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36)

* * *

당옥정은 혼란스러웠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당연히 자신을 납치한 두 사내는 괘씸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그녀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오늘도 꿈에서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린 두 사내가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후우우우···.’

토실토실해서 순박해 보이는 얼굴. 단목장룡의 첫인상은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었다. 낯을 가리지 않는 그녀는 처음부터 단목장룡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를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

그가 싫어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두근두근.

그를 바라보면 심장이 몹시도 빨리 뛴다. 그가 보여줬던 모습이 너무 냉혹해서? 순진한 얼굴 뒤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게 무서워서?

잘 모르겠다.

자신을 구해준 그가 고마웠다. 어떻게 해서든 은혜를 갚고 싶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웃음이 끊이질 않던 세 사람의 여정에서 침묵이 감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당옥정.”

“어··· 어엇? 왜! 뭐야!”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는 당옥정.

단목장룡이 고개를 갸웃한다.

“미, 미안···.”

“이거 그놈이 가지고 있던 건데 말이야. 뇌공검법.”

단목장룡은 한 차례 그것을 읽었다. 뇌왕의 무공이라 그런지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긴 했지만··· 딱히 건질 만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뇌공검법의 마지막 장에는 당용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뇌왕이 그 사람에게 남겼던 유산인 듯하다.

“마지막 장을 펼쳐 봐.”

“어? 왜 여기에 고모님의 이름이···?”

“뇌왕이 사천당문에 남긴 물건인 것 같다. 네가 가져가.”

“뭐어? 이건 네가 얻은 거잖아···! 내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고··· 이건 네가 가져야 해!”

사실 장룡에겐 필요도 없었고, 이걸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만 귀찮아질 뿐이다.

어쩌면 백독이흉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바에야 본래 뇌왕이 남기려 했던 곳에 주는 것이 합당하다. 단목장룡은 오대세가라는 당문과 연을 맺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단목장룡이 적당히 풀어 당옥정에게 설명했다.

기나긴 대화 끝에 그녀는 수긍하며 고갤 끄덕인다.

“내가 그걸 읽었다는 건 비밀로 해줘.”

“···절대 말하지 않을게. 그 누구에게도.”

당옥정이 결의를 다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거, 이건 장룡이 네가 가져야 해.”

그녀가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단목장룡에게 검을 내민다.

“그곳에서 발견된 건 이 뇌공검법 하나뿐이야. 이건 발견되지 않았어. 이건 네가 가져줘! 그리고 뇌공검법을 내게 넘겨준 것과 목숨을 구해준 건 가문으로 돌아가면 꼭 보답할게···!”

당옥정이 연신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받아주지 않으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다.

단목장룡은 그녀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워 잘 쓸게.”

단목장룡의 미소에 왠지 모르게 당옥정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지부장이 망나니란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군.’

『네 개의 하늘을 조심하시오.』

뇌왕의 무공인 뇌공검법. 그 마지막 장에 쓰여있던 문구. 뇌왕 악무광이 당용아라는 여인에게 남긴 말이다. 크게 중요치 않은 말일지도 모르겠으나··· 신경이 쓰인다. 뇌왕의 죽음이 나와 비슷한 시기라서 그런 걸까? 사마련의 자객이 그와 관련이 있을까?

뭐 무림에는 온갖 비사가 있다.

신교의 도련님이었던 나라도 모든 것을 알고 있진 않다.

‘중원 무림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무림맹과 사마련 그리고 천마신교.’

천마신교가 단일 문파로는 당연히 제일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혹독한 수련을 거친 무사들이 십만대산에 깔려 있다. 특히 마교에서도 명가(名家)로 불리는 가문 출신들은 과거부터 중원에서 약탈해온 무공을 익히고, 영약을 취하며 성장한다.

하지만 천마신교가 정파 무림을 모두 격퇴할 수 있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신교와 마찬가지로 정파의 진정한 힘은 드러나 있지 않다. 정파의 진짜 강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각 문파에 은거기인들이다. 이제는 금분세수하여 무림에서 은퇴한 고수들. 무림이 위기에 처하면 그들이 존재를 드러낸다.

사마련도 마찬가지.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에 따르면 그들도 신교처럼 철저히 상급자에 복종하는 무인들이 널려 있으며, 무인의 질은 조금 부족할 수 있겠으나 그 숫자는 신교를 압도한다고 했다.

신교는 무림맹이나 사마련 둘 중 하나와 자웅을 겨뤄볼 순 있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결국, 나머지 한 세력이 어부지리로 중원을 차지하게 되는 결말이다.

뭐 지금처럼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던 과거엔 신교는 자주 중원을 일통하겠다며 진군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선조들의 유지를 따르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어릴 적 내게 과한 기대를 품었었다. 절대자의 존재는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으니까.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지.’

아무튼, 뇌왕의 죽음은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었고 어떤 세력의 짓인지 확실하지 않기에 더 위험했다. 이 일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세 세력의 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일단 기억해둬야겠어.’

혹시 모르는 일이지만, 뇌왕은 정파 무림에서 가장 유명했던 무인 중 하나다. 기억해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걷고 있을 때.

당옥정이 외친다.

“성이 보여!”

우리는 꽤 오랜 여정 끝에 사천성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목적지가 같았기에 성도까지 동행했다. 그래도 칙칙한 사내 둘보다 여인이 있으니 분위기가 퍽 괜찮았다. 당옥정은 납치 사건 직후엔 날 불편해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본래의 해맑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오! 드디어!”

이새붕이 눈물마저 글썽이며 감격한다.

하기야 그는 이런 여정이 처음이었으니 힘들만 했다. 가끔 객잔에서 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노숙으로 쌓인 피로를 풀 수 없었다. 차가운 맨바닥에서 자는 건 상당한 고역이었다.

우리는 성도에 도착한 기념으로 당옥정이 추천해준 반점에 가서 함께 식사했다.

반점에서 나오니 당옥정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으음, 너···. 그러니까···.”

할 말이 있는 건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주먹을 꽉 쥔다.

“지부가 어딨는지 알아?”

“정확히는 모르는데··· 왜? 안내해주려고?”

“해줄까?”

“괜찮아.”

“칫, 혼자 하는 걸 참 좋아한다니까.”

내가 그랬나?

길을 헤메는 것보다야 그녀의 안내를 받는 것이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1공녀님!”

흑녹색의 외투를 입은 사내들이 우루루 달려온다. 그들의 오른쪽 가슴에는 당(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천당문의 무인들이다. 그런데 당옥정이 1공녀였구나.

사실 그녀가 당문의 직계라는 걸 알고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단목세가에서도 직계와 직계가 아닌 자의 차이는 크다. 사천당문 정도의 규모라면, 단목세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당옥정이라는 사람이 달라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어?”

“대체 어디에 가셨던 겁니까? 가주님이 잔뜩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 나야 뭐···.”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문의 무사들이 나에게 인사하곤 다시 당옥정을 재촉한다. 상당히 급해 보였다.

“얼른 돌아가시지요! 1공녀님을 찾으면 바로 가주전에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당옥정이 난감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안내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알아서 찾아가면 되지.”

“으응···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 다음번엔 청월 객잔에 안내해줄게.”

“그래, 폐관 수련을 하지 않으면?”

“절대 안 할 거야!”

폐관 수련에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당옥정이다.

그래도 그녀와는 한 달 동안 같이 여정하며 정이 들었다. 뭐 한동안은 성도에 있어야 하니 다시 못 만날 것도 아니고.

“다음에 보자.”

“예, 공자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둘 다 다음에 봐!”

당문의 무사들에게 에워싸여 떠나가면서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휴우···.”

“왜 한숨을 쉬어?”

“당 공녀님과 함께 있으면 숨이 턱턱 막혀요.”

“숨이 막혀? 이젠 좀 나아진 것 같더니.”

이새붕이 고개를 휘휘 젓는다.

“에이,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하는 거죠. 당 공녀님이 있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선··· 전 여인이라는 존재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럼 사내와 잘 맞나?”

“으음, 그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차차 나아질 거다.”

“그렇겠죠···?”

성도지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이새붕을 바라보며 말한다.

“참, 내가 했던 말 잊진 않았지?”

“예, 기억하고 있어요.”

난 지부로 가는 즉시 이새붕에게 무공을 알려주기로 했다. 처음엔 시종에 불과한 자신이 무공을 배운다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이새붕이었지만, 당옥정 납치 사건을 언급하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무공의 필요성을 인지한 것이다.

뭐 이새붕에게 대단한 재능은 없어 보였지만···.

‘내가 직접 가르치니까.’

그는 분명히 무공을 잘 익혀나갈 수 있으리라.

* * *

단목세가 성도지부.

이곳은 가주 단목무광의 사촌 동생인 단목필이 지부장으로 있는 곳이다.

지금 그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본가에서 망나니 조카가 부지부장으로 온다는 것이다. 태상가주가 다 뜻이 있어서 보내는 것이겠지만 썩 마음에 내키진 않았다. 아주 어릴 적에는 사교성도 있고 성격도 싹싹했다.

근데 나이가 든 조카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왜 그렇게 변하였는지는 알고 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심이 얼마나 큰지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가주의 아들이었다.

직계만이 가주직을 물려받을 수 있는 단목세가. 

세가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에 맞는 의무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식의 교육은 부모의 재량이었기에 가주에게 뭐라 하진 못했지만 내심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 일이 터졌다.

난데없이 본가에서 날라온 서신 한 통. 거기엔 태상가주의 명으로 둘째 공자가 부지부장으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성도지부의 지부장이 된 단목필은···.

당연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상가주와 가주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단목세가의 장로들에게 이 일을 피력해봤자 꾸지람만 들을 게 뻔했다.

“후우···.”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단목필 앞엔 멀끔하게 생긴 한 30대 초반의 사내가 서있었다.

그의 이름은 단목우현. 단목필처럼 노력으로 성도지부의 총관이 된 사내였다.

“그래, 지부원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서신을 받은 지부에 공석인 부지부장이 누군지 공표했다. 모두 단목세가의 사람이었으므로 단목장룡에 대한 소문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총관은 보태거나 줄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모두 불만이 많습니다. 이제 지부가 성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한 사람 때문에 평판이 떨어질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생각은?”

“저도 그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허허, 이거 참 난감하구나. 가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무시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태상가주님께서 기대하고 계신다니··· 대체 뭘 기대하시는 거지?”

“어쩌면 태상가주님께선 둘째 공자가 부지부장의 임무를 수행하며 바뀌길 기대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총관에 말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최근에 조금 달라지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지부장이라니···.

대공자인 단목청야도 천룡각에 들어가 무공을 익히며 세상을 배우고 있다. 부지부장이라는 자리는 그리 녹록한 자리가 아니었다. 망나니였던 도련님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허수아비처럼 둘 수도 있겠지만, 지부장은 그것도 싫었다.

부지부장으로 왔다면, 자리에 맞는 일을 해야 했다.

“허허, 딴 길로 새지 않았으면 곧 도착할 시기가 됐군.”

“그래도 환영식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지부에선 부지부장의 대우를 해줄 것이다.

만약 대우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직접 태상가주께 서신을··· 아니,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리겠다.’

단목장룡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고 생각한 총관이 일 이야기를 꺼낸다.

“참, 오늘 당문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당문의 외당주는 내부 사정으로 바빠 시간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쯧, 당문이 그러는 것이 한두 번인가? 됐네. 일단은 사천성에 중소 가문 위주로 발을 넓혀보세.”

“예, 준비하겠습니다.”

문파나 가문이 지부를 설립하는 목적. 그것은 세력의 영향력을 더 넓히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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