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아침을 먹고 객잔을 나선다.
이제는 화음현으로 출발해야 할 때이다. 내가 용봉지회 예선에서 탈락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한다. 묵을 방도 잡아놓아야 했고 말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객잔 입구엔 커다란 사두마차 한 대가 떡하니 서 있었다.
마부석엔 양씨세가의 호위인 냉추와 모용세가의 호위가 앉아 있었다.
“다, 단목 공자님?”
마차의 문이 열리고 양주아와 모용란이 그 안에서 나왔다.
“저어기···.”
“예.”
양주아가 쭈뼛쭈뼛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으니, 모용란이 내게 말한다.
“저희 마차를 타고 같이 이동하시겠어요? 네 명이 타도 내부가 넓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답니다.”
“가는 길에 음식은 제가 대접하겠어요···. 그러니 같이···.”
어제 점심까지 날 대하던 태도와 전혀 다르다. 모용란은 그렇다고 치고, 양주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약한 사람에게 강해지고, 강한 사람에게 약해지는. 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적겠지만···.
“괜찮소.”
마차로 편하게 이동해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난 따로 계획이 있었다.
“부,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죠. 호호···.”
“예, 단목 공자님. 그럼 화음현에서 다시 뵈어요.”
양주아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웃었으며.
모용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 또한 그녀들에게 인사한 후에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도련님, 정말 대단하세요.”
“뭐가?”
“제가 만나본 미녀들은 전부··· 도련님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새붕이 눈을 반짝인다.
두 눈동자에 부러움이 가득하다.
“저 두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
“예? 아니에요? 눈빛이···.”
“여인의 눈빛에 혹하지 마. 아마 내 상황이 나빠지면 저 두 여인의 태도도 싹 바뀔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지금 무공이야. 용봉지회의 예선은 통과해야지?”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내 수하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화음현까지는 계속 뛰는 거다.”
“거, 거기까지 뛴다고요?”
“그래.”
무영신투의 제자인 구방을 쫓으면서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다. 사실 그렇게 추격전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의 도주를 보며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었다. 더군다나 실제로 그를 잡아 보니 무공 실력은 거의 전무했다.
경공 하나만 대성해도 무림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다.
경공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달았다.
사실 무공을 수련하면서도 어제처럼 무식하게 뛰어본 적은 없었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보법을 위주로 수련했을 뿐.
“그럼 간다.”
내가 먼저 달려나가자 허겁지겁 이새붕이 뒤쫓아왔다.
‘그곳에 가면 그 남궁세가의 역대급 천재라는 놈도 만날 수 있겠군.’
기대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다시 만난 인연
화산.
오악 중 서악이라 불리며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중원의 명산이다. 화음현에 도착하니 화산의 거대함이 피부에 와닿는다. 십만대산은 크고 작은 산이 산맥을 이루는 게 장관이라면, 화산은 하늘 높이 솟은 산이다. 확실히 그 분위기가 달랐다.
화산과는 거리가 꽤 있음에도 그곳의 정기가 느껴진다.
저런 곳에서 수련한다면 효율이 높은 게 당연했다.
‘명문 거파라 불리는 곳은 모두 터를 잘 잡았군.’
어쩌면 그들이 중원 무림에서 득세할 수 있는 이유는 지리적인 요인이 큰 것 같았다.
물론, 개파조사와 그 후학들이 노력한 것도 있겠지만.
화음현에 도착하니 확실히 분위기부터 다르다.
서안에선 단순히 즐기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곳에서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곧 용봉지회의 예선이 시작된다. 용봉지회가 매년 열리긴 하지만, 개최되는 위치가 다르고 참가자들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이동하는 것이기에 매년 참가하는 것은 무리다. 중원은 상당히 넓었으니까.
이곳에 온 후기지수 대부분은 이번 용봉지회 참가가 처음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꿈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무림인들은 무(武)를 갈고 닦아 강호에서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기곤 한다. 용봉지회는 그런 부푼 꿈을 가진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렇지만 서로를 극도로 경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적당한 긴장감, 처음 보는 타인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공존하는 화음현의 분위기는 묘하게 야릇하달까? 나 또한 용봉지회의 참가는 처음이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연으로 친우를 맺고, 연인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것을 듣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용봉지회에 참가하러 왔다.
“헉헉···!”
뒤를 돌아보자 이새붕이 이제 막 도착하여 숨을 헐떡인다.
이동하는 동안 거의 걷지 않고 경공을 펼쳤으니 이새붕이 저리 죽을상을 하는 건 당연했다. 이새붕의 다리는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제 좀 뛰는 게 적응이 되냐?”
“···허어억··· 네··· 확실히 적응됐어요. 후우우···!”
“잘했다. 방을 잡아서 쉬자꾸나. 근데 서안보다 더 사람이 많아 보이니 묵을 방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제, 제가 객잔을 찾아볼게요···!”
“됐다. 천천히 따라와라.”
길을 따라 걸으며 보이는 객잔마다 들어가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서안과 마찬가지로 방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중심부로 가야겠군.’
아마 이곳은 서안보다 더 비싸게 숙박비를 받을 것이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몇 년 만에 찾아오는 대목일 테니까. 돈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유가상단을 통해 뜯어낸 돈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돈이란 것은 쓰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심부로 갈수록 사람이 더 많아진다.
‘본선에 진출하면 화산에서 따로 숙소를 내어준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난 예선부터 치러야 했다.
무림오룡이나 무림오화 같은 이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자들은 예선을 치르지 않고 바로 본선에 진출한다. 당옥정이 느긋한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고급 객잔도 자리가 없다는 소릴 듣고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날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저리 뚫어지게 바라보면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게 당연하다.
“응?”
그런데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저 여인은···.
“언 소저?”
“혹시 단목 공자님? 맞··· 으신 가요?”
진주언가의 언승지.
그러니까···.
나와 혼인을 할 뻔했던 여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방법으로 혼인을 깼다. 암천회의 갈유화에게 그 소리를 듣고 어찌나 당황했던지.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마 그런 방식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정말 단목장룡 공자님이 맞으세요? 정말요?”
“예, 맞습니다.”
그녀는 내가 돼지처럼 살이 쪘을 때 만났던 여인.
지금의 모습이 어색하리라.
“절 알아보고 그리 바라보신 거 아닙니까?”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긴 했는데, 단목 공자님인 줄은 몰랐어요. 정말··· 많이 달라지셨네요.”
언승지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니 반갑군요. 언 소저도 용봉지회에 참가하러 오신 겁니까?”
“네, 작년 무당산에서 개최된 용봉지회는 참가하지 못해서요. 이번엔 큰맘 먹고 참가했어요.”
그런가.
사실 이번에 개최되는 용봉지회의 참가자가 역대 최대로 많다고 했다. 꽤 일찍 화음현에 도착했음에도 방을 구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그렇군요. 언 소저라면 분명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단목 공자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그녀가 내게 묻는다.
“그런데 혹시 묵을 곳을 찾고 계신 건가요?”
“예, 화음에 인파가 워낙 몰려 빈방이 없군요.”
“아니면 제가 묵고 있는 곳으로 오시겠어요? 사실 객잔이라기보다는 장원을 통째로 빌린 것이긴 한데···.”
장원을 통째로 빌렸다?
“진주언가에서 빌린 겁니까?”
“네, 저희 오라버니가··· 아, 근데···.”
그녀가 쭈뼛쭈뼛한다.
“문제가 있습니까?”
“혹, 청야 오라버니께 따로 들은 말은 없으신 가요?”
고개를 젓는다.
애초에 단목청야와 나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천룡각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하겠는가.
“없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사실 청야 오라버니와 저희 오라버니의 사이가 조금··· 아니, 많이 나빠졌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장원에 묵어봤자 분란만 생기지 않을까?
그런 내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언승지가 재빨리 말한다.
“방 하나 사용하는 것으로 뭐라 하실 오라버니가 아니에요. 다만, 청야 오라버니가 언짢아하실 수도 있는데···.”
“그건 괜찮습니다.”
묵을 방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뭐 화음현 전체를 찾아보면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객잔보다는 장원의 방을 빌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장원엔 개인 연무장도 몇 개 마련되어 있고, 같이 수련할 수 있는 넓은 수련장도 있어요. 단목 공자님께서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장원에서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마구 쏟아낸다.
본선에 진출하기 전까지 잠시 신세를 지면 될 것 같았다. 뭣하면 돈을 내도 되고 말이다.
“일단 절 따라오세요. 근데 뒤에 계신 분은···?”
파들파들!
이새붕이 다리를 떨고 있었다. 딱 봐도 몸이 안 좋아 보인다.
“제 수하입니다.”
이새붕도 용봉지회에 후기지수로 참가하는 만큼, 시종이라 소개하기보단 수하로 소개하기로 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새붕이라고 합니다···!”
이새붕이 언승지의 얼굴을 전혀 마주하지 못하고 인사했다.
그 모습에 그녀를 갸웃했지만, 미소를 지은 채로 인사를 받아준다.
“잘 부탁드려요. 그럼 절 따라오시겠어요?”
장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상당히 넓다. 이런 곳을 빌렸다면 돈을 많이 들였을 거 같았다.
“사실··· 지금 장원에 묵고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진 않아요. 오라버니가 천룡각에서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거든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고 절대 단목 공자님께 다른 의도가 있어 이곳에 모신 건 아니에요. 단지 묵을 곳이 필요해 보이셔서···.”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단목청야와 그녀의 오라버니인 언철진이 사이가 좋지 않은데, 내가 이곳에 묵으면 정치적인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언승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까지 영악하게 날 이용할 여인은 아니었다.
만약 그런 낌새가 보이면 그때 가서 대처해도 늦지 않고 말이다.
“단목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 가요? 그래도 오라버니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