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36)

*  *  *

“후우우··· 후우우···.”

이제는 반 시진을 뛰더라도 버틸 만했다. 뭐 내공까지 활용하고 있긴 하지만 장족의 발전이었다. 과거엔 조금만 걸어도 지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는데, 이렇게 뛸 수 있다니? 물론, 전력으로 질주한다기보다 적당히 쉬엄쉬엄 속도를 내는 것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내 예상보다 신체의 적응이 빨라.’

지금 나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살을 빼고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그런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무공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성급하게 무공을 익힌다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만약 주화입마라도 걸리는 날에는 신교에 복수고 뭐고 모두 다 허탕이 된다.

난 하루하루 신체의 변화를 철저히 기록하며 체계적으로 수련했다.

그렇게 집 근처를 뛰고 온 뒤에는 마당에서 검을 휘두른다.

검을 익힌 이들이 보면 코웃음 칠 아주 기초적인 동작. 위에서 아래로 베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 과정에 심혈을 기울인다.

인간의 근육이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전령으로 일하는 자는 발이 발달하고, 철을 두드리는 자는 어깨가 발달한다. 그런 것처럼 검법을 사용하는 무인 또한 검에 알맞은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

‘다리에 근육은 좀 붙었지만, 아직 팔에는 힘이 없구나.’

무게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원체 물살이었던 터라 일 각 정도 검을 휘두르자 녹초가 된다.

이미 뜀박질로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더 피로했다.

‘마지막 열 번.’

어깨가 덜덜 떨렸지만, 차근차근 이 한계를 극복해야 나가야 한다.

“허어억···! 허어어억···!”

목표로 했던 육체 수련을 모두 마쳤다. 과거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쾌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사실 과거에는 이렇게 한계를 넘는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검을 휘두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완벽한 근육이 붙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일까? 심법을 수련하면서도 느꼈지만···.

‘재밌다.’

살살 팔을 돌려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누군가 내게로 다가온다.

사실 밖에서 뜀박질할 때부터 누군가 날 따라온다는 것을 느꼈다. 일부러 모른 척했는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예쁘장한 소녀.

단목세가의 상징인 백의, 허리춤엔 검이 있었다. 이새붕에게 듣기로 내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단목세가의 규모가 크다 보니 사촌까지 합치면 여동생이나 남동생은 더 많을 테지만, 내 앞의 소녀는 가주의 직계였다.

바로 나처럼.

“기억을 잃었다면서요?”

“그래, 네가 산산이냐?”

“우우··· 말투가 이상해요.”

그래도 단목경처럼 반말을 찍찍 내뱉지는 않는다. 그래도 첫째 부인은 예절 교육을 잘 해둔 것 같았다.

“왜 날 미행한 거지?”

“미행? 미행이라고요?”

“몰래 졸졸 따라오는 걸 미행이라고 하지 않아?”

내 말에 소녀, 단목산산이 조금 당황한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제가 오라버니를 미행한다는 게 말이 이상하잖아요.”

“으음, 그렇군. 그럼 왜 날 따라온 거야?”

이제야 좀 낫다는 표정을 짓는 단목산산.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해?”

“네, 어머니랑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요즘 살을 빼고 있다느니··· 기억을 잃었다느니 말이에요.”

“진짜 달라진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네에.”

“그럼 어때? 달라진 것 같아?”

“우우움, 확실히 뭔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분위기나 외모나··· 어릴 적의 오라버니를 보는 것 같달까요?”

어릴 적이라···.

그러고 보니 단목장룡은 외가가 망하기 전까지는 밝은 아이였다고 들었다. 

“근데 셋째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가 때린 거예요?”

“글쎄.”

“셋째 오라버니한테 물어보니 기겁을 하더라고요. 그 자신만만하던 오라버니가 그렇게 겁먹은 모습은 처음 봤어요.”

단목산산이 쫄래쫄래 내게 다가온다.

순진무구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왜 갑자기 이렇게 바뀌었어요?”

“머리가 다친 부작용이지 않을까?”

“그건 부작용이 아니라 좋은 작용 아니에요? 사람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좋은 작용이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럴 수도 있겠지.”

“저도 머리 다칠까요? 그럼 오라버니처럼 확 달라질 수 있을까요?”

달라지고 싶다?

“네가 달라지고 싶은 게 뭔데?”

“으음, 자신감···?”

“네가 자신감이 없다고?”

지금 행동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게 있다. 단목산산의 걸음으로 추정컨대 무공도 꽤 익혔을 것이고, 외모도 출중하다. 더군다나 집안도 좋다.

뭐 그것만으로 사람을 모두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네, 저 사실 눈치를 많이 보거든요.”

“후우···.”

그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뭐 휴식도 취할 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했다. 마루에 앉으니 단목산산도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너 눈치 많이 보는 것 맞아?”

“맞아요.”

“지금은 안 보잖아.”

“오라버니 앞에선 왠지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쉬워 보이는 게 아니라?”

단목산산이 입술을 내민다.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뭐 사람은 달라지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딱히 흘러가는 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난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사내로선 이해하기 힘은 여인의 마음.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무공보다 재밌었다. 지금은 뭐가 더 재밌냐고?

‘지금도 당장 무공 수련을 하고 싶지만···.’

그래도 단목산산과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목세가의 사람 중에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가 또 누가 있을까? 이새붕을 제외하곤 말이다.

꽤 오랜 대화를 마치고 단목산산이 일어선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많았어?”

“으음, 조금요? 사실 저만 말하고 오라버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듣고만 했었는데··· 지금이 더 나아요. 장룡 오라버니와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네.”

“참···. 첫째 오라버니가 돌아오신 건 들으셨죠?”

“어? 아, 새붕이에게 들었다.”

단목세가의 첫째 공자.

그는 천룡각이라는 곳에서 1년의 교육을 마치고 잠시 돌아왔다고 했다.

무림맹에서 만든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 양성 학관이라 할까? 내가 청해성 서녕지부에 있을 때도 간간이 들은 적은 있었다. 신교에서는 소꿉놀이 장난이라며 그것을 무시하곤 했었다.

“이번에 셋째 오라버니도 천룡각에 들어갈 수도 있대요.”

단목경이 떠나는 건가?

차근차근 교육해주려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오라버니나 저나 다른 곳에 보내질 수도 있대요.”

으응?

다른 곳에 보내진다고?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오라버니.”

조금 슬픈 눈빛을 하며 떠나가는 단목산산이었다.

*  *  *

단목산산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가주의 호출을 받아 단목세가로 돌아갔다. 장원 전체에서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아직 음식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상태라 배에서는 천둥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뭐 지금은 하루 정도 폭식해도 괜찮지.’

오히려 최근에는 식사량을 늘리고 있었다.

과거엔 빼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은 살덩이였지만, 지금은 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턴 이 살덩이를 근육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려면 식사량을 늘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게 이새붕과 함께 가주전으로 향하고 있으니 식솔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허어··· 둘째 공자님이 살을 뺀다고 하시더니 정말 달라지셨네.”

“그러게나 말이야.”

“은근히 인물이 사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이목구비가 뚜렷하시니까···.”

그들은 내가 듣지 못하리라 생각할 테지만,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해우심법을 익히면서 몸의 감각이 살아났다. 무림인들은 내력이 쌓이면서 점점 초인이 되어간다. 나는 그 과정에 있었다.

“이번엔 혼사가 잘 성사됐으면 좋겠네.”

“그러게. 이제 장가가셔도 충분할 나이니까···.”

응?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혼사라고?

설마 나?

한 달 전 단목산산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눈치를 본다고 했으며, 마지막에 왠지 슬픈 눈빛을 했다. 또한, 그녀와 나를 다른 곳에 보낸다고 했었다. 설마 나도 천룡각에 보내려고 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잘못 짚었군.’

당연히 혼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새붕아, 내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

“예? 아뇨. 혼인하신다고요? 갑자기?”

“아니다. 가자.”

이새붕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가주전으로 가는 속도를 높인다. 그곳에 도착하자 이전보다 많은 수의 무인들이 가주전을 호위하고 있었다. 마치 단목세가의 세를 과시하는 듯이 말이다.

“2공자님, 오셨군요.”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공자님께서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공자···.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기품이 절로 흐르는 미공자가 걸어 나온다. 단목경과 조금 닮은 것 같았는데, 훨씬 잘생겼다. 그는 하얀 이를 훤히 드러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오, 장룡이 왔구나. 살을 뺐다더니 정말이군. 믿지 못했는데 이제는 믿어야겠어.”

“형님을 뵙습니다.”

“그래, 잘 지냈느냐?”

“예···.”

기억을 잃은 것을 들었을 텐데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단목청야. 그는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하, 이놈 이거 이제 근육도 붙었구나. 예전에는 순 물렁살이었는데···. 형의 마음을 알아주었구나. 대견하다.”

뭔 소리야?

이새붕에게 듣기로 단목청야는 과거에 날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거북했다. 꾸며진 미소 뒤에 다른 속내가 있을 것 같았다. 신교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람처럼 말이다.

“안에 들어가서 차근차근 설명해주마.”

그는 가주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날 데려갔다.

단목청야의 방이다.

“이야기는 들었느냐?”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내 너를 위해 천룡각에서 배필이 될 여인을 물색했다. 그중 참으로 너와 잘 어울리는 여인이 있더구나.”

“···.”

“너를 위해서도, 가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곧 언 소저가 도착하실 것이니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그는 언 소저라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과 주의해야 할 것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혼사가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뭐 무림에서 정략혼은 비일비재한 일이긴 했기에 이상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데 형님.”

“궁금한 것이 있더냐?”

“형님도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는데, 동생인 제가 먼저 가면 되겠습니까?”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고.

단목청야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망나니의 폭탄선언

“그러니까 언가에서 직접 오겠다고 했단 말이냐?”

“예, 아버지.”

단목청야는 어릴 적부터 세상의 이치를 빨리 깨달았다. 귀여웠던 시절이 짧았던 만큼 아비의 입장에선 조금 서글펐지만, 그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었다. 단목장룡처럼 사고도 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들.

“그런데 그게 되겠느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장룡이는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아이다. 오히려 단목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구나.”

“이미 언가의 장남과는 말을 모두 맞춰놓았습니다. 언승지는 타고난 체질이 약해 가문에서도 딱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언가의 여식. 장룡이를 주고 언가와 사돈을 맺는다면 힘을 합쳐 팽가를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또, 산산이까지 언가의 대공자와 혼인시킨다면 언가와 단목세가는 혈맹을 맺는 겁니다.”

출세만을 위해 달려가는 아들이지만.

단목무광은 그걸 말리지 못했다.

사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그런 탐욕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욕심. 단목청야는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목무광은 아들을 밀어주고 싶었다.

더 높이 날아오르도록.

“그래, 이번에도 너를 믿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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