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리고 지금.
청성산인은 절정의 초입에 머물러 있었다.
당연히 그 이후에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종일 무공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차피 한 번의 기회와 깨달음이 있다면 단번에 돌파할 수 있는 게 무공의 경지였다. 청성산인은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이 다시 찾아오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새로운 자극.
그것만이 당시 느꼈던 희열과 해방감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거추장스러운 복면만 없었으면 좋을 진데.’
그렇다면 더 확실한 자극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자극을 계속 얻으려면 자제를 해야 했다. 아무리 청성파의 장로라도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는 일이 밝혀지는 순간 파문이었다.
어차피 청성파의 절기를 펼쳐내지 않아도, 단목세가의 성도지부와 교룡문 따윈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단목세가의 둘째 공자인 단목장룡이었다.
‘알아서 찾아오는군.’
유한생은 사부인 청성산인에게 부탁했다.
만약 그를 납치할 수 있으면 목숨줄을 붙여서 데려와 달라고 말이다.
청성산인은 제자인 유한생이 오랜만에 손맛을 보고 싶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는 단목장룡이 불쌍할 뿐이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태천문의 대제자를 이겼다고 하여 너무 기고만장하도다.’
만약 습격을 알아챈 즉시 도주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오히려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다.
제자의 부탁도 있었기에 그를 살려서 데려갈 생각이었다.
단순히 도적 떼의 습격이라 생각하다가 그 배후에 대 청성파의 장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과정에서 청성산인은 어떤 자극을 얻을 수 있을까?
‘재밌겠구나. 참으로 흥미로워.’
듣자 하니 망나니 취급을 받다가 최근 개과천선하여 살도 빼고, 열심히 살아가는 듯했지만··· 결국 거기까지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보여줘야 마땅했다.
유한생이 키우는 무인들.
청성파의 무공을 익힌 건 아니지만, 그 수준이 상당했다. 괴이하며 음독한 면으로 볼 때, 사파의 무공을 원형으로 하는 듯했지만 청성산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썼다면, 처음 유가상단을 방문한 날 뿌리치고 나왔어야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여유롭게 상황을 즐기는 청성산인.
태천문의 대제자를 꺾었다는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기꺼이 살펴보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에게 쉽게 패배하진 않겠지···.
“···?”
뭘까?
왜 이렇게 속도가 빠르지?
철과 철이 부딪치는 그 산뜻한 검명이 들려오지 않는다. 단목장룡이 전진할 때마다 유한생의 수하들이 픽픽 자리에서 쓰러진다. 독이라도 쓰는 것인가? 아니, 독을 쓰더라도···.
“대체 무슨···?”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고야 마는 청성산인.
그의 움직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절정에 오른 자신이 고작 20살이 된 후기지수의 움직임에 감탄한다고?
“기다려라.”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온다.
내력의 제어가 수준급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한없이 여유롭던 청성산인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저놈도 절정에 올라 있다고···?’
분명히 놈의 검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검기가 발현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류라는 말인데···, 일류의 움직임이 저리도 깔끔했나?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던 청성산인은 혼란스러웠다.
‘안 되겠군. 직접 나서야겠어.’
이 이상 시간을 끌다간 유한생의 수하들이 모두 목숨을 잃는다.
“이놈!”
일단 단목장룡의 시선을 끌고자 내력을 가득 담아 고함을 쳤다.
그런데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착실하게 검을 휘두른다.
“감히!”
청성산인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나간다. 유한생의 수하들은 거침없이 전진하는 단목장룡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청성산인이 나서자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걸음을 물렸지만, 단목장룡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스으으으···!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밀하고 빠르게.
단목장룡이 보법을 펼쳐 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달빛을 머금어 찬란함을 드러낸 뇌왕검은 어김없이 상대의 급소를 꿰뚫었다.
“커헉···!”
“별거 아니네. 대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뒤에 천마신교라도 있는 줄 알았네.”
“···.”
청성산인은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단목장룡은 복면을 쓴 청성산인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의 반응을 떠보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천마신교를 언급한 것은 혹시나 해서였다. 그의 아버지였던 교주는 언제고 중원 무림과 전쟁을 벌이고 싶어 했다.
‘예상대로 청성파인가?’
뭐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림에선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대부분 과욕이 참사를 부르곤 한다.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을 벌이면, 언젠간 더 강한 자와 마주하게 된다. 약육강식. 강호란 그런 곳이었다.
타다닷!
단목장룡이 청성산인에게 돌진했다.
쉬리익!
단목장룡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천유보. 당문의 대법을 통해 몸이 더 가벼워졌고, 세맥의 불순물이 모두 배출되었다. 마치 땅이 아닌 공중을 밟는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단목장룡이다.
청성산인도 지켜보고만 있진 않았다.
‘잘못 생각했다. 이놈은 늑대 새끼가 아니라···.’
청성산인이 도를 내던지고, 유한생의 수하가 떨군 검을 집는다.
아무리 쾌락에 취해 온갖 일을 벌였어도, 절정의 초입에 이른 고수였다. 강적을 상대로 되먹지도 않은 도법을 구사할 생각은 없다. 정체가 들통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청성산인과 단목장룡의 검이 부딪쳤다.
우우웅-!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생각되지 않은 중후한 울림.
청성산인은 초장부터 검기(劍氣)를 발현했지만···.
단목장룡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역시 넌 괜찮겠어.”
단목장룡의 말에 청성산인이 청성파의 절기 중 하나인 청풍검(淸風劍)을 펼쳐낸다. 적을 말살하는 푸른 바람이 전방위를 휩쓴다. 청성산인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방으로 밀어닥치는 바람을 막을 방법은···.
‘유성검.’
바람을 일으키는 본체를 제압하면 된다.
단목장룡이 발끝부터 손끝까지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바람을 관통하는 쾌(快).
뇌왕검이 번뜩였다.
카아앙!
“크흡!”
청풍검을 펼쳐 단목장룡을 압박하려던 청성산인. 그는 황급히 검을 거두어 가슴을 방어한다. 청풍검을 더 펼쳤다면 단목장룡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겠지만···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대체 경험이 얼마나 많으면···?’
보통은 청풍검의 화려함에 지레 겁먹고 도망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단목장룡은 오히려 앞으로 치고 들어온다.
‘말도 안 된다. 이런 놈이 단목세가의 망나니였다고···? 고작 몇 달 동안 수련하여 일구어낸 경지라고···?’
까드득.
청풍산인이 입을 꾹 다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
수십 년의 노력과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그는 절정에 올랐다. 그런데 고작 20살인 단목장룡에게 밀렸다. 아직 패배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오기로 다시금 청풍검을 펼친다.
바람 정도가 아닌 폭풍이 된다면, 아무리 단목장룡이라도 휩쓸려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채앵! 챙! 채애앵!
수십 년간 쌓아온 청성산인의 내력이 폭주한다.
그의 눈이 터져버릴 듯이 충혈되어 있었다.
단목장룡은 청성산인의 검을 부드럽게 흘려냈다. 굳이 내력을 저리 쏟아내는데 정면으로 부딪쳐줄 생각은 없었다.
‘이상하군. 청성파의 무공은 확실하다. 그런데 왠지···.’
순식간에 두 사람은 수십 합을 교환했다.
단목장룡은 고작해야 땀을 조금 흘렸을 뿐이지만, 청성산인은 입에서 침을 흘려댈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단목장룡이 조용히 말한다.
“약에 취해있군.”
“···!”
검기를 활용하는 것은 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단 말이다. 대부분 절정 고수는 고작해야 저 정도로 지치지 않는다. 아무리 흥분하여 검을 휘둘렀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신교에 있을 때도 약에 취했던 놈들이 많았지.’
웬만해선 신교의 생활을 버틸 자들은 없다.
버티더라도 약 기운에 의존하는 놈들이 많았다.
“청성파에서 약도 주나?”
“이노오옴···!”
“그만 끝내자. 약에 찌든 놈은 재미가 없구나.”
“갈-!”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횡으로 베어내는 청성산인.
단목장룡은 가벼운 몸동작으로 그걸 피해냈다. 동시에 뇌왕검이 달빛에 번뜩인다.
“커허어억···.”
어깨에 검이 박힌 청성산인.
그 끔찍한 고통에 검을 놓쳐버린다. 만약 청성산인이 그 쾌락을 접하지 않았다면 승부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아니, 애초에 단목장룡과 이런 곳에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처억.
단목장룡이 검을 회수하고 그의 멱살을 잡는다.
“아는 대로 말해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마.”
단목장룡의 눈에서 귀기(鬼氣)가 일렁인다.
해우심법에 녹아든 천마신공.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천마(天魔)가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 * *
“사부님께서 오실 때가 됐습니다.”
“그런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잣거리에서 얼굴을 마주치더라도 그 특징이 눈에 띄지 않아 잘 기억하기 힘든 얼굴. 하지만 유가상단의 유한생은 그가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지독하게 잔혹한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몽환의 양을 조절해라. 청성산인은 쓸모가 많아.”
“···예.”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입가에 맴돈다. 아직은 아니다.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언젠간 저들에게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한생은 누군가의 명을 따르는 체질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그가 주도해야만 속이 풀렸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일을 너무 과격하게 벌이는 것 같던데··· 개코들이 꼬이면 귀찮아진다. 예전처럼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주의하겠습니다.”
톡톡.
사내가 유한생의 머리를 툭툭 두드린다. 참으로 굴욕적이었지만, 유한생은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내가 방을 빠져나가고.
유한생이 이를 간다.
‘개 같은 새끼가··· 어딜 감히 내 머리를···.’
유한생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어낸다.
드러나다
“그나저나 도착하실 때가 되었는데···.”
유한생은 사부인 청성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단목세가 성도지부까지 이렇게 손을 뻗을 생각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사내의 말대로 귀찮아질··· 아니,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유한생은 우연히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유한생에 목표에 몇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다.
‘난 고작해야 상단주로 만족하지 않을 거다.’
사천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유가상단.
유한생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돈과 무력.
그걸 동시에 손에 넣으리라.
항상 당당하던 아버지가 청성파의 무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던 모습. 상행에서 만났던 사파의 마두들에게 비굴하게 살려달라 무릎을 꿇었던 기억. 유달리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했던 유한생은 그 상황을 겪고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여겼다.
어차피 역사는 군림하는 자가 써 내려가는 것.
그는 언젠간 중원 무림에 우뚝 서려 했다.
‘속가제자가 배우는 아류의 무공으론 무리야.’
처음엔 천룡각에 들어가면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근방에선 무공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왔으며, 청성의 속가제자가 된 후에도 그보다 재능 있는 무인은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천룡각은 달랐다.
오대세가 그리고 구파일방.
그들은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무림오룡 중 가장 강하다는 남궁세가의 둘째 공자. 어릴 때부터 온갖 영약을 취해왔던 화산파의 대제자.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절기를 익힌 소림사의 대제자···.
자신이 그들보다 못한 것은 없다고 여겼다.
단지 청성파의 속가제자가 익힌 무공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유한생은 그 격차를 단번에 따라잡을 방법을 찾았다.
‘단목세가의 망나니 놈이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 그따위 놈이 아니라, 내가 그걸 가진다면···.’
그의 얼굴이 추악한 탐욕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