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단목세가 가주전.
본래 가주가 있어야 할 자리엔 수염을 곧게 기른 노인이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앉아 있었다. 자세로 보면 여느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그 앞엔 가주가 앉아 있었다.
“이번엔 청야가 패배했더구나.”
비무에서 패배한 것은 단목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목청야가 세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 높이기 위해 계획한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패배한 것은 단목청야. 단목세가의 장남이었다.
“예,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주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단목장룡과 함께 수련하여, 단목산산이 단목경을 압도할 정도로 강해졌다. 이제껏 가주가 생각하기로는 단목경의 재능이 훨씬 뛰어났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아버지,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가 말이더냐?”
“어찌하여 산산이 경이를 이길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산산이 더 강하기 때문이지.”
“경이는 청야에게 배웠고, 산산은 장룡과 함께 수련했습니다.”
태상가주가 고개를 젓는다.
“세상일은 모르는 일이야. 너도 알지 않느냐 무림에선 어떠한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무림 최고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던 뇌왕 대협께서 한낱 낭인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무림이다.”
뇌왕(雷王).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 경우는 낭인의 정체가···.
‘마교나 사파가 보낸 자객이라는 말이 많았지.’
아무튼, 당시 뇌왕의 죽음은 중원 무림의 충격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무림맹에 모여 사태를 의논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무림은 현재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으로 평화를 유지해오고 있었으니까.
“장룡이 그 낭인이라는 소리입니까?”
“모르는 일이지. 내가 볼 때, 장룡이는 정말 많이 바뀌었더구나. 넌 직접 보지 않았느냐? 장룡은 노력하고 있어.”
“예···. 뭔가 바뀌긴 했더군요”
“그럼 믿어줄 때가 되었지 않느냐? 열 번 믿어줬는데 한 번 더 믿어주는 게 대수랴?”
* * *
나는 산산과 이새붕과 함께 근처에서 요리로 유명한 객잔을 방문했다.
최근 기루에 들르지 않아 돈도 꽤 많았고, 단목산산이 열심히 했으니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저도 같이 먹어도 되는 건지···.”
“새붕아. 넌 내 가족이다.”
“도련니이임···.”
“맞아! 맞아! 새붕이는 나와도 가족이야!”
술에 취한 것이 아닌 승리에 취한 단목산산.
그녀의 말에 이새붕이 눈물이라도 질질 흘릴 기세였다.
“됐고, 얼른 먹자꾸나.”
“옙!”
“많이 드세요! 오라버니!”
단목산산은 고기를 덜어 내 접시에 가져다 준다.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먹어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산산을 대접하려 했지만, 이렇게 보아서야 산산이 날 대접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산산이 올려준 고기를 입에 넣는다.
‘음, 맛있군.’
내가 먼저 식사를 시작하자 두 사람도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가장 친한 두 사람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도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이 두 사람에겐 진심으로 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 물론, 언젠간 거리를 둬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렇게 모두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서려는데.
익숙한 사람이 객잔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이쿠, 산산아.”
“식사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란다. 장룡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지.”
태상가주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날 바라본다. 사람이 좋은 것은 알겠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태상가주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이번 비무와 관련된 것이겠군.’
“장룡아, 이 할아부지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
“예, 물론입니다.”
“너희들은 나중에 꼭 사주도록 하마.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두분이서 이야기 잘 나누세요! 가자, 새붕아!”
“네, 네엡!”
단목산산과 이새붕이 허겁지겁 자리를 뜬다.
태상가주가 날 찾아왔을 때 산산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내가 인정 받을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한다. 그것이 왠지 싫지 않았다.
나와 태상가주는 근처 주루에 방을 잡았다.
확실히 태상가주라 그런지 가장 상층부의 방에도 예약없이 바로 출입할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활기차게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다.
“그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지 않으냐?”
“제겐 좋은 기회겠지요.”
“흘흘, 맞다. 장룡이 네겐 정말 좋은 기회지.”
오래 보지 않았지만 태상가주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손주에게 이상한 말을 하려고 이리 찾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으음, 천룡각에 가라는 건 아니겠지?’
곧 단목경과 단목청야가 함께 천룡각에 간다고 했다.
단목경이야 입각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다시 단목세가로 돌아오겠지만.
“예상한 바가 있나 보구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뜸 들이지 않고 말하마.”
과연 무엇일까?
“성도(成都)지부로 가거라.”
성도지부라고?
그곳은 최근에 단목세가가 만든 사천성의 분타였다.
“장룡이 네가 이제 그곳의 부지부장이란다.”
“···.”
천재가 영약을 먹으면
‘부지부장···.’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다.
신교에 있을 때, 난 청해성 서녕지부의 지부장으로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신교의 정예 부대와 혈우검마에게 죽임을 당했다. 더군다나 나는 목까지 잘렸다. 이혼대법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었지···.
“그리 달갑지 않은가 보구나.”
“예, 조금 그렇습니다. 전 아직 부지부장의 직무를 수행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태상가주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크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 너를 그곳에 보내려는 이유는 경험 때문이란다. 실수에서 배우고, 훗날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겠지. 또한, 단목세가가 있는 의창현이 아닌 타지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야. 사천성엔 구파일방 둘과 오대세가가 하나 있으니 운이 좋다면 그들과도 연을 맺을 수 있겠지.”
나를 그곳에 보내려는 건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듯하다.
태상가주는 나를 망나니로 여기지 않는다. 눈빛을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껴진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연을 맺으라고 보내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건 네가 선택할 수 있을 거야. 지금처럼 무공 수련에만 집중하고 싶다면 지부에 마련된 개인 연공실에서 하면 된단다.”
태상가주가 날 설득한다.
명령한다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위치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쁠 것은 없어. 장소를 이동하는 것뿐이니.’
언젠간 의창현을 떠나 정기가 맑은 곳에서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기회가 일찍 찾아온 듯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태상가주가 넌지시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그곳으로 가겠다고 하면 장룡이 네가 원하는 선물을 주도록 하마.”
“선물 말씀입니까···?”
“그래, 원하는 것이 있더냐? 뭐든 말해보아라.”
사실 얻고 싶은 것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위치에선 구하기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돈을 주더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단목세가의 태상가주라면?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기로 했다.
“제 주제에 맞지 않는 물건일지 모르겠으나···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약을 받고 싶습니다.”
“영약?”
왜인지 내 말에 태상가주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예···.”
“하하하! 우리 장룡이가 정말 달라졌구나! 그래, 영약이라···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네게 줄만 한 것이 있구나.”
사실 운기조식을 통해 내력을 모으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뭐 내력이 양이 많다고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에서 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단전에 많은 내력을 품고 있었다.
“무공에 대한 열망이 생겼구나. 영약을 받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흘흘.”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태상가주.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치없다니? 섭섭한 소릴 하는구나. 영약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주려무나. 최대한 들어줄 수 있도록 하마.”
“아닙니다. 전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래? 흘흘.”
태상가주는 내 얼굴을 보며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 이후엔 성도지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곳엔 몇 명의 인원이 있는지, 지부를 만든 목적은 뭔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래도 부지부장으로 가는데 숙지해야 할 정보들이었기에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 * *
“오늘 장룡이에게 지부에 관한 걸 말해주었다.”
단목세가의 가주와 태상가주가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주인 단목무광은 찝찝함이 남아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도 동의한 일이었지만, 과연 단목장룡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태상가주가 장룡에게 과한 기대를 품은 것이 아닐까?
그가 최근 조금 바뀐 것은 알았지만, 혼사를 거절했을 때의 일은 기억하고 있다. 진주언가와의 관계가 조금 틀어진 상태. 가주로서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사천에서 그러한 사고를 또 친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아직도 걱정이 많은 표정이로구나.”
“사천에가서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더군다나 부지부장이라니···.”
“흘흘흘, 이 아비가 너에게 첫 임무를 맡길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
단목무광이 할 말을 잃는다.
그 또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가주가 되어 가문에 신뢰를 받지만, 그도 어릴 때는 당연히 실수도 했다. 태상가주는 그런 단목무광을 믿어주었기에 지금의 가주가 될 수 있었다.
“또 장룡이 자신보다 강한 여인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지 않느냐? 그곳에는 그럴만한 여아들이 충분히 있어.”
“설마···.”
가주의 말에 태상가주가 고개를 젓는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야. 단지 지켜보고 싶구나. 내가 볼 땐 분명히 장룡이는 완전히 달라진 듯했어. 사람이 죽을 위기를 겪으면 바뀐다는 게 정말이구나 싶더구나.”
“예, 알겠습니다. 저도 이미 결정을 내린 사항이니 더는 걱정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단목무광이 마음을 정리한다.
애초에 장룡에겐 기대가 없었다. 그가 무슨 사고를 칠지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기회를 주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 잘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구룡환(九龍丸)을 내어주기로 했다.”
구룡환.
영약 중 하나로 10년의 공력을 품고 있는 물건이다. 단목세가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영약이었다. 언젠간 단목청야가 천룡각에서 나오는 날 선물로 주려고 생각했던 영약. 그걸 단목장룡에게 준다?
가주는 잠깐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그 영약을 구해온 것도 태상가주였다.
“알겠습니다. 후우··· 장룡이 아버지의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진심 어린 가주의 말.
그라고 장룡이 잘 안되기를 빌겠는가?
단지, 그를 몇 번이고 믿어왔었기에.
매번 실망을 안겨줬기에 이번에는 부디 잘해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흘흘, 그럴 것이다.”
가주의 걱정과는 달리, 태상가주의 표정은 걱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