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36)

* * *

“장룡!”

“어, 옥정아.”

“요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옥정의 눈엔 그게 보이나 보다. 혼자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마주하며,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사실 미래는 캄캄한 칠흑과 같았지만, 당옥정이 옆에 다가오면 미약한 분홍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냐.”

“으음, 혹시 무 소협과의 비무가 걱정되어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첫 비무 날이다.

이새붕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으니 무연하는 칼을 갈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한다. 당연히 그의 목표는 내가 아니리라. 이새붕은 은근히 사교성이 좋아 장원 내의 손님들과 대화하여 알아낸 정보를 내게 들려주곤 했다. 아직 여인에게 약한 것은 별 차이가 없긴 했지만.

“뭐 조금?”

사실 그와의 비무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와, 장룡이 긴장할 때가 다 있구나. 헤헤!”

당옥정이 기분이 좋다는 듯이 웃는다.

“왜 그렇게 웃어?”

그 말에 당옥정 찔끔하며 시선을 내리깐다.

“아··· 미안해. 긴장했다고 했는데 내가 웃으면 안 되지···. 못 보던 네 모습을 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어. 미안해···.”

그런 그녀의 말을 들으니 거짓말을 하는 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녀에겐 모든 걸 말할 수 없었다. 믿는 것은 둘째거니와 내가 사실은 단목세가의 둘째가 아니라 천마신교 교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겠는가?

“아냐. 네가 웃는 걸 보니 긴장이 풀리는 것 같네.”

이건 거짓이 아니다.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그래. 이제 슬슬 나가자. 가서 준비해야겠네.”

“응, 그러자!”

그렇게 난 당옥정과 함께 비무장으로 향했다.

* * *

비무장 옆에 만들어진 대기실.

그곳에서 무연하가 화산파의 장문인 군명과 마주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단목 가의 아이는 예선에서 꽤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더구나.”

“예, 남궁 소협도 자신을 만나기 전에 단목 소협을 꺾고 올라오라더군요.”

장문인 군명이 눈을 빛낸다.

화산파가 개최한 비무 대회에서 화산의 대제자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치욕이다. 개회식에선 정의로운 협의를 주제로 연설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화산의 명예였다. 오랜 역사의 용봉지회. 화산파가 개최한 용봉지회에서 화산의 제자가 우승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군명도 남궁일몽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간 별호에 왕(王)이 아닌 제(帝)가 붙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연하가 이겨야 한다. 무연하가 3년 동안 폐관하는 동안 장문인도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알력 싸움. 더 좁게는 구파일방 사이에서의 입지도 중요했다.

무연하에게 환(幻)의 심득을 전수한 환왕.

비무장에서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

“남궁일몽은 자신의 천재성을 과신하여 무(武)에 성실하지 못하였다. 천재도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하물며 넌 나를 이을 재능을 가졌음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군명의 말에 무연하가 결의를 다진다.

“예, 장문인.”

“그때 보여주거라. 남궁가의 재능보다 화산의 정기를 이어받는 네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이다.”

“예, 다시 한번 매화가 강호를 물들이게 하겠습니다.”

당당한 무연하의 말에 장문인이 미소짓는다.

“좋다. 허나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오늘은 첫 비무일 뿐이니. 다치지 않는 것에 집중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단목장룡을 단지 거쳐 가는 관문에 불과하다 여기고 있었다.

단목장룡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 * *

화음현은 하루하루가 시끌벅적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 중소 문파 출신의 반란. 무림오화의 미모. 용봉지회를 관전하러 온 무림의 고수들. 화젯거리가 될 것이 모이니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오늘 비무장에선 무림오룡 중 하나인 무연하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흥분이 군중 사이에 퍼져 있었다.

단목장룡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사실 무연하보다 관심이 적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따금 언가의 소가주가 단목장룡에게 압도적으로 패했다며, 무연하의 패배를 예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연하의 승리를 점쳤다.

비무장에 무연하가 당당하게 들어서자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진다.

그에 반해 단목장룡의 등장에는 일부만 크게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두 사람이 비무장에 마주하여 포권 지례로 예를 표한다.

검을 뽑으니 관중들의 함성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귀가 먹먹해지는 울림. 단목장룡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나쁘지 않네.’

무연하의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칭찬할 만한 수준이다. 화산파의 대제자라는 명성이 헛되지는 않은 듯하다.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무연하가 단목장룡을 배려하듯 말한다.

“후회하실 텐데.”

“후회하지 않습니다.”

단목장룡이 뇌왕검을 든다. 그의 검에선 이미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검기(劍氣). 본선이니만큼 제대로 임하려는 것이다. 선공을 양보해준다는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갑니다.”

파밧!

단목장룡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진다.

유성환상검. 쾌로서 환을 만들어내는 검법. 그의 육신은 충분한 쾌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의 내력은 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무연하는 단목장룡을 얕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 검을 들었다.

카앙!

무연하가 뒤로 밀려난다. 빠른 속도엔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까앙! 캉!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무연하는 단목장룡의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대체 이 무슨···!’

전방을 덮쳐오는 단목장룡의 검은 찰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왼편으로 왔던 검을 막아내면, 위에서 검이 내려찍는다. 그것을 받아내면 하단에서 검이 솟아올랐다. 더 문제인 건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흡!”

카앙!이미 선공은 양보했으니 무연하가 반격하려 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했던가? 공격으로 기세를 다시 빼앗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무연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보통 속도라는 건 가속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공에서는 좀 다르다. 가속이 붙으면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오히려 체력을 소모하여 도리어 속도가 느려지곤 한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단목장룡의 검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보다 무서운 점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 뭣 하고 있느냐!

장문인의 호통 섞인 전음에 무연하가 정신을 차린다.

그의 검은 마치 폭풍처럼 몰아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는 고작 본선 첫 비무에서 탈락하려고 3년 동안의 폐관을 견딘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막기만 하다가 패배한다···.’

무연하는 단목장룡을 잘못 판단했다는 걸 인정했다.

남궁일몽이 왜 그를 먼저 꺾으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림오룡도 아닌, 오대세가의 자제도 아닌 단목장룡.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는 강하다. 모든 것을 펼쳐내야만 상대할 수 있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무연하는 결심했다.

동시에 바로 실행에 옮긴다.

“저건!”

“뭐야! 어떻게 붉은 연기가?”

“만화천검이다!”

붉은 연기.

그것은 현 장문인 군명의 절기인 만화천검(萬花天劍)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였다. 본래 막대한 내력으로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적들에겐 지옥과도 환상을 선사한다고 알려진 검법. 아직 무연하의 실력이 모자라 그 규모가 작긴 했지만, 절대 만만히 볼 검법은 아니었다.

쉬익!

무연하의 검과 단목장룡의 검이 부딪친다. 처음으로 단목장룡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됐다···!’

이대로 기세를 뺏었다고 생각한 무연하가 내력을 아끼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만화천검은 매화향을 전 방위에 흩뿌려야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남궁일몽에게 사용하려 했던 절기지만, 여기서 힘을 아낀다면 단목장룡에게 패배할 수도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검기에 향이 담긴 것은 처음 볼 것이다···!’

이대로 틈을 주면 안 된다.

무연하는 만화천검을 토대로, 매화검법을 펼쳐낸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마치 미묘하게 꽃과 닮은 형상의 연기가 공간에 흩뿌려진다. 정확히 말하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간에 연기가 흩어진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본 관중들은 탄성을 내지른다.

“대, 대단하구나!”

“매화다! 매화!”

초반 막무가내로 밀려났던 무연하의 모습에 불안했던 장문인도 슬슬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단목장룡은 아마 저 오묘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벌써 이것을 선보인 것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저 수가 아니었다면 단목장룡의 쾌검에 미처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군명의 표정이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단목운뢰. 좋은 손주를 두었군.’

그런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일 각이 지난 후였다.

분명히 무연하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단목장룡은 변변찮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경에 경지에 접어든 군명의 감각엔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졌다.

‘어찌하여···?’

만화천검의 기운은 상대의 내부를 잠식한다.

마치 독(毒)처럼.

그런데 단목장룡의 움직임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크읏···!”

오히려 맹공을 퍼붓던 무연하의 공격이 무뎌져 있었다.

아직 군중들은 무연하가 유리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단목장룡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이제 때가 됐음을 깨달았다.

‘괜찮은 무공이었어.’

유성환상검과 다르게 내력을 제어한다. 그의 공격을 방어하며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몸소 느꼈다. 그 무공의 구결을 알진 못하지만···.

‘잘 연구하면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듯하군.’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단목장룡의 극한의 천재성이 빛을 발했다. 그는 대충 어떤 식으로 연기를 활용하는지 이해했다.

스으으···!

단목장룡의 검에 조금 더 진한 푸른 빛의 검기가 맺혔다. 사실 이 자리에서 만화천검의 묘리를 따라 해보고 싶었지만, 수많은 시선이 있는 비무장 위에선 미련한 행동이다.

그리고 굳이 그걸 따라 해보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는.

‘유성환상검이···.’

이젠 단목세가의 검법과는 전혀 다른.

사파, 정파, 마교를 막론하고 최상급 무공들의 심득을 조합하여 만든 유성환상검. 쾌로서 환상을 구현한다는 검법.

‘···세 수는 위다.’

쯔으으···!

단목장룡의 검이 기묘한 비틀림을 만들어내며 공간을 가른다.

그걸 마주한 무연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게 무슨!”

화산파의 장문인 군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장원에 찾아온 의외의 손님

단목장룡의 검 끝은 무연하의 가슴에서 딱 반 치 정도 떨어져 있었다.

화산파의 대제자이자 이번 용봉지회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무연하. 그는 단목장룡의 마지막 일격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단목장룡이 검을 찔러오는 것까진 느낄 수 있었지만···.

‘검이 휘어진 것 같았어?’

유성환상검에 담긴 환검의 묘리.

무연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단목장룡이 마지막 순간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 제대로 본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눈을 깜빡하자 단목장룡은 지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기묘한 침묵.

모두가 이 난데없는 상황에 침을 삼키는 가운데.

한 사내가 소리쳤다.

“단목장룡이 이겼다···!”

그 순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이 부서진다.

“우아아아아-!”

“정말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단목세가 최고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 화산파의 장문인 해일처럼 퍼져나가는 그 소란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화산파의 자존심이 패배했다. 오대세가도 아닌 단목세가의 둘째 아들에게. 결승전도 아닌 32강에서.

장문인이 충격을 받은 것은 대제자의 패배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천검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환왕 군명.

육왕 중 하나인 그의 절기가 깨졌다. 무연하의 수준이 낮다고 하지만, 단목장룡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자하신공의 기운을 어찌 뿌리칠 수 있었을까? 비무 중에 만화천검의 파훼식을 깨달을 리는 없었다. 그것은 다른 육왕들도 불가능하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단목장룡이 연하보다 몇 수는 위구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분노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에게 무연하가 패배했다. 적어도 소림사의 정현에게 패배했다면, 남궁일몽에게 패배했다면··· 이토록 허탈하진 않으리라. 오히려 분노를 느꼈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대 화산파를 이끄는 장문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강호 무림에서 살아가며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화산파에 큰 위협이 될 상황도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장문인은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단목장룡이 우승해야 한다. 남궁가의 아이를 꺾고.’

만약 그의 생각대로 된다면, 오대세가든 구파일방이든 32강에서 패배한 무연하에게 뭐라 하진 못하리라.

그렇게 장문인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역시 나와 비슷한 사내군.’

남궁일몽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고.

‘대체···? 저게 장룡이 맞긴 한 건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단목장룡의 형 단목청야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중들에 섞인 한 거한이 보인다.

그는 죽립을 푹 눌러쓰고, 펑퍼짐한 장삼을 걸쳤지만, 은근히 드러난 살에는 온갖 흉터가 가득했다. 특히 두 손에 있는 흉터는 징그러울 정도였다.

‘저놈, 물건이네.’

거한의 시선이 단목장룡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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