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36)

* * *

난 당연히 용봉지회의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언승지에게 들어보니 장원 내에서 나를 주제로 한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새로운 무림오룡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 예선에서 어떤 상대든 1초식에 이겼다는 화제성. 그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세 명의 무림오화를 대동했으니···.

‘모용란과 양주아와는 거리를 좀 둬야겠어.’

요즘 두 여인이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출신 배경이 좋으니 연을 맺어놓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굳이 가까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더군다나 당옥정과는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세 여인이 기 싸움을 하는 걸 옆에서 관음하는 취향 따위는 없었다. 또 당옥정이 두 여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이유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장원에서 주최하는 잔치에 참석하는 날이었지만, 허리에 검을 찬다. 무인은 항시 검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과거에 기루에 매일 들락거릴 땐, 병기를 소지하지 않았었다.

스스로 무인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자 녹색의 무복이 아닌 분홍빛의 평상복을 차려입은 당옥정이 보인다. 그녀는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게 즐거운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룡!”

“어, 옥정아. 오늘은 예쁜 옷을 입었네.”

내 말에 그녀의 미소가 더욱 환해진다.

“잘 어울려?”

“잘 어울리네.”

당옥정과 함께 장원의 중심부로 향한다. 그곳에는 이미 장원에 머무는 손님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언철진은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위함인지, 술을 먹기 위함인지 모를 정도로 매일 거하게 잔치를 벌였다.

언승지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너무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이곳에서 여러 인연을 만들어 보았자 그 자신이 성장하지 않으면, 훗날 남아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뭐 언가라는 배경이 있으니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테지만.

‘언철진이 가주가 된다면 언가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진 않는군.’

장원을 관리하는 걸 보면 언승지가 훨씬 더 나아 보였지만, 정파의 명문가에서 여인이 가주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목 공자가 오셨다!”

“당 소저도 같이 있군!”

후기지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의 출신을 들어보면 각자의 지역에선 꽤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언철진이 고르고 골라 받은 손님다웠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모용란과 양주아 그리고 팽염호가 함께 오는 것이 보인다.

“장룡! 당옥정!”

“팽염호! 얼굴 보기 정말 힘드네?”

“하하하! 수련에 집중하느라 말이야! 친우가 저리 노력하는데 놀고 있어서만 되겠는가?”

“너, 방금까지 수련하다 왔지? 땀 냄새나.”

“사내의 땀 냄새는 여인을 유혹한다고 하더군! 정말 그런가?”

“무슨 헛소리야!”

당옥정이 팽염호를 밀치고 내 뒤에 숨는다.

그 모습을 보고 팽염호가 호탕하게 웃어 젖힌다.

“하하하하! 장룡! 예선도 끝났으니 오늘은 마음껏 술을 마셔도 되겠는가?”

“그러려고 참석한 거지.”

“좋네! 오늘은 제대로 자웅을 겨뤄보자고!”

“저희도 동석해도 될까요?”

모용란이 말했다.

난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려 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나보다 먼저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언니와 술을 마셔보는 건 처음이네요. 술은 잘 마시세요?”

당옥정의 말에 모용란이 피식 웃는다.

“언니는 한 번도 술에 취해본 적이 없단다.”

왜인지 당옥정은 평소 모용란을 대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과거엔 그녀가 다가오면 은근히 싫은 기색을 드러냈는데, 이젠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으음.’

뭐 당옥정이 저리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마 용봉지회가 끝날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하루 정도야 뭐.

“이리로 와라!”

언철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우리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놓은 듯했다. 상 위에는 온갖 종류의 요리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걸 본 팽염호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한다.

“형님, 차려진 음식을 보니 술이 쭉쭉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래, 오늘은 마음껏 먹게. 이제 곧 용봉지회의 본선이 시작되면 먹고 싶어도 먹기 힘들 터이니.”

“예, 형님!”

그렇게 언철진의 주위로 둘러앉는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오른쪽엔 당옥정이 그리고 왼쪽엔 모용란이 앉았다. 양주아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다가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외모가 출중한 세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더 부담스러운 건···.

모용란은 내 그릇에 삶은 돼지고기와 튀긴 채소를 올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드셔보세요. 제가 먹어봤는데 맛이 일품이더라고요.”

그러자 당옥정도 내게 음식을 올려준다.

“장룡! 네가 좋아하는 어향육사야!”

마지막으로 양주아가 슬그머니 술잔을 채워주었다.

“크하하하하! 내 친우가 여인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구나!”

팽염호는 즐겁다는 듯이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사내인지라 여인들의 이런 행동의 의미를 모르진 않는다.

다만··· 굳이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만, 조금 부담스럽군요.”

내 말에 모용란이 사과한다.

“죄송해요. 단목 공자님이 이걸 드셔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그만···.”

“나도 미안···.”

뭔가 풀이 죽은 듯한 당옥정의 사과도 이어진다.

가끔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난 그녀의 기분을 바로 풀어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젓가락을 들어 당옥정이 올려준 어향육사를 입에 가져간다.

“어향육사가 맛있네.”

그러자 당옥정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난 모든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겐 모용란보다 당옥정이 더 소중한 존재였다. 사천당문에서 받은 배려도 있겠지만, 그녀와 같이 수련하며 정이 쌓였다.

모용란이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언철진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크흐으으음! 자, 오늘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 정말 반갑군! 내 동생은 내일 예선 마지막 비무가 있기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모두 즐겁게 즐기게! 그리고 본 장원의 규칙대로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선 아니 되네!”

“예! 언 소협! 당연하지요!”

“술을 내공으로 이겨내면 진정한 무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에 가장 크게 동감하는 것은 다름 아닌 팽염호였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모두 즐기게나!”

그렇게 술자리가 시작됐다.

“자자, 장룡! 내 술을 받게!”

“고맙군.”

팽염호의 술을 받아 마시니.

“저도 공자님께 한잔 따라드려도 될까요?”

모용란이 슬그머니 술병을 들었고.

“나도!”

“저도···.”

당옥정과 양주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쉴새 없이 술을 마신다.

사실 그래도 취기가 잘 오르지 않았다. 만독대법을 통해 독에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마시니 꽤 기분이 좋았다.

“크흠···!”

언철진이 헛기침을 하며 양주아의 옆에 바짝 붙는다. 그러자 양주아가 슬쩍 거리를 벌렸고, 어느샌가 언철진이 내 정면에 앉아 있었다.

“단목 소협! 술을 잘 마시는가 보오?”

“조금 즐기긴 합니다.”

그러자 언철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한다.

“그럼 나와 대작하지 않겠소? 장원 내에 나와 대작할 사람이 없어 참으로 심심했다오! 단목 소협 정도면 내 수준에 맞을 듯하군! 어떻소? 설마 무서워서 내빼는 건 아니겠지?”

언철진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잔치의 결말

언철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장원이 북적북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하루에도 많은 후기지수가 장원에 묵고 싶다며 찾아왔다. 대충 자신과 급이 맞다고 생각되면 받아주고, 아니면 돌려보낸다. 그 과정에서 흔들렸던 자존감이 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장원 내에서는 모였다 하면 단목장룡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예선이 시작되었을 때, 단목장룡이 1초식만에 상대를 제압했다는 소리를 듣곤, 열심히 무공 수련을 했겠거니 생각했지만··· 장원의 주인인 자신보다 더 주목받는 것 같은 느낌에 불편함이 쌓여갔다.

‘대체 그놈이 뭐라고?’

그는 언승지와 단목장룡의 혼사가 깨진 후 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단목장룡은 철부지 도련님일 뿐이었다. 매일 기루에 들락거리는 망나니. 그런 동생을 자신의 친동생인 언승지와 혼인시키려 했다는 단목청야에게 분노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을 속인 단목청야와 망나니 도련님인 단목장룡이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모두 속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저렇게 주목받을 인재가 아니다. 예선을 모두 1초식 내로 승리했다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잘 만난다면 그건 문제가 안 된다.

더군다나 최근 모용란이 그를 찾아와 단목장룡에 물은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당연히 언철진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언승지와의 혼사. 그리고 그것이 일방적으로 깨졌던 이유. 단목장룡이 가문의 어른들이 모인 곳에서 어떤 헛소리를 했었는지.

언철진은 모용란이 단목장룡의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둘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단목장룡의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옆이 아니라. 그것이 불공평했다. 언철진이 생각하기에 그보다 부족한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에게 실체를 까발려줘야겠어. 모두가 속고 있는 거야.’

돼지였던 단목장룡을 기억한다.

분명히 지금은 살을 빼고 평범한 무인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모두 가식이 분명하다.

그래서 단목장룡을 취하게 하려 했다.

사람은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지 않는가? 아마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언가의 사내들은 대부분 주량이 강하다. 절대 패배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 쭉쭉 들이키시오!”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니에요?”

모용란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지만, 단목장룡은 딱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물처럼 술을 입에 쏟아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팽염호와 언철진도 쉬지 않고 잔을 비운다. 당옥정은 단목장룡이 술에 내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대작을 지켜보았다. 장룡이 즐거우면 그녀도 즐겁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면 되는 것이다.

“하하! 모용 누님 사내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 아니겠습니까? 누구 하나는 오늘 바닥에 대자로 뻗을 것 같군요!”

팽염호가 신이 나서 술을 마셔댄다.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도 모두 이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아무리 단목장룡이 최근 화제의 중심이었다지만, 대부분 이번 대결에서 언철진이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그가 이때까지의 술자리에서 보여줬던 주량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그렇게 술병이 계속 늘어간다.

언철진은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이놈··· 대체 얼마나 주량이 강한 거냐···.’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팽염호도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는데, 오로지 단목장룡만이 태연하게 처음 속도 그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이미 잔잔해져 있었다. 모두 세 사람의 술 대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술로 싸운다는 건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다들 혈기가 왕성한 후기지수들이다 보니 이런 사소한 기 싸움에 흥미를 느낀다. 단목장룡은 누군갈 이겨 먹으려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취기가 오르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오랜만이군. 이 감각.’

피식.

단목장룡이 다시금 술을 비운다. 묵묵하게 대화 없이 술을 마시는 모습에 당옥정이 작게 입을 벌리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사실 그녀는 사내의 외모 따위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 위지세가의 소가주인 위지풍에게 이미 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의 눈에는 우수에 찬 눈으로 술을 마시는 단목장룡이 위지풍보다 훨씬 잘생겨 보였다.

‘고모님의 말씀이 맞아. 난 정말 장룡을···.’

두근두근.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술을 마시던 단목장룡이 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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