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36)

* * *

“소저가 속은 듯하오.”

“뭐? 속았다고? 내가?”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다.

그렇게 봐도 그녀의 말에 동감해줄 순 없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옥정은 그 장보도를 허름한 행색의 낭인에게 샀다고 했다. 그는 세상의 풍파를 다 맞은 얼굴로 이걸 포기하고 싶다고 했고, 당옥정은 날름 그것을 금화 한 냥에 구매했단다.

여기서 그 장보도가 진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조금 의아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런데 누가 장보도를 훔쳐간 것이오?”

“갑자기 그 두 놈이 날 습격해서 그걸 훔쳐 달아났어. 독을 사용했다면 이길 수 있었는데··· 사람을 죽이긴 싫기도 해서···.”

“그럼 그놈들이 변장할 수 있다는 건 어찌 알고 있소?”

“추종향을 묻혀 그놈들을 추적했어. 한 번 마주쳤는데 그때 놈들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 거기서 잡았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놓쳐버렸어.”

그게 정말 장보도라면, 사천당문의 여식에게서 훔쳐갈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의문인 것은···.

“왜 혼자 그걸 찾고 있소? 가문의 도움을 받으면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말이오.”

“그게··· 아버지랑 싸웠거든.”

“···.”

“우리 아버지 성격이 정말 깐깐하거든. 아마 가문으로 돌아가는 폐관 수련을 명할 게 뻔하다니깐?”

“···그러니까 아버지랑 싸우고 가문을 나섰다가 장보도를 발견한 것이군?”

“맞아! 이해가 정말 빠르네? 너 머리 정말 좋다. 천룡각 출신이야?”

“그건 아니오.”

“그래? 흐응···, 너도 천룡각에 가기 싫었나 보구나? 나도 그래. 누구나 갈 수 있는 건 딱히 의미가 없어. 난 나대로 중원에서 의미를 찾을 거야!”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말하는 당옥정.

천룡각을 누구나 갈 수 있다고 칭하는 것으로 보니 확실히 콧대 높은 오대세가 출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때? 이제 할 생각이 생겼어?”

절레절레.

이건 답이 없다. 애초에 추종향도 완전히 흩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을 어느 세월에 찾을 것이며, 또한 장보도가 진짜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객잔에서 장보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소. 만약 그게 진짜라면··· 그렇게 퍼졌겠소?”

“정말이야···?”

“그렇소. 그러니 당 소저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 정말··· 네 말을 들으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머리 아파···. 정말 어쩌지?”

“···.”

애초에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할 권리는 없었다.

그녀가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니까.

다만, 혼자 그걸 찾다간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전부 훌훌 털어놓는 것을 봐서는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칠칠치 못하다.

“개인적으로 당 소저가 여기서 포기했으면 좋겠소. 정말 그게 뇌왕의 장보도라면 위험한 일에 엮일 가능성도 있소. 정녕 그것을 찾고 싶다면,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안전할 뿐 아니라 현명한 선택인 듯하오. 결국, 가문에 돌아가야 하지 않소?”

“···그러네.”

고민하던 그녀가 내 말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야겠다. 애초에 나 혼자서 그놈들을 찾는 것도 무리고··· 후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돌아가는 건 같이 해도 되지? 어차피 성도에 가는 거 아니야?”

“그건 상관없소. 그런데 소저께선 사내들과 함께 다녀도 괜찮겠소?”

“난 괜찮아!”

사천당문의 인물과 연을 맺어놓으면 나에게도 나쁘진 않았다.

사천의 성도는 사천당문이 꽉 잡고 있는 지역이었으니. 아니, 사천성 전체에서 사천당문이 최고의 가문이었다. 의창현에서만 호랑이 노릇을 하는 단목세가와는 급이 다르다고 할까?

그래도 그 이름에 주눅 드는 건 아니다.

과거엔 나도 그보다 더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슬리는 건 있다.

“근데 말이오.”

“왜?”

“왜 자꾸 말을 놓는 것이오?”

“엉? 너, 몇 살인데?”

“20살이오.”

전의 나이로 따지자면 더 많긴 했지만.

“나랑 같네! 그럼 친구 하면 됐지 뭐!”

“그래, 맘대로 해라.”

“으응···?”

내가 막상 말을 휙 놓자 당황하는 그녀였다.

* * *

“이런, 제기랄!”

“왜? 뭐 문제 있어?”

두 사내.

한 명은 근육이 붙어 덩치가 컸고,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체구였다. 다만, 두 사람은 똑같이 얼굴에 흉측한 흉터가 있었다. 장정들도 그 얼굴에 겁을 먹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우리는 여기 입구를 열 수 없겠는데?”

“왜? 저까짓 바위야 부수면 되지.”

“씨발! 저걸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해?”

“으음, 해볼 만도 할 것 같은데···.”

인위적으로 깎아놓은 거대한 바위. 이곳이 뇌왕의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이다. 장보도를 따라 이 동굴에 도착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위가 떡하니 입구를 막고 있었다.

“제기랄, 그 계집이 당문의 무사들을 끌고 오면 큰일인데···.”

인부를 고용하여 공사를 진행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주변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사천당문이 나서면 자신들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근데 뭐라고 적혀있는데?”

덩치가 큰 사내는 글을 읽지 못한다.

그래서 입구에 적힌 글을 해석하는 건 작은 사내의 몫이었다.

“독을 품은 여인의 피가 필요하대. 이 구멍에 그 피를 넣으면 되는 것 같은데?”

“···뭐? 그게 뭔 소리야.”

“몰라. 이곳이 정말 뇌왕이 남겨놓은 곳인진 모르겠는데··· 바위를 깎아놓은 것 하며 진법을 설치해놓은 것 하며···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근데 독의 피를 가진 여인? 피가 독인 여자도 있냐?”

“그러니까···.”

작은 체구의 사내가 손뼉을 딱 친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옛날에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무슨 소문?”

“뇌왕이 당문의 여인과 배를 맞대는 사이라는 소문 말이야. 들어본 적 없어?”

“몰라. 근데 뇌왕은 동자공을 익힌 게 아니었나? 혼인도 하지 않았잖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친다.

“모르지! 씨발! 아무튼,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알아?”

“왜 욕을 하고 그래? 무슨 소린데?”

“그년이 필요해.”

“당문의 그 계집? 그년은 당문의 직계라 건들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씨발, 우리가 그런 거 걱정했었냐? 뇌왕의 무공을 얻으면 우리도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다고!”

거한 사내가 눈을 빛낸다.

“오오!”

“우린 그년의 피만 얻어오면 돼. 굳이 죽일 필요도 없지.”

“그럼 그년을 찾아야겠구나?”

“그래, 찾으러 가자.”

두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백독이흉(百毒二凶) 같은 흉흉한 별호가 아닌, 뇌왕(雷王) 같은 멋진 별호가 생길 것이다. 그들의 명성을 중원에 널리 퍼트릴 수 있으리라.

절세의 무공만 있다면···.

그들은 빌어먹게 꼬였던 인생이 확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그렇게 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당옥정의 성격은 밝고 쾌활했다. 명문가 출신의 여인이라면 시종을 하대하기 마련인데 나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다했다. 이쁨을 가득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해야 할까? 약간의 허당 기질이 흠이었지만, 뭐 그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대화를 나눠보니 조금 미숙하긴 해도 머리가 나쁜 건 절대 아니었다.

명문가에서 자라 확실한 교육을 받아 지식은 많았다. 단지 아직은 그 지식을 가공하여 지혜로 활용할 수는 없다고 할까? 삶이란 깨지고 깨지면서 배우는 게 아니겠는가?

나도 목이 잘리고 나서야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최대한 후회하지 않기 위해 계속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근데 너 가문에서 신뢰를 많이 받나 보다? 나랑 동갑인데···.”

그녀는 내가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모른다.

부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성도로 가는 것이니 가문에서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가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까?

사실 나도 성도지부의 부지부장으로 가게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썩 그렇게 신뢰받는 건 아니야.”

“장룡은 참 겸손해. 그렇지, 새붕아?”

“예엡! 도련님은 겸손합니다!”

잔뜩 얼은 이새붕이 각을 잡고 대답한다. 당옥정의 미모에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다. 하기야 여인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사내는 보통 저렇게 굳어지곤 한다. 그런 이새붕이 귀엽다는 듯이 웃는 당옥정. 그녀의 미소를 본 이새붕이 더 당황했다.

“죄, 죄송합니닷!”

“푸후훗!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그, 그게···.”

이새붕이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난 당옥정의 관심을 내게로 돌리기로 했다.

“사천의 음식은 어때?”

“뭐야? 사천요리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그래.”

나는 신강성과 청해성에 줄곧 살아왔다. 청해성과 감숙성, 사천성은 붙어 있었지만, 따로 방문해본 적은 없었다. 위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청해성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과 신교는 일종의 밀약이 존재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사천요리를 설명해준다.

“사천요리를 엄청나게 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 그렇게 매운 편은 아니야. 뭐 진짜 매운 음식도 있긴 한데··· 매운 게 싫다면 맵기를 조절해달라고 숙수에게 말하면 되니까. 마파두부나 회과육은 꼭 먹어 봐. 내가 성도에서 유명한 반점이랑 객잔들을 알려줄게.”

그녀는 육육 반점이니 청월 객잔이니 이름을 줄줄 읊었다.

나는 신교에 있을 적 요리를 즐기곤 했다. 사실 기루에 자주 찾아간 것도 여인들과 어울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기루 숙수의 요리가 일품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래? 꼭 한 번 가봐야겠네.”

“꼭 가 봐. 만약 폐관 수련을 하지 않으면 내가 안내해줄 수도 있어. 새붕아, 너도 가고 싶지?”

“네넵···! 저야 데려가 주신다면야 무조건···.”

“그래, 새붕이도 같이 가자. 정말 재밌겠다! 사천에 가면 내가 성도에서 관광을 시켜줄게. 거기에 가면 너도 친구가 많이 필요하지?”

그녀는 참으로 순수했다.

보통 다른 가문끼리의 사람이 교류하게 되면 격을 따지기도 한다. 신교에서도 여러 가문이 있었기에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되면 일방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난 사공가의 직계로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걸 옆에서 지켜보며 혀를 차곤 했었다. 

“아마 그곳에 가면 밖에 잘 나오지 않을 거 같군.”

“아··· 위치가 있다 보니 그렇겠구나.”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사실 과거처럼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기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최근 빠르게 발전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적어도 화경의 경지엔 올라야 한다. 그래야만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된다고 믿었다.

무공을 익히는 중원의 수많은 강호인이 듣는다면 날 미친놈 취급할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급해지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았다.

내가 신교에서 지켜본 무림인이 전부 그러했다. 뭐 특별한 몇몇은 그와 비슷한 감정으로 원동력 삼아 성장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어! 저기 건물들이 보인다!”

우리는 드디어 중경성 석주현에 진입했다. 중경성만 지나면 드디어 목적지인 사천성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성도까지는 꽤 오래 걸릴 테지만.

“도련님, 방을 잡을까요?”

“그래, 쉴 땐 쉬어줘야지.”

“옙!”

이새붕이 먼저 달려가 객잔을 잡으러 간다. 귀찮은 일은 모두 자신에게 맡기라던 이새붕. 신교에서도 내 밑에서 일하던 이들은 많았지만, 그처럼 순수한 진심으로 날 모시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새붕이는 믿을 만하다. 지부로 가게 되면 무공을 알려줘야겠군.’ 

시종이라고 무공을 익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새붕이 내 곁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가정이 생겼는데도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닐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새붕은 내 노예가 아니었다.

“장룡, 뭘 그렇게 흐뭇하게 봐?”

“내가 그랬나?”

“어, 완전 사랑하는 여인을 보는 것처럼 보던데?”

“티 났나?”

“···진심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순진하게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하며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내 말이 진짜인가 거짓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객잔에 도착하니 이미 이새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내오라 했어요!”

“그래, 고맙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저, 그게···.”

“후후, 장난이야.”

“하, 하하···.”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객잔에 묵을 땐 따로 방을 잡았다. 사실 이 여정에서 가장 고생하는 것은 이새붕이다. 내가 편하게 있으라 해도 그는 날 모셔야 한다며 사서 고생하는 성격이었다. 객잔에서 따로 방을 잡아놓고, 방해하지 말라 일러두면 그도 알아서 휴식을 취한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부좌를 틀어 내공심법을 운기했다.

내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방 안에서 검법 같은 것을 수련하기엔 공간이 부족했으니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걸으면서 운기행공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가부좌를 틀고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난 잠을 자는 것도 잊은 채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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