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36)

* * *

꽈자지직···.

종이를 구긴다.

당연히 청해성에 관련된 정보엔 ‘천마신교’나 ‘마교’라는 단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하오문에서 그 정보를 취급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하지만··· 분명히 관련된 정보가 존재했다.

‘만월루의 학살.’

내가 정을 붙이고 매일 드나들었던 기루의 이름이다. 그리고 오늘 읽은 정보엔 그곳의 모든 이들이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왜 나만 죽이지 않고, 애꿎은 사람까지 죽였나? 애초에 이혼대법에 성공하고 복수를 마음먹었지만,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어떤 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복수가 된단 말인가? 신교는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십만대산에서 그 권세를 유지하며 호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반복되는 증오가 두려워 여기서 멈춰버리면, 나 때문에 죽은 수많은 이들의 넋은 누가 위로해준단 말인가? 죽음에 다다른 순간 이혼대법이 성공한 것도 그들의 복수를 위함이라 생각했다.

복수에 미친 살인귀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은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월루에 관한 정보는 아주 짧았다.

단지 피에 미친 광인이 침입하여 모두를 학살했다고만 적혀 있었다.

그 외에는 청해성에서 딱히 주목할 만한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곤륜파의 몰락 이후 그곳은 신교의 텃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천성과 감숙성의 정보까지 모두 읽자.’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나간다.

중요해 보이는 정보만 대충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이 정도면 됐다. 이것만 챙겨가면 되겠군.’

스무 장 정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선다.

중년 사내에게 남은 정보들의 소각을 부탁했다.

그렇게 지하에서 올라와 기루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어이···! 넌 뭐야···? 히꾹!”

잔뜩 술에 취한 젊은 사내가 딸꾹질을 하며 손가락질한다.

“···.”

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참는다.

취객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이노오오옴이이이···!”

혀가 잔뜩 꼬였지만,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순간적으로 표정을 바꾸며 보법을 펼쳐 내게로 다가온다.

놈은 내 손목을 낚아채려 했지만··· 당연히 잡힐 리가 없었다.

“어엇···?”

‘청성파인가···?’

도가 계열의 명문 거파.

그가 펼친 보법은 청성파의 비류보(飛流步)와 비슷해 보였다.

“이거, 참··· 술을 먹었더니 발이 꼬여버렸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는 것이다.

“누구냐고 물었잖아. 왜 대답도 하지 않고 도망가려는 거지?”

“대답할 필요가 있나?”

“이놈이 내가 누군지 알고 반말을···.”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놈과 입씨름하는 시간이 아깝다.

“취했으면 곱게 집에 가서 자라.”

내 말에 놈이 발끈하며 다시 보법을 펼친다. 놈의 목적은 내 손목이다. 처음 시도가 실패한 것이 거슬렸던 모양. 당연히 잡혀줄 생각은 없다.

요리조리 그의 손속을 피하다가, 슬쩍 발을 걸었다.

놈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큰 소음을 내며 쓰러졌다.

“컥···!”

소란이 일자 바깥에 있던 호위 무사가 들어왔고, 위쪽에서도 몇몇 사내들이 내려온다. 시비를 건 사내와 비슷한 복색이었다. 아마 같은 문파 사람들인 듯하다.

“뭐 하는 거야?”

“가만있어 봐! 감히 이놈이···!”

“뭐야? 기루는 우리가 빌린 것 아니었어? 저놈은 또 뭐야?”

사내들이 분개하고.

호위들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내게 시비를 걸었던 사내는, 무너진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듯이 흉흉한 눈빛을 보낸다.

순간 참아왔던 화가 표출되려는 순간.

“그만!”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1층에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에 나를 향해 돌진하려던 사내가 움직임 또한 멈춘다.

“지금 뭣 하는 짓이야?”

“하, 한생아···.”

“내가 적당히 마시고 가라고 했지? 술에 취해서 난동을 피워?”

“그게··· 이놈이···.”

한생이라 불린 사내가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아 보였다. 복장도 단정한 것이···.

‘이놈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하군.’

청성파는 도가 계열의 문파다. 아무리 불가와는 달리 도가에서 여인과의 관계를 막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기루를 빌릴 수는 없었다. 즐기더라도 몰래 즐겼겠지. 지금 그들의 신분을 추측해보자면···.

‘속가제자(俗家弟子).’

신교에 있을 무렵 정파에 대해선 필수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속가제자들은 본파의 절기를 배울 수 없지만, 그 아류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아류라 해도 구파일방쯤 되면 웬만한 중소문파의 무공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대부분 속가제자는 그 문파에 거금을 기부하거나, 무공에 재능을 인정받아 문파의 제자가 된다.

그때 지하에서 내게 정보를 건네줬던 중년 사내가 튀어 올라왔다.

“아이고, 공자님들 죄송합니다···.”

“총관님, 저 사내는 누굽니까? 기루는 저희가 모두 빌린 것 아니었습니까?”

한생이라 불린 사내가 묻는다.

총관이 빠르게 대답한다.

“저분은 본루의 손님으로 방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연이 있으신 분입니다.”

“아, 그렇군요. 추립, 넌 총관님의 손님에게 시비를 걸고 있던 것이냐?”

내게 시비를 걸었던 놈의 이름이 추립인 듯하다.

추립은 당황하며 손을 젓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놈이 내 말을 무시하고···.”

“추잡한 변명은 그만해라.”

추립이 입을 꾹 다문다.

한생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일행이 술에 취해 시비를 걸었던 듯하군요.”

“···예, 괜찮습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 해도 굳이 지금 청성파의 인물들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이렇게 사과까지 하고 있으니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총관님 다음에 뵙죠.”

내 말에 총관이 죄송하다는 듯이 눈짓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다음에 또 들러주십시오.”

총관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려 할 때.

한생이라는 사내가 날 부른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실 말씀이 더 남았습니까?”

“추립이도 꽤 출중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추립이의 난동을 피하셨다니··· 무림인으로 추측되는군요.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혹, 어디 가문의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통성명이라···.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나도 저놈이 누군지 조금 궁금했다.

“단목세가의 단목장룡이라 합니다.”

“단목세가···?”

뒤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생이라는 사내도 놀란 듯이 날 바라본다.

“장룡···? 잠시만··· 설마 단목청야의 동생···?”

“제 형님을 아십니까?”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내가 천룡각의 교육을 모두 받고 오늘 성도에 도착했지. 청야는 내가 아끼던 동생이었어. 여기서 동생의 친동생을 만나다니 반갑네!”

다짜고짜 말을 놓는 사내였다.

“나는 유한생. 유가상단의 장남이지. 앞으로 잘 부탁해. 네게도 내가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유가상단···.

어렴풋이 떠오른다. 사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라 들었던 것 같았다. 사천에서 다섯 손가락이라면 그 규모가 대단할 것이다.

당연히 돈 많은 사람과 연을 맺으면 좋긴 했다.

하지만···.

‘이놈,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차가워.’

신교에서 참으로 많이 보았던 관상이었다.

내게 무언가를 뜯어내려고 하던 놈들의 눈빛.

하지만 굳이 쳐낼 필요가 있겠는가?

과거엔 나는 그런 기 싸움이 싫어 자신을 숨기고, 회피할 뿐이었지만···.

‘회피한다고 더 나아지는 건 없다. 그리고···.’

그가 뭘 원하든 간에, 나 또한 유한생이라는 이에게 뜯어낼 것이 있지 않겠는가?

이젠 그렇게 살아야 했다.

알아서 찾아오네

“청야와는 자주 주루에 다니곤 했었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예,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그럼 이제 가봐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늦어서 말입니다.”

“아아, 그래. 얼른 가. 우리도 가려던 참이었어.”

유한생과 인사하고 자리를 떠난다.

이제 피하지 않겠다고 하여, 그들의 비위를 하나하나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당연히 내가 숙이고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연의 고리를 처음부터 끊어놓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유가상단이라··· 그러고 보니 오늘 읽었던 정보에도 그와 관련된 것이 있었던 것 같군.’

여차하면 하오문에서 정보를 더 얻으면 될 것이다.

미리 그들의 정보를 알아두어선 나쁠 것이 없다.

‘하오문 뿐만 아니라 개방과도 연을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

개방 또한 전 무림에 퍼져 있는 정보 단체다.

그 정보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결국 정보라는 것은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정보라도 어떤 이들은 쓰레기만도 못하게 취급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금같이 여길 수도 있었다.

신교와 관련된 정보라면 하오문보다 개방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말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지부로 돌아갔다.

벌써 시간은 많이 흘러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왜인지 크게 피곤하지 않았다. 분명히 대법이 끝나고 퍽 오랫동안 자지 않았는데 말이다.

‘으음, 살이 빠졌다고 이런 부분의 체력도 좋아진 건가?’

환영할 부분이다.

꽤 오랫동안 살을 빼고, 무공을 수련했지만, 체력이 특별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막대한 인내력과 단전의 내력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달랐다.

‘사천당문에서 받은 대법의 효과가 커.’

체력의 향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용이 드러날 것이다.

내 전각으로 도착했을 때.

연무장에 있는 이새붕이 보였다. 그는 이른 새벽인데도 일어나 가볍게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참으로 성실한 아이다. 가끔 눈치 없이 말을 내뱉긴 했지만···.

마음이 간다.

“새붕아.”

“어? 도련님!”

화들짝 놀라 달려오는 이새붕.

그가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허억! 도련님, 맞으세요? 어떻게···.”

“사천당문에서 일이 좀 있었다.”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새붕이라면 이런 말에도···.

“허, 역시 사천당문이네요! 살을 그렇게 빨리 뺄 수 있다니···.”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망나니일 적에도 그는 나를 믿어주었다. 심성이 맑은 아이다. 그대로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면 호구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무공을 알려주고 있었다.

“벌써 수련을 시작하는 거냐?”

“예! 왠지 내공심법을 익힌 후부터 아침에 눈이 더 빨리 떠지더라고요! 그래서 자는 시간을 조금 줄였어요.”

이새붕은 확실히 체력이 좋은 편이다.

내공이라는 것은 인간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의 힘.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연스레 육체에 적용된다. 내가 이새붕에 딱 맞는 내공심법을 만들어주었기에 더 효과가 컸다.

뭐 그렇다고 하여 이새붕이 단번에 고수가 될 리는 없긴 했지만.

“잘했다. 지부에 별일은 없었고?”

“예! 왠지 모르게 다른 하인들이나 지부원들이 제게 잘해주더라고요. 편하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전각 청소는 깨끗하게 다 해놨어요.”

“그래, 고생했네.”

어차피 크게 피곤하지도 않았기에 이새붕의 무공을 봐주기로 한다.

그에게 가르쳐줬던 권법을 펼쳐 보이게 했다. 그는 진중한 자세로 주먹을 휘두른다.

‘너무 딱딱해. 새붕이는 응용력이 떨어지는군.’

나쁘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선 최적의 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자기 멋대로 초식을 해석하여 수련하는 것보다, 하라는 것만 하는 게 가장 좋았다.

“아직 어깨와 허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구나. 유연성을 기를 필요가 있겠어.”

“예!”

나는 이새붕에게 고쳐야 할 점을 일러주기 시작했고, 그는 하나라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이 열정이 계속 유지된다면 언젠간 이새붕도 한 사람의 몫을 해낼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이새붕의 권법을 봐준 후엔 나 또한 검을 꺼내 무공을 펼쳐 보였다.

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일 각 동안 절기들을 모두 쏟아낸 후.

뒤를 돌아보니 이새붕이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 대단···.”

나도 조금 놀랐다.

대법으로 노폐물을 완전히 몰아낸 탓인지 몸을 움직이기가 매우 수월했다. 진기의 운용도 더욱 자연스러웠다. 아직 더 나아가야 할 길이 많이 남긴 했지만, 이제는 상승절기를 조금씩 수련해도 될 듯했다.

“···저도 도련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나처럼이라···.

이새붕이라면 가능하리라 본다.

“새붕이 네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충분히.”

“아···!”

물론,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는다.

네가 지금의 내 수준에 올 때쯤이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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