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36)

* * *

“소회주님, 왜 그렇게 행동하셨던 겁니까?”

“뭐가?”

흥겨운 듯이 콧소리를 내는 갈유화였다.

곡위는 지금 그녀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화를 내야 할 상황이다.

“고작해야 단목세가일 뿐입니다. 구파일방도 아니고 오대세가도 아니지요. 소회주님께서 고개를 숙이실 필요까진···.”

갈유화가 그를 빤히 바라본다.

“너.”

“예, 소회주님.”

“바로 앞에서 공자님의 눈빛을 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진짜야.”

진짜?

그게 무슨 말인가?

“호걸이 많은 사파에서도 그런 사내는 극히 드물어. 내가 인정하는 사내가 딱 두 명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누군지 알아?”

그녀는 무공이면 무공, 외모면 외모 또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내를 놀잇감처럼 취급하곤 했다. 그녀의 외모에 홀려 접근하는 사내들 대부분은···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짓을 당했다. 그런 소회주가 인정하는 사내. 당연히 두 사람이 떠오른다.

“회주님과···.”

“그래, 아빠와 사마련주님이지.”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잖아? 또래의 사내 중에서 눈빛만으로 날 옴짝달싹 못 하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화무기? 뢰극찰? 걔들도 뭐 나쁘진 않지만··· 그런 눈빛은 아니야.”

곡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목장룡을 홀릴 생각으로 들떠 있던 소회주가 갑자기 왜 저리 말하는지.

“그 눈빛이라는 게 대체···.”

“절대자의 눈빛이지.”

“의창현에선 망나니 취급을 받았던 단목세가의 도련님이 말입니까?”

“맞아. 내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거든. 근데 넌 아직 그가 망나니였다는 헛소문을 믿는 거야? 직접 봐놓고? 청성산인이 그에게 당한 것을 알고도?”

그녀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진 곡위.

“···소회주님, 그는 정파인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 본회에 정파인과 사랑을 나누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당연히 그런 회칙은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 소회주님의 행동은···.”

“더 내게 설교하려 들면 죽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갈유화.

그녀는 진심이었다. 곡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갈유화도 눈빛만으로 그를 판단한 건 아니다.

찰나의 순간에 단목장룡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순간에 보여준 몸놀림으로 단목장룡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똑똑한 편에 속했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내 직감이 틀릴 리가 없어.’

그녀는 오른 손목을 쓰다듬는다.

단목장룡이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찌릿.

그곳을 쓰다듬자 묘한 자극이 그녀의 등줄기를 관통했다.

“하아···.”

* * *

“난 네가 두 사람과 싸우려는 줄 알았어.”

뭔가 걱정이 가득한 당옥정의 눈빛이 보인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었다.

암천회는 사파 문파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그들이 작정하고 나나 단목세가에 시비를 걸려 하면 감당하지 못한다. 당연히 단목세가가 그들에게 공격당한다면, 다른 정파의 문파들이 나서긴 하겠지만··· 아마 그때쯤이면 단목세가는 철저하게 망가졌을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강호.

그렇기에 두 사람을 그냥 보내주었다. 거기서 싸우기라도 했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다.

“이번 일은 내가 아빠한테 말할게.”

아마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도 암천회를 당해내진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그녀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고맙다.”

“고맙긴 뭘···. 근데 너 갈유화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뭐··· 얼굴은 좀 예쁘고, 몸매는 좋아 보이긴 하던데···.”

“좋아해? 내가?”

“응···! 딱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냥!”

그게 그거 아닌가? 

조금 이상한 당옥정의 말이었지만.

“별로.”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여자는 정말 별로라니까. 처음 본 남자 손을 막 만지고,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난 절대 그렇게 안 해.”

어깨를 으쓱하는 당옥정.

왠지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3층을 둘러보니 이제 손님은 나와 당옥정 뿐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을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뭐든 물어봐.”

“뇌왕 대협에 대한 게 궁금해서. 낭인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봤다고 했잖아? 뭔가 알아낸 게 있어?”

뇌왕에 대한 의문

일인전승(一人傳承)이란 단 한 명의 제자를 받아 무공을 전수해주는 비밀스러운 문파를 말한다. 

뇌왕은 일인전승 문파 출신이었다.

직접 그의 무공인 뇌공검법을 읽어보았는데 뇌기(雷氣)를 사용하는 패도적인 무공이다. 내가 과거에 뇌왕을 직접 보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검을 휘두를 때 천둥소리가 사방에 퍼지고, 뇌전의 기운을 담은 검강을 마구 뽑아냈다는 풍문은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최소한 뇌공검법을 11성까지 익혔다는 말이다.

화경의 경지.

사파나 신교에선 그 경지를 극마(極魔)라 칭하는데, 그 존재만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경지였다. 흔히 절정에 이른 무림인을 고수로 분류한다. 아무리 많은 절정 고수가 달려들어도 화경의 고수는 이길 수가 없다.

정면으로 계속 맞부딪치면 결국 화경의 고수도 지칠 테지만, 그 경지에 오른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작정하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 절정 수준으로는 결코 화경의 고수를 쫓을 수 없었다.

뭐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처럼 여러 명의 하수가 하나의 고수를 상대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니다.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려면 그 이후도 고려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여 뇌왕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상대 세력을 죽자고 물어뜯으면 그 피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였을까?

뇌왕이 일인전승의 문파 출신이라 해도, 정파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크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까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이 일에 관련됐다고 봐야 한다.

‘일단 천마신교는 아니야.’

내가 신교의 모든 전력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인물은 없었다. 또한, 무공을 사용해도 눈동자가 푸르게 바뀌는 무공은 없었다. 정파와 사파 둘 중 한 세력이 뇌왕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었다.

‘당연히 사파 쪽이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지.’

10년이 지난 뇌왕의 죽음.

내가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 뇌왕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천하제일을 다투던 인물이 죽었는데, 강호에선 전혀 그 배후를 찾아내지 못했다.

둘, 굳이 뇌왕이 비동을 만들어 뇌공검법을 사천당문에 전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당용아와 연인 사이였다면 그럴 필요 없이 직접 전해줘도 됐을 거다.

뭐 뇌왕이 마땅한 제자를 찾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은 대비하여 만들었을 수도 있다.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걸 알기 위해서 당옥정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언젠간 나는 천마신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

지금은 전혀 쓸모 없는 정보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언제 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몰랐다.

“알아낸 게 있어?”

내 질문에 당옥정이 한숨을 내쉰다.

“거의 알아낸 게 없어. 개방에게도 정보를 의뢰해봤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고.”

역시 그런가.

“그 낭인이 그 후에 따로 말했던 건 없어? 푸른 눈동자를 제외한 다른 신체적인 특징 같은 것들 말이야.”

“없어. 애초에 푸른 눈동자만 말해도 겁을 잔뜩 먹어서···.”

일단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건.

그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천마신공과 비슷한 계열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

천마신공은 천마(天魔)가 되는 무공이다.

신교에서 천마는 절대적인 존재다. 인간에서 마(魔)를 복속하는 신이 되기 위한 무공. 그렇기에 천마신공으로 쌓은 마력은 단전뿐 아니라 전 신체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것은 눈도 마찬가지다.

눈동자에 깃든 내력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낭인이 그 사내와 마주했던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0년 동안 공포에 젖어 있다? 단지 눈을 보았던 것만으로? 그건 당대의 천마인 천마신교의 교주도 불가능할 것이다. 뭐 그런 부분에 특화된 섭혼술을 익혔을 수도 있고, 10년이 지났으니 낭인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푸른 눈동자의 사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밝히지 못할 사연이 있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뭔데?”

“뇌왕 대협은 왜 장보도를 통해 내당주님께 뇌공검법을 남긴 거지?”

“아···.”

잠시 고민하던 당옥정이 천천히 입을 연다.

“사실 고모님은 뇌왕 대협과 혼인하려 하셨어. 두 분이 혼인하셨다면 아마 자식도 낳으셨겠지? 고모님은 뇌왕 대협께서 자녀를 위해 비동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고 계셔.”

결국 독봉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는 거다.

어쩌면, 뇌왕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있다면, 내당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랬을 수도.’

내 추측일 뿐이었다.

“혹시 뇌공검법 마지막 장에 적힌, 네 개의 하늘을 조심하라는 건···.”

당옥정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건 고모님께서도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 사실 뇌왕 대협께선 모든 걸 털어놓은 성격은 아니셨나 봐.”

그래?

결국, 돌고 돌아서 알아낸 것이 없다.

‘뭐 이 정도면 됐다. 뇌왕과 내가 연이 있다면 언젠간 더 알게 될 수도 있지.’

여기서 내가 뭐 비밀을 파헤친다고 해봤자 알아낼 것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리고 뇌왕을 죽였던 인물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위험하지.’

무림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단체라는 천마신교.

그곳에서 생활했던 나였기에, 나는 정파와 사파로 나뉜 중원 무림이 신기했다. 무림맹과 사마련 아마 그곳에서도 많은 비사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났던 암천회도 그렇고 뇌왕을 죽인 의문스러운 푸른 눈동자의 사내까지.

강호는 참으로 위험하다.

‘더 강해지고 싶군. 어떤 누구도 날 위협할 수 없게.’

뇌왕의 일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런 감정이 샘솟는다.

“만약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네게 알려줄게.”

“그래도 괜찮아?”

“응! 당연하지.”

“매번 고마워.”

“고맙긴 뭘. 언제든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넌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당옥정에겐 고마웠다.

사실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마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그녀와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순수하고 마음씨가 예쁜 그녀가 싫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런 평범한 행복을 찾을 때는 아니었다.

“너도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응, 그럴게!”

밝게 미소지으며 대답하던 당옥정.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빛낸다.

“음···! 우린, 친한 친구잖아?”

유독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는 당옥정.

“그래.”

“난 너를 장룡이라 부르는데··· 넌, 맨날 당옥정이라고 정 없이 부르는 거 알고 있어?”

그랬나?

그래도 최근엔 꽤 친근한 말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내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걸, 여인은 크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그리고 사실 그녀와 난 서로의 알몸까지 본 사이가 아닌가? 굳이 따질 필요는 없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니까···.”

“옥정아.”

“···.”

당옥정은 바로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