를 호령할 고수가 될 것이라고. 남궁일몽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쉽게 무너지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남궁일몽이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용봉지회의 결승이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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