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36)

* * *

그날 밤.

혼사가 깨졌다고 하더라도 단목세가와 진주언가는 당연히 교류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들의 목표는 똑같았다. 오대세가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이런 일로 그들의 관계를 깨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언가의 사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연못에 있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언승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군요.”

언승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감사했어요. 단목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면 전 참으로 곤란했을 거예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뭐 그렇게 의도한 것도 있었다.

언승지가 비무에서 패배하면 언가에서의 위치가 곤란해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망나니로 찍혀있는 마당에 그렇게 한마디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런가요.”

언승지가 내 옆에 앉았다.

당연히 그녀는 전혀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라는 게 느껴진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혼사가 이렇게 쉽게 깨지다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저 같은 망나니와 혼인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저기.”

“예.”

“정말 망나니 맞으세요?”

그 물음에 실소가 나온다.

“글쎄요.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오늘 식사자리에서도···.”

단목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언가에게 단목세가의 의지가 그러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겠다는 듯. 식사자리에서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던 것은 언승지와 단목산산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시선은 익숙하거든요. 딱히 신경도 안 씁니다.”

언승지가 멈칫한다.

슬픔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거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말한다.

“이렇게 된 마당에 제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공자님은 망나니가 아니라는 거 저는 알아요. 계속 기억하고 있을게요. 공자님은 절대 망나니가 아니라는 걸···.”

닭살이 돋는다.

사실 그녀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러낸 것은 아니었다.

화제를 돌린다.

“궁금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건···.”

우물쭈물하는 언승지.

“왜 언 소저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합니다. 언 소저는 저돌적인 무공이 맞지 않아요.”

“언 소저는 유연하게 싸워야 합니다. 사실 언 소저의 공격이 모두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 보십시오. 이건 언 소저가 권격을 짧게 끊어칠 때 생긴 겁니다.”

어깨를 보여준다.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사실 그녀의 공격을 모두 흘려내고 피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직 내력을 다루는 데 익숙해지지 않았고, 몸도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 비무에서 얻은 것이 꽤 있었다.

내가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공자님···! 괜찮으···.”

“괜찮습니다. 아무튼, 언 소저께선 언가의 무공처럼 강력한 일격보다는, 상대의 빈틈을 계속 노리는 무공이 맞습니다. 체구도 작으시니 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요. 언가의 무공에 언 소저를 맞추지 마십시오.”

언가의 무공을 이 자리에서 개조하여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조만간 큰 화를 당할 것이다. 무림에서 그런 존재는 위험으로 인식되니까.

그녀는 내 조언을 듣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뭐 내 조언을 듣고 극복할 수 있느냐는 그녀에게 달린 것이다.

오랜 침묵이 끝나고, 그녀는 탄성을 터트렸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해요··· 분명히 한순간 손에 감각이 달랐던 것 같아요.”

“예, 그거면 됐습니다.”

“공자님께선 실력을 숨기고 계셨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조금씩 내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세가 내에서의 평은 그리 좋진 않지만···.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공을 수련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언승지의 눈빛이 점점 그윽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언가의 사람들은 의창현에서 떠나갔다.

언승지는 천룡각에 온다면 내 재능을 만개할 수 있을 거라며 그곳에서 꼭 다시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난 그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뭐 그곳에 입학하는 게 아니라 탐방 정도라면 생각이 있긴 했지만···.

다음 날부터 단목세가의 장원에 머물라는 명이 내려왔다.

가주인 단목무광은 아직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지만, 그래도 내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내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너무 튀는 것도 좋지 않지.’

지금은 잠자코 성장할 때였다.

재능을 과시할 때는 아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 할 것이다.

언승지와의 비무에서 체력의 한계를 톡톡히 실감했다. 얼른 체력을 길러야 한다. 슬슬 근육도 붙고 있으니 성장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래도 믿을 만한 비무 상대가 있으면 좋긴 하겠는데···.’

혼자 초식을 수련하는 것보다 상대가 있는 것이 훨씬 좋다.

내가 무공을 해석하는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그걸 적응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육신의 재능은 확실히 과거보다 떨어졌다. 지속해서 한계를 파악하고 개선해야 한다.

전각 앞에는 작은 연무장도 있었기에 그곳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오라버니?”

단목산산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구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나요?”

“저번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날 미행하더니?”

“어휴, 미행이 아니라니깐요?”

단목산산의 눈빛에는 이전에는 없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존경?’

뭐 눈빛으로 상대의 감정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요. 동생이 오라버니를 뵈러 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검까지 챙겨서?”

찔끔.

단목산산이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는다.

“저도 오라버니랑 같이 수련하고 싶어서요.”

“나랑?”

“네,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내가 강하다고 생각해?”

“당연하죠! 어른들은 자꾸 오라버니를 깎아내려고만 하지만··· 전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가 대단하다는 걸요!”

신교에서 내게 이렇게 접근하는 자들은 모두 어두운 속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신교 사람들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목산산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정파의 인물이라 그렇게 생각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귀여워서?

아무튼.

“마침 잘 됐다. 나랑 같이 수련할 상대가 필요했는데.”

“정말요?”

“그래, 비무 상대가 필요했거든.”

움찔!

단목산산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다.

“전 비무가 무서워요. 상대가 다칠 수도 있고··· 저도 다칠 수도···.”

“그럼 나랑 수련하기 싫다는 거지?”

“그,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할게요! 오라버니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뭐든지? 정말이지?”

“그게··· 네에···.”

단목산산이 잔뜩 긴장한다.

뭐 그녀에게도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까이 와라.”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곤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장남이 보여준다

“하아악···! 하아악···! 이제 못 버티겠어요···!”

소녀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녀의 앞의 사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감내한다.

“후우욱···! 후욱···! 조금만 더 참아 봐!”

“오라버니···! 더 이상은···!”

투욱.

소녀, 단목산산은 결국··· 목검을 떨어트렸다.

검을 놓은 그녀의 손이 벌벌 떨린다.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져 벌겋게 변해 있었다.

“후우욱···. 나보다 못 버티면 어떻게 하느냐?”

단목장룡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뒤덮여있었다. 사실 공격하는 쪽보다 피하는 쪽이 체력의 소모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체 체력이 좋지 않던 단목장룡은 압도적인 정신력을 활용하여 육신을 제어하던 중이었다.

수련이 끝나자 단목장룡의 거구가 넘어질 듯 휘청인다.

“오, 오라버니!”

하지만 단목장룡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오랜 수련 이후에도 앉아서 쉬지 않고, 연무장을 걷기 시작한다.

단목산산이 황급히 단목장룡을 쫓는다. 그녀 또한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단목장룡도 걷는데 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단목산산도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악바리 기질이 있었다.

뒤따르는 단목산산을 보며 단목장룡이 속으로 웃는다.

‘괜찮아. 좋은 선택이었어.’

지금 그녀와 하는 수련은 천 번 찌르기.

딱히 유서 깊은 수련 따위는 아니다. 단목장룡이 최근에 고안해낸 수련방법이다. 단목산산이 어떤 초식이든 천 번을 펼치고, 단목장룡은 그것을 모두 피해낸다. 걷고 뛰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

그리고 단목장룡의 생각은 적중했다.

몸의 감각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덩달아 늘어나는 체력은 덤이었다. 육체는 하찮으며 혼은 뛰어났지만, 몸을 굴리면 굴릴수록 그 균형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이 느껴진다. 뭐 아직 한참 멀었긴 했지만··· 혼자보다 같이 수련하니 더 성취감이 있었다.

단목산산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초식 또한 조금씩 정교해지고 예리해졌다.

“하아··· 어떻게 한 번을 못 맞추죠···?”

체력의 회복력은 단목산산이 더 빨랐다.

진이 빠져 검을 놓쳐버렸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단목장룡을 따라잡았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그건 그렇지만···.”

단목산산은 천 번 찌르기가 시작할 때는 오늘을 기필코 맞추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똑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단목산산이 먼저 지쳐 검을 놓치거나, 천 번 동안 한 번도 단목장룡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저 육중한 몸에서 어찌 그런 움직임이 나오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달라···.’

이제까지 단목세가에서 이런 수련법으로 검을 단련한 적은 없었다.

이런 기발한 생각 덕택에 단목장룡이 강해졌을 것이리라. 단목산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은 기필코 검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좋은 마음가짐이야.”

두 사람은 연무장의 끝으로 다섯 바퀴를 돌고 바닥에 앉아 쉴 수 있었다.

“네 문제점을 말해줄게.”

“네!”

사실 이것도 휴식이라기보단 수련의 연장선이었다.

단목산산은 본래 무공 수련에 집착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적당히 하루 치 수련을 마치면, 서책을 읽거나 장원을 나서 친구들과 놀곤 했다.

하지만 단목장룡과 수련한 이후에는 친구들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지치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네가 고려해야 할 것은 내 체력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야. 너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지. 그걸 항시 유념해. 혼자 싸우는 게 아니야. 상대의 입장도 고려해야 최선의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거야. 모든 무공은 그렇게 만들어졌어.”

“네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검을 놓친 것에 후회했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오늘은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막상 단목장룡이 쉽게 검을 피해내면 그 의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단목장룡이 고민했다.

그의 기감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과거처럼 감시의 시선은 없었다. 그런데 단목산산에게 이것을 알려줘도 될까?

‘아직은 아니다.’

보름 동안 지켜본 단목산산.

그녀는 의지가 굳세고, 정과 의리가 있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온 것은 단목세가주가 장룡이 뭘 하는지 직접 지켜보라는 명을 받은 것도 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수련하기로 한 첫날 그것을 말해준 단목산산이다.

‘산산의 경지가 더 오르고, 적당히 실력을 숨길 수 있을 때가 오면.’

그녀에게 자신이 개조한 무공을 알려줄 생각이다.

단목산산이 강해지면 단목장룡도 더 강해질 수 있다. 그것이 비무 수련의 장점이었다.

“오늘 수련했던 것을 마음에 새겨. 초식을 무의식에 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무공을 펼치는 건 인간의 의지야.”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사실 오늘 수련에서도 위험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단목산산의 재능은 천재라던 단목경보다 뛰어난 듯했다. 뭐 단목장룡의 기준에선 단목산산도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절정까지는 무난하게 닿을 재능이었다.

단목장룡은 수없이 많은 무공서와 그 무공을 익힌 인간들을 살펴보며 사람의 재능을 판별하는 능력을 키웠다. 당연히 그 판단이 10할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예상을 깨고 경지를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더 못한 경지에서 멈춰버릴 때도 있었다.

‘혈우검마가 그랬었지.’

그는 극마(極魔)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혈영검법의 문제점을 개선하며 그는 성장했다. 10년이 지났으니 그는 분명히 극마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파의 경지로 따지자면 화경(化竟).

사실 무림인들이 편의상 만들어놓은 무공의 경지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단목장룡의 기준에서 절정의 경지가 오히려 초절정의 경지보다 더 강한 경우도 있었다. 극히 드문 경우긴 했지만 말이다. 경지는 경지일 뿐. 그것에 매몰되면 정체될 뿐이다.

오늘 비무를 되돌아보고, 여러 생각을 정리한다.

무공 수련이라고 죽자고 검만 휘두르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되새김질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변해 있었다.

“저, 뭔가를 깨달았어요!”

“응?”

“후후후! 내일이면 알게 되실 거예요!”

그녀는 기대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번 명상에서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래, 기대할게.”

순간 단목장룡의 감각에 누군가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린다.

저 멀리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단목경이 보인다. 그는 장룡과 눈을 마주치자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아니야. 경이가 지켜보고 있더구나.”

“셋째 오라버니가요? 으음··· 우리랑 같이 수련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장룡은 단목경과 같이 수련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내일 기대할게.”

“네! 그럼 내일 봬요!”

단목산산이 쫄랑쫄랑 뛰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떠난 후에는 운기행공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으음, 언젠간 정기가 맑은 산이라도 찾아가야겠군.’

신교처럼 영약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으니 내력을 늘리려면 기가 충만한 장소를 찾아가서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단목세가의 터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조한 해우심법을 제대로 펼치는 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단은 집중하자.’

그렇게 해우심법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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