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용봉지회의 예선이 시작되었다.
사실 본선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리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자들이라도 모두 수준이 높은 건 아니었다. 그 이유로는 단순히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무림인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목, 화, 토, 금, 수.
오행(五行)으로 나뉜 조에서 평균적으로 7번 승리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난 화에 속하여 이제까지 총 3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실력은 천차만별. 무공의 기본도 모르는 삼류가 상대인 적도 있었으며, 내가 상대가 아니었다면 본선에 진출할 수도 있었을 법한 무인도 있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승리를 양보해주고자 이곳에 참가한 게 아니다. 모든 경쟁자를 치워버리고 후기지수의 정점에 서고자 용봉지회에 참가한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후기지수.
말 그대로 그들은 아직 후기지수일 뿐이다. 내가 부수고자 하는 존재는 어중간한 중소 문파가 아니다. 중원 전체를 삼등분하는 거대한 세력 중 하나인 천마신교. 정파인들이 마교라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하기보다 더 열심히 위로 올라가서 우승한다면, 내게 패배했던 이들이 더 만족할 것이다. 우승자에게 예선전에서 패배했다는 건 그리 부끄러워할 일이 아닐 테니까. 누군가를 이겨 올라가는 만큼 그 정도 각오는 다져야 했다.
오늘은 4번째 비무를 치르는 날.
남녀를 합쳐 60명 정도를 선발해야 하기에 기한이 빡빡했다. 어떤 이들은 전의 비무에서 다쳤는지 쩔뚝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화의 34번.
그것이 내게 부여된 번호였다. 비무를 관리 감독하는 화산파의 무인이 내 번호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금방 일곱 번째 비무장에 도착한다.
“화 34번! 목 74번! 일곱 번째 비무장!”
적당히 경계를 구분해놓은 형태로 만들어놓은 비무장. 그곳에 들어가니 이미 상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거 정말 운이 안 좋군요. 소문의 단목 소협을 만나다니···.”
소문의 단목 소협?
“전 진가장의 진유곡이라 합니다.”
“단목장룡입니다. 절 아십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언가의 장원에 머물고 있으신 데다가··· 예선에서 모든 상대를 1초식만에 꺾으셨으니까요. 뭐 용봉지회에 여인이나 낚아보려고 온 뜨내기들은 관심도 없을 테지만, 저희 같은 이들에겐 단목 소협이 화제의 중심입니다.”
그런가.
솔직히 상대의 기를 살려주고자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승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난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것이 더 독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뜻하지 않게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는 듯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는 패배를 떠올리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 상대인 만큼 나 또한 최선을 다한다. 저렇게 말했다고 봐줄 수는 없었으니.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나와 진유곡이 검을 뽑아 비무장의 중앙에서 격돌했다.
결과는?
이번에도 1초식을 모두 펼치기 전에 승리했다.
“하하하···. 제, 제가 졌습니다. 실제로 마주하니 거대한 산과 마주하는 기분이더군요. 가주님과 비무할 때도 이런 압박감은 느껴보지 못했는데···.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패배했지만, 포권 지례로 예를 표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한 번 더 싸우자니 비무가 아닌 실전으로 붙으면 달라질 것이라니 헛소리를 지껄일 때도 있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우승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 경쾌하게 인사를 하고 비무장을 떠난다.
이제 3번만 더 이기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확실히 진유곡부터는 이제까지 싸워온 이들보다 실력이 확 늘었다는 게 보였다. 경쟁자들에게 승리하며, 예선을 뚫고 올라왔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저곳엔 왜 저리 사람이 많이 몰려있지?’
내 비무를 관전하는 사람도 꽤 있었지만, 저기는 규모 자체가 다르다.
1번 비무장. 대체 누가 비무를 하고 있기에?
호기심이 생겨 그곳으로 다가간다.
청력을 끌어올려 그곳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워낙 사람이 몰려 육안으로는 전혀 볼 수 없어서, 소리로 알아내려는 것이다.
“자네는 쾌검보다 패검이 더 어울리는 듯하군.”
“패검 말씀입니까?”
“그래, 패검을 수련한다면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을 걸세. 다른 무공을 익히란 소리는 하지 못하겠지만, 검을 가볍게 생각하기보단 무겁게 여기게.”
“남궁 공자님, 감사합니다!”
“저, 저는 어땠습니까? 제 문제점은···.”
“자네는 하체가 너무 부실해. 보통 힘은 상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잘못 생각하는 거지.”
“역시 그랬군요···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 같더라니···! 조언 감사합니다!”
“아닐세. 내 조언보다는 자네의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앞으로 더 정진하게.”
“옙! 남궁 공자님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게 성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응?
비무장에서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거기다가 남궁···?
‘설마 그 무림오룡 중 하나인 남궁일몽인가?’
비무가 막 끝난 이들에게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역대급 천재라는 말이 있듯 용봉지회에 참가한 이들은 그의 조언을 천지신명의 계시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게으른 천재라 하여 과거의 나와 비슷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군.’
오히려 성격이 다르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뽐내기 좋아하는 인물인 듯하다.
‘으음, 가까이서 보면 남궁일몽의 안목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인파 사이로 파고들려고 할 때였다.
예민해진 오감이 번뜩인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려 하는 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보법을 밟아 상대의 뒤를 점한다.
“꺄읏?”
긴 생머리에 녹색 무복을 갖춰 입은 여인.
그녀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돌린다.
그 여인은···.
“옥정아?”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되려 내가 놀라버렸네.”
해맑은 미소. 사실 성도에서 가장 정이 든 사람을 말하라면 단연 당옥정이다. 처음 성도를 떠나올 땐, 그걸 체감하지 못했지만, 가끔 그녀의 미소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리고 상상 속이 아닌 실제로 그녀를 보니···.
왜인지 마음이 따스해진다.
“화음현에 도착하자마자 언가의 장원으로 갔는데, 네 비무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달려왔어!”
“잘했어.”
잘했다는 말에 당옥정이 배시시 웃는다.
그런데 그 느낌이.
‘그건 그렇고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이네. 무공의 경지가 올라서 그런 걸까?’
뭐 아무래도 좋았다.
남궁일몽은 언젠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걸 구경하는 것보다는, 당옥정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중요했다.
“가자. 밥은 먹었어?”
“아니! 너랑 먹으려고 어제부터 쫄쫄 굶었어!”
나 잘했지? 라는 듯 바라보는 당옥정.
조금 어이가 없었다.
“···.”
내 눈빛에 찔끔한 당옥정이 사실을 실토한다.
“···사실 저녁은 먹었어.”
“그래, 수련하려면 매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지. 가자, 들어보니 화음현의 반점들이 다 실력이 좋다더라.”
“응!”
자극하다
당옥정과 함께 반점에 들려 식사한다.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녀가 흠칫한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음식을 마저 씹은 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내게 시선을 던지고 묻는다.
“왜 그렇게 봐?”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
“흡···.”
당옥정이 입을 꾹 다물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랄까. 그녀가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시선을 거둔다. 왠지 모르게 당옥정이 젓가락을 놀리는 속도가 더 빨라진 듯하다.
“이제 뇌전을 다룰 수 있게 됐어?”
뇌공검법 3성에 이르면 검에 뇌전을 담을 수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검기라 할 수 있지만, 뇌의 속성이었기에 훨씬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 경지에 올랐으면, 용봉지회 본선에서도 높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응! 3성의 경지에 올랐어! 모두 장룡 네 덕분이야. 고모님께서도 정말 놀라시더라고 예상보다 훨씬 빨리 3성에 도달했다고 말이야.”
“넌 재능이 나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다고 봐야지.”
“정말?”
“그래.”
솔직히 처음엔 당옥정의 재능을 과소평가했었다. 뇌공검법의 그 오묘한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하기 전에 사천당문의 무공을 익히던 그녀가 뇌기를 담는 무공과 맞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직접 무공을 가르쳐보니 당옥정과 뇌왕의 뇌공검법은 궁합이 잘 맞았다.
어느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는 지금 단언할 수 없었지만, 충분한 노력과 깨달음이 있다면···.
‘절정을 넘어서 초절정까진 도달하지 않을까?’
얼른 당옥정이 강해졌으면 한다.
이 험한 무림에서 당옥정처럼 순진한 여인이 위험하지 않을 방법은 본신의 무력을 키우는 법뿐이다. 사천당문의 후광이 모든 위협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백독이흉에게 납치당했던 때처럼.
물론, 이제는 당문의 만독대법을 통해 많은 종류의 독에 내성이 생겼으니 그런 저열한 수단에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천당문에서 수련하며 항시 주의를 기울이라 당옥정에게 조언했다.
나와 그녀는 사제지간은 아니었지만, 당옥정은 내 조언이라면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는 편이었다. 가르치는 맛이 있었달까.
“더 열심히 해야겠어! 더 강해질 거야!”
“얼마나 더 강해지고 싶은데?”
“그야 당연히···.”
그녀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말을 잇는다.
“···너보다 더.”
“나보다?”
“응···!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
그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나는 당옥정이 성장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젠간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런 표정의 당옥정에게 차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더없이 환해진다.
“응!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는 그렇게 식사하며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모용란과 양주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두 사람이랑 친해졌어···?”
그녀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애초에 장원에선 수련만 하느라 두 여인과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딱히. 연무장에서 수련만 했거든.”
끄덕끄덕!
“맞아! 용봉지회가 코앞인데 열심히 수련하는 게 좋은 거야.”
“넌 화산파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묵을 거야?”
도리도리.
“너랑 같이 수련하고 싶어. 성도에 있을 때처럼. 그래도 돼? 방해는 하지 않을게.”
당옥정과 수련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녀의 무공을 봐주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생각할 게 많았다. 내 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공을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것. 누군가를 가르치며 나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방해는 무슨. 그럼 다 먹고 바로 장원으로 가자.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대로 봐줄게.”
꿀꺽.
당옥정이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너무 제대로 보진 마···.”
“열심히 안 했어?”
“그, 그건 아니고··· 이제 막 도착해서 피로한 것도 있고···.”
“알겠어.”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언가의 장원으로 향한다. 처음 왔을 때보다 손님이 확 늘어나 시끌벅적하다. 특히 저녁마다 장원의 중앙에선 술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지금도 그런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언철진은 후기지수 사이에서 왕처럼 앉아 있었다.
굳이 저 자리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당옥정은 언철진에게 방을 받지 못했다. 나와 당옥정이 언철진에게로 향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당연하게도 나보다는 당옥정이 더 주목받았다.
“저 소저는 혹시···?”
“사천당문의 당옥정 소저야!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군.”
“그 옆에 있는 사내는?”
“단목장룡 소협인 듯하군. 요즈음 예선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모양이던데···.”
언철진은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당옥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미 술을 꽤 먹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낼 수 있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오, 소저는···?”
“안녕하세요. 사천당문의 당옥정이라 해요.”
“반갑소! 난 진주언가의 언철진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용봉지회 기간 동안 이 장원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언가는 손님을 가려서 받지 않는다오! 주환아! 당 소저께 방을 안내해드리거라!”
웅성웅성.
언가의 장원에는 벌써 두 명의 무림오화가 묵고 있었다. 젊은 사내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동시에 언철진의 어깨도 높이 치솟는다. 어떤 손님이 묵느냐에 따라 주인의 평가가 달라진다.
“잠깐!”
당옥정과 함께 가려는데 언철진이 나를 부른다.
“단목 소협, 장원에 묵으면서 한 번도 술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는데··· 섭섭하게 그럴 거요?”
날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뭐가 섭섭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의 입장에선 내가 예의가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한 번은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수련이 바빠서 말입니다. 예선이 끝나면 여유가 있으니 그때 참석하겠습니다.”
언철진은 내 대답에 그리 만족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약조한 거요?”
“예.”
언철진에게 인사한 후 당옥정과 함께 자리를 떠난다.
뒤편에서 수많은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