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뭐? 단목장룡? 그놈은 너와 날 욕보인 놈이 아니더냐!”
쩌렁쩌렁!
언철진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목소리. 언승지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게 꽉 막혀있으니 천룡각 사람들이 오라버니를 피하죠.”
“뭐? 날 피한다고? 모두 날 좋아한다고!”
사실 지금 후기지수 사이에서 언철진의 입지는 크게 좁아져 있었다.
단목청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언철진은 죽마고우처럼 사이좋게 지냈지만, 언승지와 단목장룡의 혼사가 깨지고 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언철진은 매번 단목청야에게 혼사가 깨진 것은 네 탓이라며 쪼아댔고, 그에 진절머리가 난 단목청야는 언철진과 거리를 뒀다.
천룡각은 중원 무림의 축소판.
그리고 현재 그곳의 제왕은 남궁세가의 남궁일몽이다. 단목청야는 그와 돈독한 연을 맺어 천룡각에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눈치 빠른 이들은 언철진과 거리를 뒀고, 단목청야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믿는 언철진은 단목청야에게 계속 시비를 걸어댔다. 단목청야는 굳이 진주언가라는 적을 만들기 싫어 적극적으로 대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다.
분노에 휩싸인 언철진은 천룡각에서 온갖 말썽을 피워댔고, 지금 그의 곁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자존심을 부리는 오라버니가 답답할 뿐인 언승지.
“오라버니를 위해 가문이 거금을 들여 장원까지 빌렸다고요! 그렇게 모두 내치고 나면 오라버니의 곁에 누가 남아 있겠어요? 싫은 사람이라도 품어줄 줄 알아야죠!”
“···나한테 화낸 거냐!”
“네!”
언승지의 목소리가 방 내부를 뒤흔든다.
평소엔 저리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언철진이 당황하며 말을 돌린다.
“크흠! 그런데 그 뚱땡이 공자가 왜 여기 있는 거냐?”
“말조심하세요. 그분은 손님이에요.”
손님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는 언철진.
“난 급에 맞는 이들만 이 장원에 들일 것이다! 남궁일몽?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나와 같은 영웅호걸들이 이 장원에 가득 모이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올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언철진.
그 또한 남궁일몽과 친해지고 싶었다. 단목청야를 밀어내고 그 뒷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저도 그냥 본가로 돌아가겠어요. 오라버니가 알아서 장원에 손님을 초대하고 다~ 하세요!”
“무, 무슨 말이냐! 네가 왜 가?”
언승지는 진주언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녀는 언가의 여식치고는 허약한 체질에 체구도 작았으니까. 하지만 단목세가에서 단목장룡에게 조언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달라졌다. 물론,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언철진에게 동생으로서 잔소리할 수준은 되었다.
“됐어요. 단목 공자님을 받아주시지 않을 거라면, 그냥 천룡각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만!”
언철진이 언승지를 잡는다.
“크흠···!”
언승지가 빤히 그를 바라본다.
“알겠다! 동생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언승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과거엔 이런 오라버니를 왜 그리 무서워했을까? 나이가 들면서 더 애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가 무공이 강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녀가 언철진을 몇 번이고 쥐어박았을 것이다.
“대신, 단목 공자님께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그런 모습이 보이면 전 오라버니에게 크게 실망할 거예요.”
“알겠다! 손님으로 대접하지!”
당당하게 외친 언철진이지만 끝내 한마디를 내뱉는다.
“후, 근데 돼지 놈 때문에 장원에 손님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긴 하군.”
언승지가 빽 소리쳤다.
“오라버니!”
언철진은 혀를 찰 뿐이었다.
그 망나니 공자가 이곳에 묵는다는 걸 알려지면 안 그래도 장원에 손님이 없는데, 발길이 완전히 끊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급에 맞지 않는 망나니 같은 놈들만 꼬이겠지. 후우···!’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화음현에는 단목장룡과 인연을 맺은 후기지수들이 모이고 있었다.
진주언가의 언철진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대단한 인물들이 말이다.
북적북적 장원
“다시 뵙습니다.”
언철진에게 인사했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언승지를 바라본다. 마치 내가 단목장룡이 맞느냐고 묻는 듯했다. 언승지도 그 시선엔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단목 공자께서 저리 달라지셨다니···.”
“크흠! 정말 많이 달라지긴 했군! 단목청야 그놈과 많이 닮진 않았어! 그건 다행이군!”
“오라버니.”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느냐? 아무튼 이리 다시 봐서 반갑소! 사실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내 단목 소협에게··· 악! 왜 허리를 찌르느냐! 큼큼! 아무튼, 난 배포가 넓은 사내요!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 하지만 현재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기고 있소! 내 장원에 머무는 것은 허락하겠지만, 그때처럼 사고를친다면···.”
“오라버니, 단목 공자님은 저희 장원의 손님이에요.”
언승지가 차갑게 웃는다. 내가 혼사를 깨트리겠다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그 눈빛에 호랑이 같은 외관의 언철진이 찔끔한다. 외관으로 보면 팽염호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지만··· 약간은 분위기가 달랐다.
“아무튼, 잘 지내시길 바라오! 난 약속이 있어 잠시 나가보겠소! 그리고! 동생에게 허튼짓도 하지마시오!”
“오라버니,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느냐? 동생을 걱정하는 것도 안 되느냐! 가족이 아닌 사내는 전부 늑대다 늑대!”
그래도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걸 알기에 언승지도 더 화를 내진 못했다.
“근데 누굴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내가 친우도 없을 것 같으냐!”
“아, 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그가 보란 듯이 당당하게 걸으며 장원을 빠져나간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언승지가 죄송하다는 듯 말한다.
“저희 오라버니, 그때완 많이 달라졌죠?”
“형님과 싸운 게 영향이 있는 겁니까?”
“네,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굽힐 줄을 몰라 저리 소리만 지르는 거예요. 제 오라버니라서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단지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다만 저희 오라버니께서 단목 공자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면 제가 사과드릴게요.”
뭐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언승지가 저리 말하는데 화를 낼 이유까진 없다.
더군다나 날 위해 방까지 내주었지 않은가?
“아직 방이 많이 남았어요. 단목 공자님껜 제일 좋은 손님방을 내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감사합니다.”
언승지의 말대로 방 크기가 가장 컸으며, 바로 뒤편에 작은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방이 높은 담으로 막혀 있어 같은 장원의 사람들도 수련하는 것을 함부로 훔쳐보지 못하는 구조다.
“여기서 두 분이 사용하시면 될 거예요. 만약 장원에 손님이 많아진다면 연무장을 종일 사용하시진 못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배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언승지가 도움을 청하면 당연히 응할 것이다. 돈을 아낀 것도 아낀 거지만, 이리 장원에 초대해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아니에요. 이미 단목 공자님께서 과거에 해주신 조언으로 충분히 도움을 받았는 걸요.”
그녀는 장원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준다.
식사할 수 있는 곳이나 욕탕이 있는 곳 등을 말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방에서 편히 쉬세요. 참, 식사는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해도 되지만 불편하시면 시비를 통해 방으로 받으셔도 된답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그리 피곤하지 않았지만, 이새붕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화음현까지 오면서 줄곧 경공을 펼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언승지가 떠나가자 이새붕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온다.
“저, 도련님··· 쉬어도 될까요?”
“그래, 오늘은 푹 쉬고 근육을 풀어주거라. 바로 눕지 말고, 가부좌를 틀고 내공심법을 운용하거라. 내공심법을 운용하면 몸의 피로가 금방 풀어질 거다.”
“예! 도련님!”
이새붕이 방으로 들어가고, 난 작은 개인 연무장에 들어갔다.
여기까지 이동하며 제대로 검을 수련한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늦게 시작한 만큼 여유가 있을 때마다 수련하는 것이 당연하다.
뇌왕검을 잡으니 이제까지 피로가 싹 날아가는 듯하다.
‘정말 나도 많이 달라지긴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