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36)

* * *

언철진.

그는 본래 이런 사내가 아니었다. 호탕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물론, 가끔 화를 내는 일도 있었지만 여유가 있을 땐 웬만한 일에는 잘 화를 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요즈음 그는 변화했다.

천룡각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시선.

진주언가의 소가주라는 부담감이 그의 목을 점차 죄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영악한 단목청야의 계책이라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치민다.

그렇지만 화가 나더라도 해야할 일은 해야 한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그는 새로운 인맥을 만들 생각이었다. 단목청야의 파벌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무림에는 한 세력만 있는 게 아니다. 보란 듯이 장원에 영웅호걸을 모아놓으면 단목청야도 그를 달리볼 것이다.

“후우···!”

단목장룡이 장원에 머문지도 나흘이 지난 지금.

언철진은 화음현의 중심부를 걸으며 장원에 묵을 손님을 직접 찾고 있었다.

몇몇 이들에게 미리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더군다나 자신과 급이 맞는 자들을 찾으려면 직접 움직여야 한다. 언승지에게 맡겼다간 정에 휘둘려 단목장룡 같이 수준 낮은 이들만 끌고올 것이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인물이 없군! 죄다 비실비실한 놈들 뿐이야!’

언철진은 거대한 근육을 뽐내며 화음현을 거닐었으며, 웬만한 이들은 그에게 감히 말을 걸지도 못했다. 외관으로만 보면 그는 천하에 적수가 없을 고수였으니.

‘무림오화나 무림오룡 한 명만 내 장원에 오면 좋을 텐데···! 위지풍은 아마 화산을 돕고 있을 것이고··· 팽가의 팽염호나 모용란 둘 중 한 명만 장원에 와도···.’

둘 다 언철진보다 동생이었지만, 오대세가의 배경을 가진 그들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언철진은 팽염호의 탄탄한 근육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천재라는 남궁일몽보다 팽염호를 더 높게 평가한다. 무공 실력은 팽염호가 부족할지 모르겠으나, 근육만이 사내의 강함을 가장 잘 표출한다 믿고 있는 언철진은 팽염호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팽염호와 언철진은 그리 친하진 않았다.

‘아무튼 무림오화나 무림오룡 한명만 장원에 오게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길을 거닐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언가의 무인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인다.

“고, 공자님!”

“왜? 장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저, 그게···.”

순간 언철진의 머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간다.

단목장룡. 며칠 동안 잠잠히 지내더니 기어코 사고를 낸 모양이다! 단목장룡의 현재 모습은 꽤 달라진 것 같았지만, 언철진의 머릿속에 그는 혼사를 깨버린 개념없는 도련님에 불과했다. 그리고 언제든 사고를 칠 수 있는 위험 요소였다.

“이놈! 내가 사고를 치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했거늘!”

성질이 급한 언철진이 언가 무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달려나간다.

급하게 달려나와 말을 고르고 있던 언가의 무사가 벙찐 채로 달려나가는 언철진을 향해 말한다.

“고, 공자님···? 그게 아니라···!”

상체뿐 아니라 하체도 우람한 근육으로 무장한 언철진.

그의 경공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 * *

“무슨···?”

언철진은 장원에 와서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장원엔 딱히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바라고 바라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오라버니.”

모용세가의 모용란이 인사한다.

그녀의 옆에는 양씨세가의 양주아가 있었다. 두 여인의 외모에 적막감이 감돌던 장원이 화사해지는 듯하다.

“언가에서 장원을 빌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 찾아왔어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도 이곳에 묵어도 될까요?”

사실 두 사람이라면 화음현에 묵을 곳 하나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가가 빌린 장원을 찾아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뭐겠는가?

‘내 진가를 알아본 것이겠지!’

천룡각에서 서서히 허물어졌던 그의 자존심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우람한 근육이 더욱 팽팽해지는 듯하다.

“암! 당연하지! 내 너희 둘에게 최고의 방을 내어주겠다! 하하하하하! 화음현에서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반갑구나!”

씨익.

모용란이 미소짓는다.

철저하게 사람의 급을 나누는 모용란. 진주언가의 위세가 결코 작지 않았지만, 그녀가 생각할 때 언철진은 그녀의 급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 장원에 오게 된 이유는 있었다.

‘단목장룡 공자가 이곳에 묵고 있단 말이지···.’

궁금했다.

어떤 인물일지. 더 알아볼 가치가 있을까? 무림오룡에 이름을 올릴 만한 인물일까?

모용란은 이미 그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자, 따라오너라! 이미 방에 묵고 있는 이가 있지만 너희 둘을 위해서라면 그 방을 내어주겠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언철진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단목장룡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어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다. 그런데 무림오화 두 명이 떡하니 장원을 찾아주었다. 단목장룡은 다른 방을 내어주어도 감지덕지 해야할 것이다. 언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장섰다.

그렇게 도착한 전각.

마침 그곳을 사용하고 있는 단목장룡이 땀을 흥건히 흘린 채로 나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수련을 하던 모양이다.

“단목···!”

언철진이 소리치려 할 때.

언제 갔는지 뒤따라오던 모용란이 이미 앞서나가 있었다.

“어머, 단목 공자님. 여기서 뵙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다시 뵈니 정말 반가워요.”

단목장룡이 빤히 두 여인을 바라본다.

양주아는 앞으로 나서려나 그의 눈빛에 찔끔하여 멈춰선다. 그렇지만 인사는 한다.

“은인을 뵈어요.”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언철진이 큼지막한 눈을 끔뻑끔뻑 뜬다.

‘뭔 소리야? 은인? 단목장룡이 두 사람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단목장룡 또한 두 여인에게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두분께서도 이 장원에 머무르실 생각인가 보군요.”

“네, 저희도···.”

그때 언철진이 대화에 끼어든다.

장원의 주인은 바로 그였다.

“큼큼! 단목 소협! 이런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방을 비워줘야 할 것 같소.”

응?

이게 뭔 개소리야?

모용란이 언철진을 흘끔 바라본다.

양주아도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언철진에게 보낸다.

하지만 사태 파악이 빠른 모용란은 언철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금방 이해했다.

‘가장 좋은 방에 단목 공자가 묵고 있었구나. 이 미련한 곰탱이가 우리한테 뭘 뒤집어 씌우려고?’

겉으로는 오라버니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지만, 언철진에 대한 모용란의 평가는 신랄했다. 언가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저 우둔함으로 강호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으리라.

“예, 알겠습니다.”

사실 언가의 배려로 장원에 묵고 있는 단목장룡.

방 크기에 관한 욕심은 없었다. 애초에 장원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곳이라 더 작은 전각에 가도 크게 상관없었다. 개인 연무장과 멀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모용란이 끼어들어 언철진의 말을 가로챈다.

“어머, 저는 저 전각에 머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 란아! 너는 이곳을 사용하면 된다!”

모용란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아니에요. 전 여기가 좋은 걸요? 더군다나 이미 주인이 있는 방이잖아요. 저희 때문에 단목 공자님이 방을 옮겨야 한다면, 차라리 저희 둘은 장원에 묵지 않겠어요. 그렇지, 주아야?”

“맞아요. 은인의 방을 빼앗으면서까지 장원에 머물 순 없죠.”

양주아가 힐끔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했던 행동과 말이 있기에 최선을 다해 그에게 잘보이려 하고 있었다.

“무, 묵지 않겠다니? 고작···.”

아무리 언철진이 생각이 짧다해도 단목장룡과 두 여인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이 두 여인이 장원에 온 것은 단목장룡 때문인가?

‘나 언철진을 보고 장원에 온 것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지만, 언철진은 마음이 급했다. 무림오화 중 두 명이 기껏 장원에 찾아왔는데, 바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이 두 여인이 장원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연스레 냄새를 맡은 사내들이 모여들 것이 분명하다.

“큼큼! 너희 둘의 생각을 존중해주마! 난 장원의 손님을 함부로 내쫓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 역시 오라버니께선 배포가 크시네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모용란은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마치 자신이 이런 여자라는 걸 보여주는 듯이. 단목장룡 또한 모용란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표정과 몸짓 그리고 말투를 활용하며 언철진을 휙휙 휘두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여인이었군.’

뭐 단목장룡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크흐으음! 단목 소협은 그대로 여기 머물면 될 것 같소! 그리고···.”

언철진이 더 말을 이으려 할 때.

다다닥!

언가의 무인이 언철진에게 달려왔다.

“왜 또 무슨···.”

언가의 무인이 언철진의 귀에 속닥인다.

“저··· 하북팽가의 팽염호 공자님이 장원에 오셨습니다.”

“뭐 팽염호가?”

언철진이 버럭 소리치자 그것에 먼저 반응한 것은 단목장룡이다.

“염호가 장원에 왔습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단목장룡에게 꽂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